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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슬로우뉴스가 20대의 목소리 [미스핏츠]와 함께 합니다. (편집자)

“지금 나는 자취하고 있으며, 연애도 하고 있다. 정말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버틸 수가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그냥 한 명의 알바생이 무엇을 했더라는 이야기다. 지금도 알바 준비를 하며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너희에게 보내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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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이었다.

여느 겨울처럼 날씨는 추웠고, 뉴스에선 연일 세계금융위기 얘기를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꾸역꾸역 1년 차를 보내고 있었지만, 난 심심했다. 수능이 끝났으니까.

수능이 끝난 고3들은 성인 취급을 받지는 않지만, 더 이상 학생 취급을 받지도 않는다. 다들 자유를 만끽했다. 매스컴에서처럼 수능을 치르고 허무에 빠진 친구는 적어도 내 주위엔 없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 수석을 먹는 친구가 내 주위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몇몇은 여행을 떠나고 어떤 이는 연애를 시작했다. 나도 그네들처럼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여행을 떠나기엔 돈이 없었고 연애를 하기엔 너무나 부끄부끄했다. 나보다 한 발 빨리 심심해했고 그 덕에 먼저 알바를 하고 있던 친구는 그때 알바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내게 던졌다.

아, 알바라니!
아, 알바라니!

시급, 업종, 근무시간 따위는 듣지도 않은 채 나는 제안을 수락했다. ‘알바’라는 단어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던 고딩에게 그만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도 이제 돈을 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장소는 무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PC방.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일하는, 속칭 야간 ‘피돌이’ 일이었다.

사장님과 가벼운 면담을 거쳤다.

“그래 얼굴이 익숙하네?”
“아 네, 친구들이랑 자주 왔었거든요.”

다행히도 사장님은 나에게서 특별한 결격사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전임자는 앞으로 2주일 동안만 일하니 그 다음 날부터 출근하면 된다고 일러줬다.

2주는 금방 흘러갔다

첫 출근을 했다. 인계받은 내용은 생각보다 별것이 없었다. 카드를 찍으면 지불할 금액이 나왔고 돈을 받아 거스름돈을 내주는,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아침에는 PC방을 청소해야 했다. 물과 라면은 셀프지만, 재떨이는 요상하게도 셀프가 아니었다.

내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청소년을 쫓아내는 일이었다. 밤 10시에 방송이 나오면 자리를 돌아다니며 ‘집에 가세요. 꼬꼬마들아!’ 부탁하는, 그런 일. 다행히 근방에 두발자유는 공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학교밖에 없었기에 이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사장님은 자비롭게 밤에 일하면 힘드니 컵라면은 마음대로 먹으라 하시며 집으로 가셨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첫 밤을 맞았다.

그리곤 보름이 지났을 때, 나의 피오렌티나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이렇게 동그라미들이 뽈뽈 뛰어다니는 게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이렇게 동그라미들이 뽈뽈 뛰어다니는 게임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생각과는 달리 일은 즐겁지 않았다. 밤새도록 게임하고 돈도 받다니, 이만큼 꿀 알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은근히 손님들이 자주 왔기에 할 수 있는 게임의 종류는 턱없이 제한돼 있었다.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은 바둑, 장기류 외에는 딱히 없었고 이마저도 초읽기가 시작되면 계산하겠다는 손님에게 게임 조금만 더 하고 오라고 말하고픈 기분이 되곤 했다.

FPS, RTS 게임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결국, 게임 중간에도 자유롭게 끊을 수 있는 싱글플레이 게임만이 그나마 해 볼법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게임으로 FM(풋볼 매니저)!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처음엔 나에게 감동을 줬던 컵라면도 하루 이틀이 지나자 생존용 식량이 되어버렸다. 튀김우동, 우육탕면, 짜장볶이의 로테이션은 어딘가 창의력이 부족하다. 아아, 그 시절에 꼬꼬면만 있었더라면 이토록 절망적이진 않았을 텐데. 견디다 못해 컵라면 옆에 진열되어 있던 꾸이꾸이와 아침엔 도넛에 손을 댔다.

사장님은 밤새 먹은 목록에 적혀있는 꾸이꾸이를 보곤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이 정도면 오래 참았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눈빛이었을까.

‘세상을 여는 아침’ 

라디오에서 ‘세상을 여는 아침’이 흘러나오면 퇴근 준비를 시작한다. 굿모닝 FM이 시작할 때가 돼야 퇴근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그 때부터 설렜다. 라디오에선 새벽 알바를 하는 이들의 사연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편의점에서 일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힘들지만 나한텐 꿈이 있으니 응원해달라는 뭐 그런 거. 그런 사연 이후엔 어딘가 감동적인 노래가 나왔고, 짜장볶이의 물을 버리다가도 묘하게 감성적이 되곤 했다.

한 번쯤 사연을 보내봤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의 알바 사연은 그들에 비해서 재미도 없었고, 치열함도 부족했다. 밤새도록 FM을 들으며 FM이나 하다 집에 가는 알바생에게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었을까.

문을 열고 나오니 눈이 와 있었다. 눈이 부셔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진: sticker)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진: sticker)

pc방 알바생에게 게임은 재밌어서 한다기보다는 관성적으로 켜고 하는, 그런 존재가 돼 버린다. 그보단 사람을 관찰하는 편이 훨씬 흥미로웠다. 한밤의 PC방엔 다양한 사람이 온다. 장년층은 주로 포커나 섯다를 애용한다. 아이온이나 리니지, 와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여기에 카오스를 하는 대학생들과 도타를 하는 몽골 유학생을 더하면 전체의 80%가량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주로 술 한 잔 걸치고 오는 분들이다. 이들이 하는 게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 스타를 했다가, 카트라이더를 하기도 한다. 몇 명은 이내 잠들고 보통은 나와 함께 아침에 퇴근했다.

매일 pc방을 찾던 한 아저씨

그는 나를 “알바야!”하고 불렀다. 처음엔 역시나 “저기요”였지만 ‘저기요’가 ‘여기’가 되고 ‘여기’가 ‘알바야’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부르면 나는 달려가서 100원을 받아 커피를 뽑아와야 했다. 가끔은 200원을 주면서 내 것도 같이 뽑아 마시라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훈훈할 데가. 그가 나를 알바라고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 커피가 되는 줄만 알았긴 개뿔. 이후에는 셀프 영역인 컵라면까지 부탁해 왔다. 물론 고분고분 물을 받아다 주긴 했다. 꽤 무섭게 생기셨더라고.

정장을 입고 PC방에 들어 온 다른 아저씨는 처음부터 나의 이목을 끌었다. 누가 봐도 ‘PC방 처음 와봐요’하는 몸짓으로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던 정장남은 아이디를 만들고 로그인을 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하릴없이 인터넷을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냥 집에 가기 싫어서 왔구나 싶어 신경을 끈 동안  그는 아이온 캐릭터를 만들어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다. 두 시간가량이 흐른 후 그는 계산하고 밤거리를 향해 나갔다.

그 날부터 며칠 동안 출근을 하면 그는 정장을 입고 아이온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가 앉는 자리는 정해져 있었으며 변하는 것이라고는 나날이 추레해지는 옷차림뿐이었다. 어느 날 오늘도 오셨네 하고 바라본 그의 자리에는 43시간이 찍혀있었다.

사람이 폐인 되는 거 한순간이구나.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PC방에서 게임하다 죽은 사람도 있다는데.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 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 100원을 털어 커피 한잔을 뽑아다 드렸다. 그는 그 날 나와 함께 퇴근했고, 계속 나의 뒤를 따라왔다. 뭘까, 스무 살 먹고 삥 뜯기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는 자연스레 우리 옆집으로 들어갔다. 허, 옆집 아저씨였다니. 그 날 이후 묘하게도 정장남은 우리 PC방을 다시 찾지 않았다.

주마등같이 스쳐나간 언젠가의 뉴스
주마등같이 스쳐나간 언제인가의 뉴스

뭐 어쨌거나 그렇게 2개월 정도를 일했다. 집에 오면 씻지도 않고 잠들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오늘도 3만 원을 벌었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10시간 일하고 3만 원? 놀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내 시급은 3천 원이었으며, 야간수당 1.5배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알바생들에게 최저임금 이하로 주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편의점 알바 공고에도 당당히 시급 3,000원을, 많이 주는 곳은 3,500원을 써 놨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의 시급란에 추후 협의라고 적혀있던데, 아직도 잘 모르는 학생들을 최저임금 이하로 부려 먹는지는 모를 일이다.

한 통의 전화

저녁에 느지막이 일어나, 알바를 준비하던 중 대학 입학처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곳에선 내가 아직 등록금을 내지 않았음을 통보하며 등록을 포기하는 것인지를 물어봤다. 에이 그럴 리가요, 지금이라도 내겠다고 얘기했지만, 납부 계좌는 10분 후면 닫힌다며 빨리 납부하는 수밖에 없단다. 그동안 등록금을 구할 수 있을 리 없던 나는 그렇게 등록 포기자가 됐고, 한 명만 빠지기를 염원하고 있었을 대기인원을 대학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난 재수생이 됐다. 그것참, 그런 건 미리미리 좀 알려주지 10분 전에 알려주는 게 어딨어. 사람 당황스럽게 말이야.

근데 그런 사람이 은근히 좀 있나보더라.
근데 그런 사람이 은근히 좀 있나 보더라.

출근하니 마침 사장님이 계셔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재수를 알아봐야 했기에 알바를 더는 못하게 됐다고 말씀드리자 사장님은 나보다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건 잘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사장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 후임으로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채 그간의 월급을 정산하고 나는 PC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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