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는 ‘80억 명의 조별 과제’라고 한다. 누군가 하겠지 하고 미루다 보면 다같이 망한다. 탄소 감축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나경원(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중소기업 탄소중립 촉진법’중소기업이 자발적으로 탄소 감축에 동참하면 수익 창출 기회를 열어주자는 취지의 법안이다. 나경원은 윤석열 정부 초기 기후환경대사를 지냈고 지난해 중소기업 탄소중립 촉진법을 대표 발의했다. 12일 토론회에서는 “중소기업의 탄소중립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배출권 거래제(ETS) 대상 기업은 700여 개, 대부분 대기업이다. 중소기업들은 배출 규제에서 자유롭지만 전체 탄소 배출의 30%를 차지한다. 크게 새는 바가지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30% 구멍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윈윈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 보자는 게 나경원의 제안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구호와 선언을 넘어 좀 더 구체적인 감축 목표와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 문재인 정부는 2018년 기준으로 7.3억 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4.4억 톤으로 40% 줄이겠다고 했다. 2022년 기준으로 6.2억 톤까지 줄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로드맵에서 더 나가지 않았다. 40% 감축 목표를 유지했을 뿐 실행 전략은 후퇴했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원자력 비중이 늘고 재생 에너지 비중은 더 줄었다.
  • 기후 변화는 진영을 초월한 주제다.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장기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규제적 탄소 시장과 자발적 탄소 시장.

  • 탄소 시장은 크게 두 가지다. 규제적 탄소 시장(CCM, Compliance Carbon Market)과 자발적 탄소 시장(VCM, Voluntary Carbon Market)이 있다.
  • 정부가 주도하는 규제적 탄소시장은 정부가 규제 대상 기업(주로 대·중견기업)에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할당하면, 기업들이 넘치거나 부족한 배출량을 거래하는 시장이다. 배출권 거래제(ETS, Emission Trading System)라고도 한다.
  • 자발적 탄소 시장은 민간 차원에서 확보한 감축 실적을 탄소 크레딧 형태로 거래하는 시장이다. 탄소 감축 의무가 없는 기업과 기관, 비영리단체 등이 사회적 책임과 환경 보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크레딧을 구매하여 넷제로를 실현하는 것이다.

더 깊게 읽기: 강제성 없는 ‘참 잘했어요’ 도장.

  • 규제 대상 기업(할당 대상 업체)은 실제 온실가스 배출량만큼의 배출권을 정부에 반납해야 한다.
  • 할당된 배출권(할당배출권, KAU·Korean Allowance Unit)보다 배출량이 많으면 배출권을 추가 구입해야 한다. 할당된 배출권보다 배출량이 적으면 배출권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다.
  • 배출권은 ‘오염시킬 수 있는 권리’로 봐도 무방하다. 현재 700여 개 기업이 배출권 거래제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 기업 전체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국가 총배출량의 73% 수준이다.
  • 반면 자발적 탄소 크레딧 시장은 정책 당국 규제 없이 민간 차원에서 온실가스 감축 프로젝트 투자를 통해 확보한 감축 실적을 탄소 크레딧 형태로 거래하는 시장이다. 탄소 감축 의무가 없는 기업과 기관, 비영리 단체 등이 사회적 책임과 환경 보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크레딧을 구매하여 ‘넷제로’(탄소 중립)를 실현하는 것이다.
  • 자발적 탄소 시장의 탄소 크레딧은 다시 ‘감축 크레딧’(Reduction credit)과 ‘제거 크레딧’(Removal credit)으로 나뉜다.
  • 감축 크레딧은 산림 황폐화를 방지하거나 재생 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 등 탄소 배출을 회피하거나 감축하는 프로젝트에 발급한다.
  • 제거 크레딧은 숲 복원과 조성, 공기포집 등 대기 중 배출량을 직접 제거하는 프로젝트에 발급한다.
  • 김태한(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의 표현을 빌리면, 배출권 거래제(ETS)의 할당배출권(KAU)은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증서를 미리 지급하는 개념”이고, 자발적 배출권(크레딧)은 “착한 일을 하고 나서 받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은 개념”이다.
  • 정부 주도의 배출권 시장에서도 배출권의 5% 범위에서 자발적 탄소 크레딧을 허용한다. 정부 승인을 거친 외부 사업의 온실가스 감축 실적(외부 사업 인증 실적, KOC·Korea Offset Credit)을 인정한다. 할당 대상 업체는 이를 구매해서 상쇄 배출권(KCU, Korean Credit Unit)으로 전환해 할당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자발적 탄소 크레딧, 거래가 안 되는 이유.

  • 한국 정부는 그동안 자발적 탄소 시장에 미온적 입장이었다.
  • “민간 중심의 자발적 탄소 시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운영 중이다. 다만 시장을 만들면 수요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크레딧을 발급해도 구매할 곳이 없으면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자발적 탄소 시장을 키우는 게 과연 가능할지 고민이 있었다.”
  • 고덕규(환경부 기후위기대응단 부단장)의 말이다.
  • 실제로 한국 배출권 시장의 거래량 대부분이 할당배출권(KAU)이다. 자발적 탄소 시장의 인증 실적(KOC)이나 상쇄 배출권(KCU) 거래량은 미미하다.
  • 왜냐하면 주요 기업들 할당량이 높게 잡혀 있기 때문이다. 배출량이 할당량을 크게 웃돌아야 배출권 시장보다 싼 자발적 탄소 시장을 찾을 텐데, 지금은 그러한 유인이 많지 않다.
  • 애초에 배출권 가격도 낮다.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KAU24 기준으로 톤당 9000원이다(3월14일 기준). 톤당 70유로 수준인 유럽연합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아직 시기상조란 얘기야?”

  • 임이자(국민의힘 의원)가 토론회 도중 발끈해서 한 말이다.
  • 고덕규: “시기상조라는 말씀보다도 좀 더 개선해 갔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 임이자: “그게 시기상조인데?”

“대기업과 중견기업부터 하자.”

  • 산업통상자원부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탄소 감축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 강감찬(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관)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업종이 (대·중견기업에 해당하는) 철강과 석유, 화학, 정유, 시멘트,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이라면서 “다배출 업종에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 자발적 탄소 시장의 수요자가 대기업인데 대기업이 빠진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겠느냐는 이야기다.

“확신이 없네.”

  • 임이자는 산업부와 환경부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비판했다.
  • 임이자: “VCM(자발적 탄소 시장)을 기회로 전환할 방안을 마련했습니까.”
  • 고덕규: “VCM 이야기는 지난해 말부터 나왔고 지금은 논의하는 초기 단계입니다.”
  • 임이자: “확신이 없네.”

중소벤처기업부 입장은 또 다르다.

  • “만약 법이 제정되면 왜 우리가 탄소 중립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인식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낌없이 뒷받침하겠습니다.”
  • 박용순(중소벤처기업부 기술혁신정책관)의 말이다.
  • 중소벤처기업부는 최근 3년 동안 기후 대응과 관련 해마다 2500억여 원의 융자 또는 컨설팅 지원을 해왔다.
  • 박용순은 “지금까지는 필요에 따라 지원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서 “법이 통과되면 정책 안정성과 예측 및 지속 가능성 차원에서 중소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성과 과제: 무상 할당이 너무 많았다.

  • 배출권 시장과 자발적 탄소 시장 모두 개선하고 보완할 지점이 있다.
  • 김태선(나무이엔알 대표)은 “ETS가 운영돼 온 지난 10년의 결론은 무상 할당이 너무 많았고 시장 참여자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라면서 “시장 운영 실패로 배출권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 배출권 가격이 낮으면 기업은 온실가스 감축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에너지 전환을 하거나 생산을 줄이기보다 시장에서 저렴한 배출권을 구매하면 그만이다. 한국은 탄소 다배출 업종에 무상 할당을 주는데, 특히 철강 산업의 경우 감축은커녕 배출권을 팔아 수익을 내고 있다.
  • 실질적 온실가스 감축을 무상의 배출권으로 때워온 결과, 막대한 비용 청구서가 날아올 거라는 경고도 나온다.
  • 당장 유럽연합(EU)은 2026년부터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 할당을 줄여 2034년이면 0%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탄소 감축이 국가 경쟁력인 시대.

  •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시행한다. CBAM 대상 품목은 철강과 시멘트, 비료, 알루미늄, 전력, 수소 부문이다. 한국의 경우 EU에 수출하는 CBAM 품목 가운데 철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89.3%에 이른다.
  • 탄소 관세는 생산국과 EU의 배출권 가격 차이에 비례한다. 무상 할당 덕분에 배출권 가격이 제로인 한국은 EU와 거래할 때 엄청난 탄소 관세를 물어야 할 수도 있다.
  • 김태선은 “CBAM의 경우 유럽과 한국의 탄소 가격 차이에 비례해 비용을 납부해야 한다”며 “유럽은 배출권 가격이 비싸고 한국은 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부가 유출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배출권 시장에서 배출권 가격이 지나치게 낮으면 보조 성격의 자발적 탄소 시장도 유명무실하게 된다. 자발적 시장에서 크레딧을 구매해 배출권 시장에서 그보다 비싸게 팔아야 마진이 생기는데, 배출권 가격이 지나치게 낮으면 자발적 시장에서의 거래 유인이 떨어진다.
  • 김태선은 “무상이 아닌 유상 할당을 늘리고, 정부가 그로 얻은 수익으로 자발적 탄소 시장에서 고비용 프로젝트로 탄소 감축을 하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무너진 신뢰와 부실한 인센티브.

  • 자발적 탄소 시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다.
  • 가디언은 베라(Verra)의 열대우림 보존 프로젝트를 분석한 결과 탄소 크레딧의 90% 이상이 탄소 감축 효과가 거의 없는 유령 크레딧이라고 보도했다.
  • 베라는 열대 우림을 보존하는 사업을 하면서 감축한(감축했다고 주장하는) 탄소 배출량만큼 탄소 크레딧을 판매해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삼림 파괴 가능성이 없는 지역이거나 이미 삼림 훼손이 제한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가짜 중립 또는 ‘그린 워싱’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 EU는 무역 상대국에 신뢰성 있는 (탄소 시장) 메커니즘이 있다면 배출량 산정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김기만(중소벤처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신뢰 기반의 자발적 탄소 시장 시스템을 구축하면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유종민(홍익대 경제학부 부교수)은 “크레딧 자체가 자발적이고 비규제 시장에서 이뤄지다 보니 신뢰성이 없고 가격도 제각각”이라고 지적했다. 유종민은 “미국과 영국, 호주 등은 정부가 개입해 자발적 탄소 시장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오고 있다”면서 “자발적 감축의 제도화와 신뢰성 강화 차원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자발적 탄소 시장일지라도 정부가 중소기업과 일반 국민의 소규모 온실가스 감축에 유인을 제공하고, 신뢰할 만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황유식(그리너리 대표)은 “온실가스 감축 사업자와 감축을 검증하는 제3자 기관, 크레딧 인증 및 발행 기관 등 공급자들과 구매자를 연결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론: 핵심은 인센티브.

  •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
  • 대기업도 잘 안 움직이는데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그것도 자발적 참여로 시장을 키우려면 공급과 수요 양쪽에 실질적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 그동안 법이 없어서 거래가 지지부진했던 게 아니다. 탄소 감축을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용어 설명.


⁕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파리기후변화 협정에 따라 참가국이 자국 상황에 맞춰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얼마나 감축할지 5년마다 목표를 세우기로 한 약속. NDC는 2020년 교토의정서 체제에서 파리협정 체제로 변화하며 등장한 개념.

⁕ 규제적 탄소시장(CCM, Compliance Carbon Market): 정부나 국제기구가 법적 의무를 부과하여 기업이나 국가가 정해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준수하도록 하는 시장. 배출권 거래제(ETS)와 탄소세 등이 대표적.

⁕ 배출권 거래제(ETS, Emission Trading System):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기 위해 정부가 배출권을 할당하고, 기업이 배출권을 거래하는 제도.

⁕ 할당배출권(KAU, Korean Allowance Unit): 국가가 할당 대상 업체에 할당한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 할당 대상 업체는 매년 1월~12월까지 배출한 온실가스에 상당하는 할당배출권을 이듬해 6월 말까지 정부에 제출.

⁕ 외부사업인증실적(KOC, Korea Offset Credit):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외부사업에서 발생한 온실가스 감축량. 할당 대상 업체는 자신이 보유한 KOC를 상쇄배출권(KCU)으로 전환할 수 있음.

⁕ 상쇄배출권(KCU, Korean Credit Unit): 외부사업 감축량을 할당 대상 업체가 전환한 배출권. 할당 대상 업체는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 할당배출권(KAU)의 5%까지 상쇄배출권(KCU)으로 대신 제출할 수 있음.

⁕ 그린워싱(Greenwashing): 녹색(Green)과 세탁(Washing)의 합성어. 기업이 친환경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친환경 이미지를 내세우는 행위.

⁕ 넷제로(Net-Zero):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을 같게 하여 순(Net) 배출을 0(Zero)으로 만드는 것. 탄소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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