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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중립성이용자포럼을 통해 한 논문을 우연히 접했다.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프라이버시 논의가 담긴 파격적인 논문이었다. 논문과 관련한 대화가 이메일로 이어졌다. 논문을 쓴 우지숙 교수는 대화에 참여하면서 ‘거짓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나 비밀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나쁘거나 문제가 된다는 증거 또는 사례에 의존하지 않고, 비밀과 거짓말에 대해 각 사회와 문화가 가진 어떤 가정, 느낌 등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사회나 문화에서는 비밀이라 하면 뭔가 어두운 것으로 보고, 특히 거짓말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사실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면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거짓말이 나쁘기보다는 그 반대인 경우가 너무 많잖아요. 영화 [라이어 라이어(Liar Liar)]만 보아도 거짓말을 못 하게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이라는 단어 자체를 멋있는 것으로 느끼는가 하면, 투명성이 그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처럼 흑백논리로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는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러한 문화적 입장이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학문적 논쟁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보통신행정연구소장)

우지숙 교수
우지숙 교수

프라이버시 이론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서 발전해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을 소극적인 권리로서의 ‘홀로 있을 권리’가 프라이버시권의 출발점이었다면, 고유한 독립적 인격체로서 스스로 개인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자기 정보 통제권은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획득한 현대적 의미의 프라이버시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디지털 기술의 고도화를 통한 상호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아이덴티티 프라이버시권’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특히,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까지를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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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가 발전해 온 3단계 

1. 홀로 있을 권리: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 프라이버시권의 출발점.   
2. 자기 정보 통제권: 고유한 독립적 인격체로서의 권리. 
3. 아이덴티티 프라이버시권: 디지털 상호 네트워크.  예) 거짓말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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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우 교수의 논문 [정보통제권에서 식별되지 않을 권리로](2005)를 바탕으로 프라이버시권이 발전해온 과정, 즉, 근대적인 프라이버시권(‘홀로 있을 권리’)와 정보 프라이버시권(자기권리 통제권)을 간단히 살피고,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라는 도발적인 화두와 함께 우 교수가 제시하는 ‘상호 네트워크 환경에서의 프라이버시 논의'(아이덴티티 프라이버시권)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 opensourceway, CC BY SA)
(사진: opensourceway, CC BY SA)

근대적 프라이버시권: ‘홀로 있을 권리’

프라이버시권은 우선은 ‘홀로 있을 권리’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프라이버시는 당대의 매체 환경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다. 근대적인 의미의 프라이버시권이 생성한 시기는 ‘인쇄매체’가 미디어 환경을 지배하던 시기다. 달리 말하면, 인쇄매체가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 소통을 매개하던 시절이다. 인쇄기술의 발전은 프라이버시에 관한 침해 가능성을 현저히 높였다.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19세기 말 토마스 쿨리의 저서 [불법행위에 관한 연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방해받지 아니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언급했다(Cooley, 1888). 그러나 이 권리가 하나의 통일적인 법적 권리 개념으로서 명확하게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890년 워렌과 브랜다이스(Warren and Brandeis, 1890)가 [프라이버시권]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논문에서 “홀로 남겨질 권리”(right to be let alone)를 프라이버시로서 개념화한 이후이다(이구현, 1998) (113)

워렌과 브랜다이스가 [프라이버시권]이라는 논문을 쓴 중요한 계기도 딸의 결혼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는 것에 관한 워렌의 스트레스와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워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초기 프라이버시권은 국가권력과 언론기관이라는 거대한 기관으로부터 한 개인이 자신의 정보를 지켜낼 수 있도록, ‘사생활’은 그런 국가와 언론이 간섭할 수 있는 대상의 바깥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인쇄매체의 발전은 동시에 프라이버시의 위기를 가져왔다
(사진: kevin dooley, “Penetrating media”, CC BY)

즉, 초기 프라이버시권은 국가와 언론이 공적인 대상과 인물, 그리고 공적인 사건에 관해서만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설정하고, 그 밖의 사인(私人)의 사적 생활은 그 권력의 그물망에서 배제함으로써 ‘홀로 있을 권리’로서 프라이버시 이론을 발전시켰다. 즉, 초기 프라이버시권은 거대한 권력기구인 국가와 언론기관으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로서 프라이버시이론을 발전시켰고, 그래서 아주 소극적인 권리로서 ‘홀로 있을 권리’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권위가 막강했던 시대에서 개인이 국가기관이나 언론사를 상대로 직접적인 권리를 강하게 제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인쇄기술의 발전은 프라이버시에 관한 침해 상황만을 강화한 것은 아니다. 인쇄기술의 발전으로 비롯한 19세기 말 이후의 서적 보급은 ‘책 읽기’ 체험을 통한 시민의 개인주의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책 읽기를 자신의 고유한 사적인 체험의 영역으로 생각했으며, 서적의 보급은 그런 자기 체험을 보호해야 한다는 권리를 자각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현대적 프라이버시권: ‘자기 정보 통제권’

매체 환경의 변화와 프라이버시권이 긴밀히 관계 맺는다는 점은 앞서 말했다. 특히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모든 사람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집적하며, 또 유통하는 것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런 컴퓨터 문명이라는 환경 속에서 ‘정보 통제권’으로서의 프라이버시권이 대두하게 된다.

밀러(Miller, 1971, p.226)는 프라이버시의 기본 조건으로 “자신에 관한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들고 있고, 웨스틴(Westin, 1967, p.7)도 “개인, 단체, 또는 기관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타인에게 유통시키느냐를 본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정보프라이버시의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프라이드(Fried, 1968,p.482)는 “프라이버시란 우린 자신들에 관한 정보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우리 스스로 제어하는 권리”라고 정의하였다. (116)

대량 정보 교환과 유통이 가능해진 20세기 후반에 들어 많은 국가들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법안과 제도, 협약을 만들었다. 각 국가 상황별로 사생활 보호 정책은 차이점을 갖지만, “개인정보 보호에 중점을 두고, 특히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에 관한 정보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유통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제권”(118)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즉, 이러한 자기 정보 통제권으로서의 프라이버시권이 현대 프라이버시권의 근간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례행사처럼 터지는 각종 대형 정보 유출 사건들, 그리고 최근의 프리즘 사태에 이르기까지 사적 정보가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거대하게 집적된 개인 정보들의 대량으로 복제 유통할 수 있는 환경에서 점점 더 개인정보의 안전은 어려운 숙제가 되어간다.

무수히 많은 정보를 집적하는 컴퓨터 서버
(사진: univienna_BY_SA)

더욱이 컴퓨터 기술은 더욱 고도화해 인터넷(월드 와이드 웹)과 모바일 기기와 접목하면서 다양한 상호 네트워크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 교수는 ‘정보통제권’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프라이버시권 논의를 진행할 수 없으며, 새로운 네트워크 환경에 어울리는 새로운 개념의 프라이버시권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 ‘식별되지 않을 권리’ 등으로 표현되는 네트워크 프라이버시권 혹은 아이덴티디 프라이버시권이다.

상호 네트워크 환경에서 ‘정보통제권’이 갖는 한계

우 교수는 ‘정보통제권’의 한계를 다음 다섯 가지 질문을 통해 지적한다.

1. 누가 정보를 통제할 것인가

빅 브라더로 불리는 국가의 감시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보를 처리하는 수많은 컴퓨터의 침해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프라이버시를 둘러싼 역학 관계에서 중요한 변화는 ‘침해자들’이 광범위해진 동시에 그 존재를 확인하지 어려울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119)

개인이 정보의 흐름을 모두 모니터링하고, 또 자신이 사용한 정보의 출처들을 모두 기록하며, 관리하는 일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선 전문적인 대규모 정보 관리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런 능력을 갖춘 조직은 국가기관이나 거대기업일 수밖에는 없다. 즉, 고도화된 네트워크 컴퓨팅 환경 속에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정보통제력의 한계는 자명하다.

2. 어떤 정보를 통제할 것인가

어떤 정보를 누구로부터 통제할 것이고 어떤 정보를 어느 경우에 노출시킬 것인지에 대한 개인 결정에 의존하는 프라이버시 제도는 결과적으로 개인들에게 비현실적 부담을 지우게 되는 것이다. (121)

프라이버시 침해에서 심각한 것은 개인의 비밀정보(금융정보, 의료정보)라기 보다는 일상적인 정보(주민등록번호, 성별,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정보 등)다. 일상적인 정보들은 법적으로도 개인이 스스로 재량으로 보호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개인으로선 이런 일상적인 정보들이 어떤 수단, 어떤 단계를 거쳐 어떻게 가공되고, 유통되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정보 프라이버시 개념은 개인이 통제할 권리를 구별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모호한 제도가 될 수 있다”(Solove, 2002).

3. ‘참여적 원형감옥’: 네트워크 상호작용과 자발적 정보 제공

90% 이상의 웹사이트들이 이러한 쿠키 기술을 사용 (….) 인터넷상에서의 거의 모든 활동들은 항상 기록되고 매우 쉽게 데이터화되며 프로파일 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많은 비판적인 학자들은 개인들 신분이 쉽게 노출되고 이들에 대한 정보가 쉽게 사용될 수 있는 반면, 개인들은 감시자가 누구고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를 알 수 없는 현상을 감시사회나 원형감옥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121, 122)

많은 사람들은 쿠키기술에 의해서 제공되는 이러한 프로파일링이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사람들이 말로는 인터넷 프라이버시에 대해서 우려한다고 하면서도 고객편의나 다른 금전적 이익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중략…) 상호작용적 네트워크는 정보 사용자들이 개인정보를 더욱 쉽게 수집하도록 하는 새로운 기술을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인터넷 이용자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정보를 활발히, 자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것은 비용편익 분석에 바탕을 둔 개인적 결정이 된다. (122)

가령, 페이스북에서 한 기업이 홍보 이벤트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 페이지는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페이스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와 유사한 예는 비일비재하다. 모바일 게임에서 ‘공짜 아이템’을 얻기 위해 개인정보를 제휴업체에 제공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에 바탕한다. 하지만 그 정보들이 어떻게 관리, 통제되는지는 그 자발적인 선택 이후에 개인의 손을 떠나버리고 만다.

이런 상호 네트워킹하는 컴퓨터 환경 속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정보 제공이 초래하는 ‘감시 상태’를 ‘참여적 원형감옥’이라는 개념으로 우 교수는 설명한다.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서 소비자들은 강제적으로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감시대상이 된다는 것이다(Whitaker,1999).”(123)

(사진: Friman, CC BY)

4. 그렇다면 강력한 입법과 정부 개입이 해답인가?

대부분의 프라이버시 법은 침해가 일어나기 전에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법적 소송은 프라이버시 침해가 일어난 이후에 사후적 보상이나 정정 가능성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라이버시 회복이 가능할 것인가? 명예를 회복하듯이 프라이버시를 회복한다는 것은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즉, 입법적 방법으로 개인의 정보통제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은 제한적 상황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124 125)

국가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개인의 자유를 위해 고안한 프라이버시 이론이 다시 강력한 입법을 통한 정부 개입을 통해 개인 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런 역설을 차치하고서라도 입법을 통한 정부 개입은 명백한 한계를 예정한다. 자발적인 정보제공으로부터 비롯한 프라이버시 침해에 무력할 뿐만 아니라, 위에 인용한 것처럼 사후적인 보상과 정정 가능성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명백하다.

더불어 “네트워크 환경에서는 이미 법의 집행이 실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124). 더욱이 권위주의적 체제에서는 프라이버시 보호의 명목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 감시가 정당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 수집자와 제공자 간 권력 불평등

개인들과 정보수집자 간의 권력 불균등은 개인 간의 격차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이들 간에 존재하는 힘과 권위, 지식의 차이를 고려하면, 개인들이 자신의 개인정보 유통에 대해 협상력을 가질 만한 상황에 있기 어렵고, 자신의 개인정보에 대하여 의미 있는 선택권을 행사하기도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프라이버시를 개인의 통제권 문제로 보기보다는 정보에 대한 사회적 조정 문제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Cohen, 2000; Schwartz, 1999) (127, 128)

앞서 예시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자. 많은 기업들이 행하는 상품 홍보 이벤트에 응모자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는 과연 엄밀한 선택권을 보장받은 상황에서 제공하는 정보일까? 혹은 어떤 사이트에 가입하고자 약관에서 요구하는 가입자의 개인 정보가 해당 사이트와 제휴한 다른 기업들에 의해 공유될 수 있다는 개인이 점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런 유사한 상황에서 개인은 기업이 요구하는 정보를 ‘자발성을 띤’ 형태로 제공할 수밖에는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페이스북의 allow access 창 예시
대다수의 우리는 흔히 우리의 정보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한 뒤 잊어버린다.

우 교수는 미국에서 있었던 2003년 조사를 언급하면서 조사대상자 중 “다수는 웹사이트들이 그들의 개인정보를 다른 웹사이트나 회사와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으며, 인터넷상에서 일어나는 기본적 정보수집 활동이나 스트리밍 활동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프라이버시권

현재의 기술적․규제적 상황에서 익명성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실제 현실보다 인터넷상에서 덜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서 실제의 삶에서는 사람들은 대개 전화번호부에 등재되지 않을 권리를 가지거나 그들의 신분을 항상 밝히지 않고서도 걸어 다니거나 독서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네트워크상에서는 이용자가 자신의 신분이나 개인정보를 위장하는 선택을 하지 않고서는 익명성이 보장될 수 없다. (137)

우 교수는 프라이버시권을 개인의 자유권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프라이버시가 갖는 사회적인 가치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 정보 침해상황은 그야말로 훨씬 더 다양한 잠재적 침해자와 침해 상황 속에서 모호한 형태로 이뤄진다. 잠재적 피해자의 자발적 정보 제공 현상은 더욱 가속화하고, 잠재적 침해자는 비단 기존의 정부와 언론사 같은 거대한 기관이 아니라 다양한 군소 기업과 개인들이다. 즉, 상호 네트워크 환경에서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회적 가치로서의 프라이버시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입법과 정부기관의 개입보다는 “이용자들의 자기구제적 활동을 허용하는 것이 법적 권리로서 프라이버시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자기통제권과 자율성을 훨씬 더 많이 보장하게 될 것”이라고 우 교수는 지적한다. 다만 이런 개인의 자율성에 기반한 프라이버시 보호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인식 격차에 따라 보호 격차를 증가시킬 위험이 있다. 하지만 프라이버시에 관한 인식 정도가 낮은 사람의 프라이버시도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프라이버시에 관한 권리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국가기관과 개인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가 공동의 관심사로 끌어안고, 이를 사회적 가치로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우 교수의 지적이다. 그래서 우지숙 교수는 “프라이버시권이란 개인이 지식을 가졌는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가졌는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조정되는 방식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식별되지 않을 권리

현재의 기술환경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개인들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반면 정보사용자들과 이들의 활동들은 식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들 간의 권력관계 불균형의 가장 큰 기초가 식별가능성 여부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Gandy, 2000) (131)

우 교수는 자스키(Zarsky,2004)의 논의를 빌려 식별 가능성의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한다. 하나는 정보수집은 무제한으로 허용하되, 그 수집된 정보에 관한 투명하고 평등한 접근권을 부여하는 사회를 상정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도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접근한 정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 해결 방법만이 남는다. 잠재적으로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한 권력이 식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피해자의 ‘아이덴티티’ 역시 식별되지 않는 상태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즉, 모두가 식별 가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31) 이렇게 상호 작용하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식별되지 않을 권리’를 설정함으로써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우 교수는 지적한다.

익명성과 가명성

그렇다면 상호 작용하는 네트워크 환경에서 ‘식별되지 않을 권리’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익명성’과 ‘가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애가 있다.

많은 사이트들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네트워크 이용자는 적어도 약간의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아예 사이트가 제공하는 이익과 서비스의 사용 자체를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만 할 때가 종종 있다.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원하는 네트워크상에서 원하는 서비스나 정보의 이용을 포기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기술환경에서는 특히 어렵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우리는 네트워크상에서 개인정보가 한 번 유출되고 나면 어떤 결과가 생겨날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132)

사용자는 개인정보 유출과 악용의 잠재적인 위험을 불안하게 인식하면서도, 그 불안 때문에 해당 사이트에 가입하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당장에 누릴 수 있는 이익(사이트 이용)은 분명한 반면, 다가올 수도 있는 위험(정보 유출)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조차 상대적으로 훨씬 더 보호받는 익명성(가령 대형 서점에서 책을 읽을 권리를 떠올려보자)이 온라인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이유는 저작권 침해 가능성과 사이버 범죄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즉, 익명성이 온라인에서 유지되지 어려운 이유는 어떤 윤리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특히 재산권 침해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형사 정책적 측면이 강하다.

이런 이유로 온라인 익명성은 죄악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야 위헌 판결을 받은 ‘인터넷 실명제’는 이용자를 잠재적인 형사 범죄자로 바라보는 국가의 시선을 그대로 상징한다. 하지만 익명성은 “일반 개인들이 정부나 사기업, 또는 다른 개인들의 개인정보 사용과 축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Froomkin, 1996)”(133)

그뿐만 아니다. 익명성은 정보 교환뿐만 아니라 문화 활동의 공간인 네트워크 환경에서 이상적인 자기실현의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고, 또 소수자에게는 전략적으로 자기를 노출할 수 있는 결정권과 권한을 강화한다.  이렇게 “맥락별 아이텐티티 관리 등은 단순히 개인적 경험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치적 활동이 될 수도 있다”(Philips, 2002).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가면(익명)을 쓴다  (사진: garryknight, CC BY SA)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가면(익명)을 쓴다
(사진: garryknight, CC BY SA)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 

만일 어떤 사람이 네트워크상에서 자신이 식별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활동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해결방법은 거짓 정보를 제공하거나 가짜 아이덴티티를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신분을 이러한 방법으로 감추고, 시중에서는 인터넷상에서 개인 신분을 숨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들도 출판되었다. 다시 말해서 네트워크 이용자가 자신의 개인정보가 밝혀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권리를 갖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134)

우 교수는 논문의 결론으로 네트워크 환경에서 프라이버시권의 개념은 기존의 ‘정보통제권’이 아니라 ‘아이덴티티 프라이버시’ 개념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이덴티티 프라이버시’ 개념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거짓말할 권리’를 논의한다.

그렇다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얼마나 허용될 수 있을까?

우 교수는 우선 거짓말할 권리는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으로부터 용인될 가능성이 적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표현의 자유에 속한 권리로서 ‘익명권’이 보호될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프라이버시권으로서 익명권이 보호될 여지는 더욱 적을 것으로 예상한다.  더불어 개인이 거짓으로 자신의 정보를 제공했을 경우에 예상할 수 있는 법적, 문화적, 사회적 불이익은 너무 크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개인의 신분을 속이거나 숨김으로써 노출하지 않는 것이 네트워크상 프라이버시와 자주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때로는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라고 우 교수는 강조한다.

“이 글에서는 네트워크상에서 이용자들이 비밀과 기만의 권리를 통해 자기 해결방안을 갖는 것이 개인의 자주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네트워크 프라이버시를 보장할 수 있는 논리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 네트워크 사용자에게 식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할 권리를 부여하고, 이를 얻기 위한 활발한 탐색을 허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네트워크 프라이버시를 위한 정책적 방안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외부적 권력이나 기관에 제한을 가하는 것보다는, 개인 신분에 대해서 침묵할 수 있는 권리와 이에 대해 거짓을 말해도 되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이용자들의 익명성 탐색을 보장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137)

[거짓말의 발명](The Invention of Lying, 2009)은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의 끔직함을 코믹하게 묘사한 영화다.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에 과연 프라이버시라는 게 존재할까?
그야말로 기존의 관념에서 보면 파격적인 결론이다. 우 교수 본인도 이런 파격에 관해서는 “네트워크상에서 능동적인 이용자의 권리로서 거짓말할 권리를 제공하자는 것은 거의 설득력이 없는 시도로 간주될지도 모른다”(138)고 인정한다.

하지만 “상호작용적 네트워크에서 익명성은 개인이 강력한 침해자와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항하여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면서, “미래에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인간적 함의를 갖는 프라이버시와 자주성의 보다 진전된 이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지숙 교수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우리는 프라이버시라는 권리를 위해서 이러한 종류의 식별되지 않을 권리, 불투명할 권리, 나아가 거짓말을 할 권리를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의지가 있는가? (….중략….) 네트워크상 프라이버시를 위해 투명성과 관료적 효율성을 희생할 의지가 있는가?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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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제권에서 식별할 수 없는 권리로: 네트워크 프라이버시의 새로운 개념화를 위한 연구](우지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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