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칼럼] . ‘신속’, ‘정확’, ‘맛’ 중에서 우선 순위를 꼽으라면 나는 정확을 꼽고 싶다. (김동훈/민언련 정책위원·한겨레신문 전국부장) (⏳2분)
뉴스 보도와 짜장면 배달은 닮았다. 배달은 ‘신속’해야 한다. 배는 고픈데 배달이 늦으면 다시는 그 집에 음식을 주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배달은 또 ‘정확’해야 한다.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짜장면을 시켰는데 짬뽕이 오면 “헐~ ”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짜장면은 또 ‘맛’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이 된 짜장면이라도 맛이 없다면 낭패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뉴스 생산자인 언론 매체가 뉴스 소비자인 일반 국민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뉴스를 전달해야 한다. 뉴스의 신속성이 결여돼 이미 다 알고 있는 뉴스를 전달한다면 이미 뉴스가 아니다. 또 정확한 뉴스도 언론의 생명이다. 악의적 오보는 말할 것도 없고 선의의 오보도 주의해야 한다. ‘신속’과 ‘정확’은 반비례다. 팩트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 보면 뉴스배달이 지체된다. 그렇다고 너무 늦게 배달하면 아무리 정확한 뉴스라도 이미 뉴스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신속’, ‘정확’과 함께 뉴스는 ‘맛’이 있어야 한다. 즉, 뉴스가 독자들의 눈에, 시청자들의 귀에 쏙쏙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몇 번을 읽어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기사나 몇 번을 들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뉴스는 맛없는 짜장면과 같다. ‘신속’, ‘정확’, ‘맛’ 중에서 우선 순위를 꼽으라면 나는 정확을 꼽고 싶다. 확인되지 않은 뉴스는 차라리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뉴스의 ‘맛’을 내려고 ‘초’를 쳐서도 곤란하다. ‘초’란 기사를 과장하거나 가공하는 것을 말하는 기자들 사이의 은어다. ‘맛’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과장하거나 가공하지 않은 정확한 뉴스여야 한다.
속보 경쟁이 오보 참사를 낳는다
2012년 12월 14일 오전 9시 40분, 미국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어린이 20명을 포함해 28명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언론은 재빠르게 보도했다. 그날 오후 2시 CNN이 가장 먼저 이렇게 보도했다. “용의자는 20대 라이언 랜자로 보인다.” 경쟁사들은 라이언 랜자가 용의자인지 아닌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라이언 랜자의 페이스북 등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시간 뒤 AP 통신은 “라이언 랜자의 신원이 확인됐다”고 한술 더 떴다.
오보는 오보를 낳는다. 뉴욕타임스는 “라이언 랜자의 어머니가 그 학교 교사로 학교에서 라이언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했다. 그사이 라이언 랜자의 페이스북 사진과 글이 여러 매체에 보도됐다. 모조리 오보였다. 실제 범인은 그의 동생 애덤 랜자였다. 어머니는 그 학교 교사도 아니었다. 애덤의 총에 맞아 살해된 장소도 학교가 아니라 그의 집이었다.

CNN과 폭스뉴스는 앙숙이다. CNN은 리버럴한 친민주당계 언론이다. 반면 폭스뉴스는 매우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다. 공화당과 가깝고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언론매체다. 2012년 의료제도 개혁 법안 오보는 두 매체가 경쟁적으로 빨리 뉴스를 내보내려다 빚은 오보 참사였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원전 5세기에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은 이런 오보에 경종을 울리는 글귀다. 지금으로 치면 전쟁을 직접 보고 겪은 종군기자가 쓴 글이다. 2,500년 전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나는 내가 직접 목격한 사건을 기록했다. 간접적으로 목격자에게서 들은 얘기들은 최대한 철저한 확인을 거쳐 기록에 포함했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쉽게 발견되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목격자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진술을 내놨다. 이들은 어느 한쪽이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편들기도 했고, 때로는 불완전한 기억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오보의 씨앗은 정파적 보도
우리는 부정확한 보도의 홍수 속에 산다. 언제부턴가 언론사마다 ‘팩트체크’ 코너가 운영된다. 모든 뉴스는 팩트체크를 거친 뒤 독자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따로 또 팩트체크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부정확한 보도의 원인 중 하나가 언론의 정파성이다.
보수 매체들은 시청 앞에 모인 극우단체의 숫자를 부풀리고 싶었던지 말도 안되는 숫자가 나온다. 3.1절 극우단체 집회 때 경찰 비공식 추산으로는 두 집회에 최대 12만명(광화문 6만5천명, 여의도 5만5천명)이었다. 그런데 주최측은 각각 500만명과 30만명이라고 주장했고, 일부 매체는 이를 그대로 받아 썼다. 우리나라 인구의 10분의 1이 모였다는 비현실적 숫자인데도 그냥 쓴다.
2022년 개봉한 영화 ‘쉬 세드’ (SHE SAID)는 할리우드의 권력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추악한 성추문을 폭로한 뉴욕타임즈 두 여성 기자의 활약상을 그렸다. 증언을 주저하는 피해자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며 팩트에 팩트를 확인한다. 한 피해자는 용기를 내어 증언하겠다고 했다가 기자가 찾아가자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입을 닫는다. 두 기자는 좌절할 만도 하지만 놀랍도록 침착하게 대처하며 끝내 와인스타인의 악마 같은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두 기자의 활약은 전 세계 미투운동을 촉발했다.

기자 출신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2001년 출간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 10가지를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정확한 보도의 핵심을 짚은 말이 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민언련 칼럼
민언련 칼럼은 시민사회·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글입니다.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뇌가 스트레스 덜받는걸 선택한다는 핑계로 길게 읽지 않으며
알면 하면 되는데 안해도 인간취급은 된다는 최저인간제를 추구하거나 유도하는 가상환경에,
따봉과 속도로 경쟁붙이고 그걸로 돈버는 망할 포털과 대형 매체환경 때문에
더더욱 자극성만 띄고 중고사기마냥 슈레딩거캣마냥 내용물은 증발하고 있습니다.
왜 길들이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그놈의 자본쿠션을 끼든 말든 영향력과 권력때문인걸
민주제 흔드는김에 전부다 흔드는 모양입니다.
국가 구성원이 자본이나 권력편향, 직업 선택의 격차에 자유로워지고
교육으로 수용자 모두가 뉴스를 비판적으로 보고 개인의 평가가 모여서 공개될 때
그제서야 변화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삶의 대부분을 자본에 묶어버려서 요원하죠
아마 안될거라 믿습니다. 이 글에 반발해서라도 하길바래요
그나저나 이 댓글처럼 쉬셋은 어색하네요 그쪽이 본론인거같기도 하고요
‘오보의 씨앗은 정파적보도’ 소제목 아래 미투라니… 굳이 티안내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 문제있다 싶으면 평등 주장하면 꼼짝못하니 적당히 균형잡으시죠 이젠..
하도 강조를 해대서 이젠 평등을 넘어가서 거꾸로 차별을 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더러 거꾸로 당해봐라 심보인지 자식 삶 대신 살아주려는 오지랖인지
이제는 특정 구분에 대해 선입견없는 자식들한테까지 영향을 주려는지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몰상식한 교육의 결과를 지금 젊은세대에서 보고있다 생각하고요
이것도 매체가 만든건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시위추산 하신것처럼 그 근거를 직접추산도아니고
다른걸로 추산하고 추산구분도 불명확해서 근거가 빈약한데도
의도를 드러내고 매체 영향력으로 밀어내는게
수 십년간 버튼누르면 나이성별 규정해서 성급하게 결론짓고 싸잡아 비난해버리던
그 기성언론 못된짓거리 똑같이 따라하고 있기도 합니다.
채널과 언론 이쪽저쪽 똑같은짓 하고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평등을 외치며 비판했던 부류의 그 지독한 차별혐오 습성도 똑같이 하고있고요
선천적 차이를 가지고 차별하는 것 중에 인종차별도 있죠
나이성별가지고 규정하고 비교하는것도 다를바 없습니다
그 더럽다는거 아는 세대만 투닥거리다 가져갑시다
진심 내자식 남자식은 그런 구분없이 평등하길 바란다면요
이는 반대하는게 아니며 사회가 이미 균형을 어느정도 잡았다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지금은 사회 구성원에 따라서 더 근본적이고 생존에 달린
격차문제들에 집중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그 문제에 집중해준 구성원들을 위해서요
그 큰 격차부터 해소하면 다시 돌아와 외쳐도 영향력 챙길 수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