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에너지의 왕모 상무가 대한항공 승무원에게 라면이 맛없다며 여러 번 다시 끓여오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잡지로 얼굴을 때리는 ‘진상’ 짓을 했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며 국민의 공분을 산 그는 회사로부터 보직해임 처분을 받고 난 후 결국 사표를 냈다.

왕모 상무를 비난하는 교양인…?

상사는 하늘 같이 떠받들고, 부하직원은 노비처럼 부리는 굴지의 대기업 임원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고, 그런 분들이 항공사 승무원을 하대하는 일도 종종 있는 일일 테다. 그런데 이번처럼 사회적 파장이 컸던 적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주취 난동 사건 이후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소문이 빠르게 확산하는 SNS 시대의 단면이리라.

그런데 이번에 인터넷 속 반응을 보면서 왕 상무를 비난하는 대부분이 자기들은 비행기 승무원을 그렇게 우습게 아는 사람이 아닌 ‘교양인’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진상 고객’은 자기밖에 모르는 대기업 고위 임원들뿐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기내 난동은 일반 서비스업종의 ‘진상고객’ 문제와 달리 같이 탄 승객들의 안전까지 심각하게 위협하는 중대한 사안인데도,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해 국회 건설교통위 이낙연 의원(민주당)이 건설교통부 통계를 토대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항공ㆍ아시아나항공 등 국적 항공기에서 발생한 기내난동 건수는 80건으로 전년(64건)보다 25% 증가했다. 난동 유형은 ‘흡연ㆍ휴대폰 사용제지 불응 등 승무원 업무방해’가 가장 많았고 ‘음주’ ‘폭언ㆍ고성방가 등 소란’이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음주 기내 난동은 꼭 우리나라 승객만 한정된 일도 아니다. 다른 나라 승객도 술 취하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기내 난동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 승무원에 대한 인식이다.

아시아나항공 비행 승무원은 왜 바지를 입지 못했나 

비행기 승무원은 여러 가지 일을 한다. 기내에서 승객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고, 고객의 불편을 접수해 해결해 주어야 하며, 지상과 떨어져 있는 곳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응급 환자라든지 여러 긴급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여기에 끼니마다 밥도 주고 음료도 주고 담요도 주고 면세 물품도 팔아야 한다.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육체적 힘도 많이 쓰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들은 이런 승무원들을 거의 전원 여성으로 고용하고, 몸에 붙는 불편한 치마를 입힌다.

25년 바지 착용 불허했던 아시아나 뚝심?

그나마 대한항공은 2005년 새 디자인 유니폼을 선보이면서 여승무원들에게도 바지 복장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일부 여승무원들은 바지를 입고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은 25년 동안 한 번도 바지 복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치마 강제뿐 아니라 쪽진 머리, 안경 착용 금지는 물론 각종 액세서리 제한 규정도 ‘안전’이나 ‘단정함’ 수준을 벗어나는 규정이 많았다.

노조에서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까지 내려진 후인 올해 3월에야 바지 복장을 허용했다. 당시 아시아나항공은 “승무원의 용모, 복장은 서비스 품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이자 고객 만족을 위한 기본적인 서비스 제공의 일부”라며 ‘승무원 외모가 곧 서비스’라는 저열한 성 평등 의식을 드러냈다. 외모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서 능력 이외의 조건에 대해 채용 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선진국에 비추어 보면 극히 부끄러운 인식 수준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인식은 항공사만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인권위가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에게 바지 복장 착용을 허용하라고 권고했다는 기사를 보면 “다 알고 들어가서 뭐 불만이 많냐” “원래 승무원은 치마를 입는 게 보기에 좋다”는 등의 댓글이 상당수 달려 있다.

승무원 바지착용 허용하라는 인권위 권고를 소개한 기사에 달린 댓글
비행승무원에 관한 인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댓글들

댓글이 157개나 달린 기사의 이른바 ‘베플’(베스트 댓글)들이 이렇다. 승무원의 역할이 고객의 안전 확보와 편안한 비행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예쁘게 보임으로써 내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러니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들의 승무원들에 대한 인식 수준이 인권위원회의 지적을 받을 정도로 낮은 것이다. 더 나아가 비즈니스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승무원을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대기업 임원이 있는 것도 비행 승무원에 대한 일반의 이러한 인식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사 임원의 커피 취향까지 알아야 하는 비행 승무원들

항공업계를 출입하면서 들었던 국적 항공사들의 승무원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복장 차별을 넘어선다.

한 저비용항공사가 경력 승무원을 모집했는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같은 굴지의 항공사 승무원들이 대거 지원해 그 회사에서도 깜짝 놀랐다. 그 회사에 ‘공채 신입’으로 입사한 승무원들은 대부분 이들 대형 항공사 승무원 시험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렇게 많은 승무원들이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저비용항공사로 이직한 연유를 궁금해했다.

회사 측에서는 전체적으로 회사의 사기가 올라갔다고 보고 고무되어, 임원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경력 승무원들을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거기서 들은 대형 항공사들의 여승무원에 대한 인식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대형 항공사 A사에서 이직한 승무원 B씨는 당시 환영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곳은 저희 승무원을 사람 취급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면 버릇이 나빠진대요. 특히 임원분들은 더하지요. 그 항공사의 임원이 출장이나 휴양 등 목적으로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면 2주일 전부터 승무원실에 연락이 와요. 그러면 외모 등을 감안해 담당 승무원이 결정되고, 2주일 동안 해당 임원의 취향과 기호를 여기저기 물어보면서 조사합니다. 이를 통해 완벽한 서비스를 하는 거예요. 이 담당 승무원은 다른 승객은 제외하고 이 임원 한 사람만 모시게 됩니다.”

B씨는 그 자리에 있던 누가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A사에 있을 때 A사의 C상무가 출장을 가며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 정해지자, 승무원실은 미모의 B씨를 담당 승무원으로 정했다. B씨는 C상무의 취향을 꼼꼼히 조사하며, 커피는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와인은 무엇을 선호하는지까지 다 섭렵해 완벽히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C상무님이 출장을 가는 당일 아침, 담당 승무원이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아느냐,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 일이 어디 있냐’고 항의했더니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C상무가 글래머를 좋아한대.’ 기가 막혔죠. A사에서 승무원은 그런 대접을 받아요. 임원님들은 쳐다볼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임원님들이 이렇게 환영회도 열어주시고 저희한테 밥도 사주시잖아요. 정말 이제야 사람 대접을 받는 것 같아요.”

자기 회사 승무원을 대하는 자세가 이 모양 이 꼴인 국적기 항공사들이, 포스코의 왕 상무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외국 비행기를 타면 예쁜 승무원이 없는 이유? 

외국 국적기는 어떠한가. 사실 우리나라처럼 승무원들이 ‘단아하고 다소곳하게’ 고객을 응대하는 경우는 일부 동아시아 국가를 제외하면 많지 않다.

내년이면 40세가 되는 나는 여태까지 딱 한 번 항공기 일등석(‘아메리칸 에어’)을 탄 적있다. 나를 초대한 분이 항공/여행업계 관계자여서 ‘아메리칸 에어'(AA) 측과 협의해 비즈니스 등급을 퍼스트 등급으로 추가 비용 없이 높여주었다.

승무원들은 모두 6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남녀 노인들이었고 대부분 바지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유니폼은 우리나라처럼 미적 감각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디자인이 아니라 활동성과 기능성을 가장 크게 고려한 디자인이었다. 고객들이 불편사항을 말하면 친절하게 들어주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승객은 왕, 승무원은 하인’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어 보였다.

어메리칸 에어라인의 승무원복. 바지와 치마 중 편한대로 선택할 수 있다. 출처: 트래블데일리뉴스
어메리칸 에어라인의 승무원복. 바지와 치마 중 편한대로 선택할 수 있다.
(출처: 트래블데일리뉴스)
항공사의 승무원들 (출처: 콘티넨탈 에어라인스)
바지 입은 외국 항공사 승무원들
(출처: 옛 콘티넨탈 에어라인스, 2012년 유나이티드 에어와 합병)

‘아메리칸 에어’에서 내린 후 나는 우리나라 국적기를 탈 때마다 느꼈던 묘한 불편함-이것은 대형마트나 백화점 직원들이 ‘고객님’에게 90도로 깍듯이 절하며 손님이 가진 물건 하나하나에까지 과잉 높임말을 쓰거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직원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불편함이다- 대신 승무원과 내가 동등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비행했다는 데서 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함께 갔던 남자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후 “어떻게 승무원들이 다 늙었냐” “비행기 타는 최대 즐거움이 없다”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일등석으로 바꿔 주신 분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항공사는 승무원 채용에 있어 남녀 성차별이나 복장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젊은 승무원들은 아이 등 가족과 너무 오래 떨어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 나이 든 직원들을 동아시아 노선 같은 장거리 노선에 배치한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60~70년대에는 이런 포스터를 내걸 정도로 ‘여승무원=비행기의 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1968)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1968)
사우스웨스트항공 (1971)

최근 우리나라 걸그룹 ‘소녀시대’가 해당 이미지를 차용해 논란이 되기도 했던 이 사진은 그러나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미국 항공사는 지금 이런 식으로 홍보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홍보하면 당장 항의가 쇄도할 것이다.

최근 들어 감정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진상 고객에 대한 비판 같은 글들을 SNS나 포털사이트 등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예전에 비하면 서비스업종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행승무원를 바라보는 일부 인식은 여전히 ‘비행기의 꽃 노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상전 의식’은 아직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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