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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내 한 기업의 사장 비서다. 대표이사를 보좌하다 보면 유명인사를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 전에는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국민 엄마’로 불리는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과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 트라야 할로넨(임기: 2000년~2012년). 사진은 2006년 무소속으로 출마할 당시의 선거 포스터에 키스하는 여성의 모습.  (사진:  Helen Penjam, CC BY) https://flic.kr/p/8FAYf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임기: 2000년~2012년). 사진은 2006년 무소속으로 출마할 당시의 선거 포스터에 키스하는 여성의 모습. (사진: Helen Penjam, CC BY)

핀란드 ‘국민 엄마’와의 만남

사장이 앉은 테이블에는 총 8명이 배석했다. 할로넨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정계인사와 대사, 국내 굴지의 기업 회장도 두엇 있었다. 나는 사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테이블에서 가장 젊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의 비서이거나 통역인가보다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기 전에 서로 환담을 나누며 명함을 교환했다. 나는 잠시 명함집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비서로 일하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나름의 프로토콜을 정했다. 대외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행동할 것, 구체적인 행동 강령 중에 하나가 먼저 명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래 인간관계에 있어 적극적인 사람이 아닌 탓도 있고, 너무 나서는 것처럼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주체가 되어 사람을 만날 때는 예외다.

하지만 대표이사를 동행하는 자리에서는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명함을 주고받기는 해도 사장이 상대와 명함을 주고 받을 때는 옆에 말없이 서있는 게 보통이다.

Jodi Womack, CC BY https://flic.kr/p/aLfDQB
비서로서 참석하는 자리에선 명함을 교환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사진: Jodi Womack, CC BY)

한국에서 명함은 ‘존재의 증거’ 

지금은 친구가 된 한 미국 회사의 CEO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서는 명함을 주고받기 전까지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 저녁,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서 있었을 때 할로넨이 나를 존재의 땅으로 이끌어 주었다.

“Dear, 당신에게 내 명함을 드리지 않은 것 같군요.”

할로넨은 테이블 맞은 편에 있는 내게 먼저 명함을 건네왔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내 명함을 건냈다. 할로넨이 내게 명함을 건네자 테이블에 있던 나머지 분들도 일제히 명함을 꺼내 비로소 나와 인사했다.

거기 있던 분들이 특별히 권위적이라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냥 우리 문화가 그렇다. 어리고 직급이 낮은 사람이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오르거나 유지하는 이들 대부분은 보통사람보다 겸손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있다. 상속이 아닌 노력으로 이룬 경우에 그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Iryna Ovchynnikova, Business card, CC BY https://flic.kr/p/83QMi5
명함이 뭐길래? (사진: Iryna Ovchynnikova, “Business card”, CC BY)

교훈 하나: 배려 존중 평등 

항상 가장 약하거나 어려 보이는 사람을 배려하자. 특히나 내가 주목 받는 자리에 있을 때.

밥을 먹는데 개인별로 간장이 작은 플라스틱 포장에 담겨 나왔다. 할로넨은 포장을 뜯지 못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도와 포장을 열어 주었다. 누군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He is a gentleman.” (신사군요.)

할로넨의 답이 재밌다.

“He is a gentle person.” (친절한 분이네요.)

여성도 젠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외국(유럽)에서 공부할 때 의장을 ‘chairman’이 아닌 ‘chairperson’으로 표기했던 게 기억난다.

많은 사람들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양성평등을 언급하며 이런 저런 제도를 들여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도는 언제나 그 나라의 철학과 가치관의 발현이다. 핀란드의회에 여성 국회의원이 전체 의원의 절반인 것은 단순히 제도가 아닌 성에 대한 평등한 가치관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Flazingo Photos, CC BY SA https://flic.kr/p/nt8bww
Flazingo Photos, CC BY SA

교훈 둘: 내가 되고 싶은 나 

가만히 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혹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기로 했다. 부작용으로 ‘어느 별에서 오셨어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할로넨이 했던 말 줄에 몇 가지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여성들에게 특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주체적인 사람이 되라. 남성이든 여성이든 서로에게 동등한 삶의 동반자, 좋은 삶의 파트너(A good life partner)가 되어야 한다. 말이 통하고 함께 토론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같이 일하는 남자 동료들에게 물으니 남자만 바라보며 집안일만 하는 여성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싶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편 핀란드에서는 남자들이 이혼 당하지 않기 위해 요리를 한다. 성 역할에 대해 사회가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이 있다. 남자다운 또는 여자다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라. 고정관념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ParisSharing, Working woman - Paris , CC BY https://flic.kr/p/bFvuLz
ParisSharing, “Working woman – Paris”,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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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이혼당하지 않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한 남성으로서 성역할과 개인의 자존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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