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오전 8시]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박사와 나누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정책은 정부나 국회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 2023. 7. 슬로우뉴스.
“(정책) 아이디어는 공론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잖아요.”
머리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듣고 보면 너무 상식적이고, 너무 당연한 이야기. 그런데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책은 당연히 국회의원이 만들고, 정부가 만들고, 전문가가 만드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박사나 변호사나 교수 정도는 되어야,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 1, 2등 정도는 되어야 ‘정책 아이디어’라도 낼 수 있는 ‘수준’과 ‘자격’이 될 거로 여겼습니다.
얼마 전 저는 말했습니다. 존재는 의식을 지배한다고. 노예는 노예로 사고하고, 주인은 주인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에게는 권력이 공기처럼 당연하지만, 노예는 복종과 예속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합니다. 그런 노예근성이 여전히 나 자신의 내면에 깊이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니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각성했으니 다행입니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그 절대적 권력자가 정책을 만드는 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하고, 불만을 드러내며, 화내고 외치면, 그걸 경청하고 숙고해서 정치는 국민의 ‘민의’를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 함께 가다듬을 뿐입니다. 그 당연한 일, 지금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전복된 권력과 배반당한 민의에 관해 이상헌 박사와 이야기했습니다.
이 글은 제네바 시각 기준 2023년 7월 21일 오전 8시에서 9시까지 화상으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네바 오전 8시
5. 정책은 국회나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민노씨가 묻고 이상헌이 답하다
우리 삶에서 타인으로 규정하는 범위가 예전보다는 훨씬 넓어졌어요. 아까 말씀드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라는 건 정확하게 표현하면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인데 사회 계층화 문제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런 각도에서 보면 타인에 관한 예의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그 타인의 범위가 더 넓어진 거죠.
내 이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 점점 더 타인이 되는 거예요. 타자화되는 거고요. 노동자 그룹 내부에서도, 기업 안에서도, 중산층에서도, 진보 그룹 안에서도 모두 계층화하다보니까… 결국은 타자화하죠. 말과 행위 간 격차도 그만큼 커지는 거고요. 평소엔 좋은 말을 하지만, 익명 공간으로 가고, 상대가 나와 관계없는 타인이면, 특히 ‘자신의 경계’를 건드리게 되면 더 공격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이상헌,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시선이 부족하다’ 중에서
아이디어, 정책, 실행… 완전히 다른 영역
민노: 박사님 말씀을 듣고나니, 문재인 정부 초기 때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이슈에서 취준생 등 청년들이 엄청나게 반발했던 게 떠오르네요.

이상헌: 돌이켜 보면 아쉬운 점이 있죠. 문 정부의 의도는 참 좋았는데, 약간 급하게 하기도 했고요. 뭔가 하긴 해야 했으니까… 그걸 조금 잘 조절했어야 했는데, 정책 쓰는 사람들이 복잡한 현실 상황에 관해 잘 모르고 그러다보니 마음이 앞서고, 약간 관념화된 정책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거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얼핏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현실의 격차가 더 커요.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지금.
민노: 어려운 질문일 수 있는데요. 만약에 다시 돌아가신다면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넌지시 조언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 ‘이건 좀 이렇게 해봐라’ 하고 조언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이상헌: 모르겠어요. 일반론적인 얘기만 할 수 있을 듯하네요. 당시 정책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취지로 했다는 걸 잘 알지만…
-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
- 그 아이디어를 정책으로 만드는 것.
- 그 정책을 실제 현실에 적용하는 것.
이 세 개는 서로 다른 영역이에요. 물론 세 개가 다 필요한데 첫 번째 걸 잘했다고 해서 두 번째, 세 번째가 잘 된다는 보장도 없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두 번째, 세 번째 영역은 좀 아쉬운 면이 많죠.
민노: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이상헌: 제가 노동정책, 고용정책을 연구하다 보면, 항상 이 세 가지를 따지거든요. 1) 어떤 걸 해야겠다고 한다면, 2) 그걸 가능하게 할 정책 방안이 있을 테고, 3) 그런 구체적인 정책 방안이 있다고 해도 나라마다 상황도 다르고 현실도 다르니까요. 좋은 의도, 좋은 아이디어만으로 좋은 정책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정책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정책만으로 그 정책을 현실에서 잘 집행할 수 있는 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물론 다른 정치사회적 제약도 있긴 하지만요.
민노: 정말 그렇겠네요.
‘좋은 의도’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상헌: 특히 정책 만드는 사람은요. 의도가 좋았으니 그것으로 잘했다고 우기면 안 돼요. 취지가 좋았어도 정책 집행과 관련해서 잘 되지 못했다면, 그냥 잘 못한 거예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좋은 아이디어나 의도, 취지 같은 걸 내세우는 건 정책하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불문율인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민노: 약간 도식화하면요. 아이디어는 주로 학자의 몫인가요? 이상헌 박사와 같은 분께서 해야 할?
이상헌: 아니요. 아이디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전문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거대한 착각이에요. 연구하고 정책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 아이디어를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만드는 거예요. 아이디어는 사회적 공론장에서 만들어야 하는 거죠.

민노: 아!
이상헌: 그런데 가끔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면요. 아이디어를 전문가들이 만들어요.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이걸 해요. 그리고 정책화를 관료에게 맡겨요. 그리고 그 집행과 실행을 지자체에 맡긴다고 생각해 봐요. 제 생각엔 그렇게 하면 당연히 안 되요.
민노: 그러면 바람직한 과정을 하나만 예시해 주시죠.
이상헌: 가령 산업재해나 노동시간의 문제,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문제에 관해 공론장에서 이야기하겠죠. 제 생각에는 어떤 계층에는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조금 소득 보조를 해줘야 한다든지 하는 의견이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A라는 의견이 다른 B, C, D보다 공감이 크다고 치면요. 그 A라는 의견, 아이디어가 첫 번째죠. 그다음에 정책을 마련하고 것, 즉 돈 받고 일하는, 가령 국책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로 정책 틀 내에서 주어진 법적 테두리 안에서 어떤 걸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고요.
민노: 테두리를 벗어나는 아이디어라면요?
이상헌: 법 개정이 필요하면 법 개정도 해야 하고, 그런 구체적인 걸 고민하는 게 전문가 역할인데 마치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사회적 방향을 제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본인들 이해관계도 얽혀 있기 때문에…
민노: 정책 실행의 세 영역, 세 단계… 큰 통찰이 담긴 말씀이네요.
이상헌: 사실 정책하는 사람 대부분은 다 알고는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안 해서 문제죠.
“정책은 정부나 국회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민노: 생각해보면, 정말 전문가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계속 의제 설정, 아이디어 만들기 역할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상헌: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물론 아이디어를 줄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사회적 공론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거고요. 그렇지 않다면, 왜 사회적 공론이 필요하고, 논의가 필요하고 그러겠어요.
민노: 말씀하신 내용을 좀 거칠게 편의상 분류하면요. 의제나 아이디어 생산을 공론장에서 시민(국민)이 하고, 정책화를 전문가, 학자, 이상헌 박사 같은 분들이 하고, 그 정책을 실현하고, 현실화하는 걸 정치가 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요?
이상헌: 아니 세 번째, 정책 적용과 실현은 그야말로 국가 조직, 관료, 정책 조직들이 하는 거죠. 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재원을 조달할 건지, 어떤 행정 기제를 통해서 이 정책을 집행할 건지, 이런 걸 고민해야죠. 집행 과정에서 중요한 건 국민이 그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민노: 거버넌스 같은 건가요?
이상헌: 그런 게 필요하죠. 집행 과정에 관한 사회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해요.
민노: 궁금한 게 여기에서 정치나 정당의 역할은 몇 번인가요?
이상헌: 첫 번째 공론장을 유지하고, 그 의견을 받아서 정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잖아요. 정책을 막 만드는 게 아니에요. 정책은 정부나 국회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민노: 말씀을 들어보면, 정치는 주도하는 게 아니라 ‘조력’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권력과 지식의 담합… 전문가 의제 설정을 정치가 부추기다
이상헌: 그렇죠. 물론 지금 하는 이야기는 다소 이론적이긴 하죠. 하지만 정말 문제는 현실에서 이른바 전문가 집단이 어떤 의제를 설정하고, 정치가 그걸 부추겨요.
민노: 아…
이상헌: 본인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서 전문가 집단을 이용하는 거죠. 정책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 왜곡되다 보니 사회적인 공론장의 역할이나 사회적 합의의 기능이나 위상이 축소된 측면이 있죠.
민노: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 정책의 영역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권력의 관계들이 정지되어 있는 경우에만 지식이 존재할 수 있다거나, 지식은 권력의 금지 명령이나 요청, 이해관계를 떠나서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전통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권력이 광인을 만든다거나 거꾸로 권력을 버리는 것이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여러 조건의 하나라는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권력은 어떠한 지식을 창출한다는(단순히 지식은 권력에 봉사하기 때문에 지식에 혜택을 주는 것이건 또는 지식은 유익하기 때문에 그것을 응용하려는 것이라는 그 이유 뿐만 아니라) 점이며, 권력과 지식은 상호 직접 관여한다는 점이고, 또한 어떤 지식의 영역과는 상관관계가 조성되지 않으면 권력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계를 상정하거나 구성하지 않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관계들은 권력의 제도와 관련해서는 자유로울 수도 있고,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사람의 인식 주체를 바탕으로 하여 분석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고려해 두어야 할 것은 인식하는 주체, 인식되어야 할 대상, 인식의 양태는 모두가 권력-지식의 기본적인 관계와 그것들의 역사적 변화의 결과들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권력에 유익한 지식이든 볼복종하는 지식이든 간에 하나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권력-지식의 상관관계이고, 그것을 가로지르고, 그것이 조성되고, 본래의 인식형태와 가능한 인식영역을 규정하는 그 과정의 싸움이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오생근 옮김, 나남출판: 2003. p. 59.,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Gallimard: 1975.

이상헌: 그렇죠. 지금 우리가 한 이야기는 좀 더 발전시켜서 생각해 보긴 해야겠네요. 말씀하신 권력과 지식의 담합 관계는 고전적인 기제와 최근의 기제가 좀 달라진 것 같기는 해요. 이건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해 보시죠. 그런데 오늘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서… (웃음)
민노: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