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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1억 원 4인 가정 외벌이가 최저임금 1인 가정보다 딱히 경제 사정이 낫지 않다는 글을 접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상당히 많이 공유된 글이다. 연봉 1억 원이면 월급으로 보면 세후 600만 원 정도인데, 4인 가정이 나눠 쓰면 1인당 150만 원꼴이라는 계산이다. 여기에 미성년자 자녀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크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1인 가정 역시 캥거루 가정(?)이 아닌 이상, 생활비 중 상당 부분이 보증금이나 월세 부담이라는 점은 은근슬쩍 무시한 것 같긴 하지만, 해당 글은 ‘현상’을 진단하는 글로는 나름으로 통찰이 담긴 글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공감해 공유한 것 같다.

해당 글은 별론으로, 해당 글에 관한 댓글에도 눈길이 갔다. 댓글 중에는 정상가정을 적폐 취급한다느니, 세금만 뜯어간다느니 하면서 ‘피해자 되기’ 정서가 표출된 모습이 보였다.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1. 피해자 정서, 거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첫 번째. 한국의 ‘피해자 되기’ 정서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집값 문제, 서울 중심 문제, 사교육 문제 같은 사회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연봉 1억 원 고소득자가 자신을 사회 제도의 피해자로 포장하지는 말아야지 않을까 싶다. 저출산 문제도 심각하겠다, 다자녀 가정에 대한 세제 혜택을 더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적폐 취급을 받는다느니 하는 피해자 정서는 너무한 거 아닌가.

영화 [신세계] (2013, 박훈정) 중에서. 대사 합성은 패러디.

2. 쓸 거 다 쓴 다음 여유가 없다?


두 번째. 한국은 경제적으로 그 어떤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인데, 왜 삶은 더 팍팍해지는가. 심지어 IMF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식의 주장도 적잖이 퍼지는가… 개인적으로는 이에 관해선, 제윤경 전 의원의 진단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쓴다”는 거.

이게 한국이 OECD 선진국 대비 유난히 돈을 더 쓴다든지 과소비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아니다. 심리적인 부분을 얘기하는 거다. 중산층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 심지어 저소득층만큼 힘들다는 이상한 인지부조화를 품게 하는 이유인 거지.

사실 집을 소유하고, 큰 부담 없이 외식하며, 문화생활하고, 각종 사교육에 돈 쓰는 거, 이렇게 다양하게 소비할 수 있는 여력 자체가 사실 곧 여유다. 그렇게 쓸 거 다 쓰고 남는 저축액이 적다고 해서 ‘여유가 없다’고 표현하는 건 좀 이상하다.

‘영끌’해서 자가(自家) 구입하고 이자에 허덕인다든지, 사교육에 백몇만 원씩 쓰면서 ‘씀씀이에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게… 자가를 소유하고, 자녀 사교육이 필수적인 코스처럼 돼 버린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가 안 되는 표현까진 아니나, 사실 객관적으로는 좀 이상한 표현이란 거다. 그냥 많이 쓰니까 여유가 없는 거지, 한국이 더 못살게 됐다든지, 고소득층도 저소득층과 ‘똑같이’ 여유가 없다든지, 그런 게 아니란 거다.

영끌 걱정은 재벌 걱정, 연예인 걱정처럼 세상 쓸데 없는 걱정이다. 대기업에라도 다니고 부모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영끌 대출’도 받을 수 있다. 영끌 대출 힘들면 상환해서 전세 살아도 된다. 사회가 걱정할 2030은 따로 있고, 힘든 4050도 많다.

3. 소위 ‘정상가족’, 무슨 사회적 취약계층인 줄?


세 번째. 육아는 원래 경제적으로 유리한 선택이 아니다. 당연하다. 자녀는 최소한 이십몇 년, 소득은 거의 없고 소비는 매우 큰데, 만일 저 1억 원 고소득 연봉자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당연히 훨씬 여유 있게 살았을 거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게 주는 행복은 매우 큰 것이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적 여유를 포기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며 아이를 낳는다.

소위 ‘정상가정’(이성애자 부모+자녀로 구성된 핵가족 형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이자 그들이 인식하는 정상적인 가족에 관한 표현, 편집자)이 경제적으로 덜 여유 있다고 해서 이게 뭔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고, 모순인 양 여기는 건 황당한 얘기 아닌가. 육아 지원이나 세제 혜택 등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물론 온당하지만, 저 댓글에서들 하던 얘기가 그 수준은 아니었다.

픽사베이

4. 새로운 ‘가족의 탄생’ 생각할 때


네 번째. 사실은, 과거 사람들이 ‘그럼에도’ 소위 ‘정상가정’을 꾸려왔던 건 정상가정이 주는 행복감보다는 정상가정을 꾸려야만 한다는 사회적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괜히 그걸 ‘정상가정’이라고들 불렀겠는가. 한부모 가족, 기러기 아빠, 무자녀 가족, 입양가족, 조손가족, 동거가족, 동성결혼 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비정상가정 취급했으니 정상가정이었지. 페미니즘과 비혼주의가 대두하며 그런 사회적 압력이 약화한 지금, 새로운 가족상과 유인을 고민할 시점인 건 분명해 보인다.

가족은 무엇으로 어떻게 태어나는가. ‘정상가족’이라는 기준을 정하면 나머지 가족 형태는 모두 ‘비정상’이 되어버린다. [가족의 탄생] (김태용, 2006)

5. 상위 5% 고소득자가 ‘나야말로 피해자’… 좀 화가 나잖나?


다섯 번째. 사실 지금도 ‘비정상가정’ 취급을 받는, 정상가정의 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한국은 여전히 가족제도에 있어 굉장히 보수적이다. 그런 와중에 ‘정상가정에게 더 많은 혜택을!’부터 외치는 게 좋아 보이진 않는다. 모두가 ‘내가 사회의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세상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상가정을 이룬 상위 5% 초고소득자가 ‘나야말로 피해자’를 외치는 건 좀 화가 나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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