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이 미쳤다고 하는 것 봤냐?”

동성의 연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가족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정신질환이 있다고 의심받으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당할 수 있다. 많은 나라가 이런 제도를 운용한다.

‘신속 간단’ 강제입원 

그러나 우리나라는 좀 ‘특별’하다. 그 절차가 매우 간단하고 신속하다. 우리 정신보건법이 보호의무자 두 사람 (두 사람이 어려운 경우에는 한 사람)이 동의하고 의사 한 사람이 진단하면 강제입원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기 때문이다(제24조). 부모나 배우자, 성인이 된 자녀 등이 보호의무자에 해당한다. 동성애를 이유로 한 감금사례는 MBC 2580에서 보도된 바 있다.

출처: MBC - 시사매거진 2580, “강제입원 가능합니다” (2014년 10월 27일)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1/3548249_12262.html
출처: MBC – 시사매거진 2580, “강제입원 가능합니다” (2014년 10월 27일)

그렇다면 강제입원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질까?

남성 A의 사례를 따라가 보자. A는 실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사례들을 몸소 겪는, 사실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존재다.

[box type=”note”]나는 모든 정신병원의 강제입원이 터무니없거나 강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많은 경우 입원은 실제로 필요할 수 있고, 입원으로 이어지는 절차는 온건할 수 있다.

다만 A의 사례 또한 언론,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법원의 판결, 정신병원 입원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진술 등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들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입원절차가 우리 법 제도에서도 실제로 가능해지는 ‘구조’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box]

정신의학적으로 A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 알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족 중 누군가는 A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킬 방법을 찾는다. 인터넷을 뒤져 알게 된 전화번호 129를 눌러 응급차량을 부른다. 오래지 않아 ‘응급이송단’이 출동해 A를 강제로 구급차에 집어넣는다. 이들 응급이송단은 강아지가 하수도에 빠질 때조차 달려가 성의껏 구출해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119구조대가 아니다. 이들은 민간 사업자들로 구성된다.

응급이송단

그저 아프니 병원에 가자는 말만 할 뿐이다. 때로 저항을 심하게 하다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2014년 10월에 방영된 MBC 2580에서는, 이런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 한 사람이 직접 가족인 척 하며 다른 기자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응급이송차량을 불러봤다. 구급차를 타고 온 건장한 남성 두 사람은 실제 전화를 한 사람이 가족은 맞는지, 정신질환이 있다는 사람은 정말 응급하게 이송되어야 할 정도로 질환이 있기는 한지 등을 조금도 살펴보지 않고 병원으로 끌어갔다. 저항하는 기자의 팔을 뒤로 꺾고 차량 구석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응급차량은 A를 태우고 정신병원까지 이동한다. 가까운 정신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수백Km를 이동한다. 그 동안 차 안에서 온몸이 묶여 있거나 제압당한 채 있어야 한다. 정신병원 앞에 내리면 병원 직원이 나와 인계받고, 환자복을 준다. 직원도 환자가 왜 끌려왔는지 묻지 않는다. 의사가 잠시 면담 한다. 아무리 나는 멀쩡하다고, 혹은 우울증이 약간 있지만 이렇게 강제로 입원당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도, “미친놈은 자기가 미쳤다고 하지 않는다”는 저 강력한 생각은 병원에서도 예외 없이 통용된다.

Jorge Gobbi, CC BY https://flic.kr/p/9on1qb
Jorge Gobbi, CC BY

저항을 단념하고 차분하게 있다면 입원서류에 사인하고 폐쇄된 병실로 안내되겠지만, 갑자기 수 킬로미터에서 많게는 수백 킬로미터를 끌려온 사람이 차분하기 어렵다. 계속해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주장하며 소리라도 지르면, 의사는 격리, 강박을 지시할 수 있다. 정신보건법 제46조는 치료가 필요하고 환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을 때 환자를 보호실이라 불리는 독방에 격리하거나 온몸을 묶는 강박이 가능하도록 규정해놨기 때문이다.

멀리서 끌려온 A는 독방에 격리되고, 온몸이 묶인다. 계속 저항하면 안정제가 강제로 투여된다. (이 안정제는 환자들에게 일명 “코끼리 주사”로 불린다) 계속 저항하거나 저항할 기미가 보이면 화장실도 갈 수 없다. 보호사나 간호사가 들어와 소변기를 받쳐준다. 그동안 CCTV는 보호실 내부를 관찰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수치스러워 여러 시간 용변을 참는다. 하지만 수액이 링거를 통해 지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진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우리의 훌륭한 입법자들이 저와 같은 상황을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위와 같이 입원당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느낄 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었다.

  1. 정신보건법상 ‘퇴원심사청구’
  2. 인신보호법에 따라 법원에 ‘인신구제청구’

퇴원심사청구를 통해 입원당한 환자는 해당 정신병원을 관할하는 지역의 ‘정신보건심판위원회’(의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다)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인신구제청구도 가능하다. 두 제도를 이용하면 환자를 입원시킨 그 병원의 의사 1인이 아닌, 독립적인 제3자에 의한 판단을 받아볼 수 있다. 그러나 2011~2013년까지 인신구제를 통해 퇴원한 사람은 전체 청구자의 7.5%에 불과하다.

법 퍼블릭도메인

이러한 제도는 물론 도움이 된다. 그러나 청구서를 직접 작성하고, 정신보건심판위원회나 법원에 편지를 직접 보내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멀리서 끌려왔고, 온몸을 강박 당했고, CCTV 아래에서 소변도 봤고, 원하지 않는 약물도 투여받았다. 그 상황에서 정신을 추스르고 저 제도가 있음을 파악한 뒤에 병원 직원에게 발송을 부탁해야 한다. 병원 직원들이 발송하지 않고 편지를 갖다 버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구제청구를 했다는 사실이 병원에 알려질 수밖에 없으므로 환자는 늘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우려하며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편지

또 다른 악몽, ‘회전문’ 입원 

우여곡절 끝에 편지가 법원에 도착했다고 해보자.

인신보호법은 그 규칙에서 2주 안에 재판을 진행하라고 명시한다. 2주 정도에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지 않지만, 혹 운 좋게 진행이 되어 판사가 신속하게 퇴원명령(수용해제결정)을 내렸다고 가정하자. 강제입원 당한 후 청구서를 작성하고, 발송하고, 법원이 접수하고, 심리하고, 재판해서 결정문을 병원장이 받아볼 때쯤 시간은 얼마나 흘러있을까? 아마 빨라도 한 달은 족히 지나갈 터이다.

이제 A는 병원 문밖을 나올 수 있다.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한 달간 그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리라. 그런데 가끔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병원 정문 앞에 다시 응급구조대가 기다리고 있다.

“선생님. 저희랑 같이 가시지요.”

그는 다시 다른 병원으로 끌려간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다시 과정은 반복된다. 편지를 쓰고, 청구서를 보내고, 법원의 재판을 받고…. 이른바 ‘회전문’ 입원으로 인한 장기입원 현상은 정신병원 입원 환자들에 대한 실태조사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나는 특정한 정신질환이 발병한 사람이 자신의 병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재빨리 그 의사에 반해서라도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의 정도, 실제 외래진료가 아닌 강제입원치료가 필요한 상황인지 여부, 필요하다면 얼마간 필요한지에 대한 의료적, 사회 복지적 고려를 전혀 엄밀히 검토하지 않는 강제입원이 허용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나라의 강제입원 비율은 2013년 기준 73.5%에 이르는데, 이는 미국이나 일본, 이탈리아 등과 비교할 때 4배가 넘는 수치다. 우리나라가 유독 강제입원을 당해야 할 만큼 심각한 정신질환자가 많은 걸까?

Luca Rossato, CC BY NC ND  http://www.flickr.com/photos/funky64/7000442183/in/photostream/
Luca Rossato, CC BY NC ND

예외적인 제도

우리 헌법은 설령 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검사가 청구한 영장을 법관이 심사하여 발부했을 때에만 그 신체를 구속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제12조 제3항). 구속하기 전에 영장을 받는 것이 원칙이며, 긴급하게 체포하지 않으면 범죄를 막을 수 없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체포한 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이런 절차를 밟아 구속된 후에도, 구속된 사람은 다시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구속이 적법한지를 심판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할 수도 있다(제12조 제6항).

이러한 헌법의 신체구속 원칙들은 형사소송법에 모두 구체화했고,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신체구속에 관한 원칙이 형사절차만이 아니라 모든 신체 구속의 경우에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우리 헌법의 입장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든 신체의 자유를 국가가 구속하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를 두고 이중 삼중으로 심사를 거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왕의 명령에 의해 신체를 구속하고,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소수 민족을 학살하고,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물고문해 거짓 진술을 받아내며, 장애가 있거나 길거리에서 노숙한다는 이유로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에 강제로 수용시켰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의무를 국가에 부여한다. 섣불리 인간의 신체를 구속하고 신체에 침습적인 행위를 가하도록 허용하면, 국가권력이나 다수 국민의 성향에 따라 엄청나게 부당한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와 비슷한 헌법하에서 체계적인 정신보건정책을 운용하는 나라들은, 그래서 강제입원 자체를 법원이 결정하도록 한다(독일, 미국 여러 주). 가족의 동의와 의사의 진단만으로 입원시키는 제도를 가진 나라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진단에 참여하는 의사는 2인 이상이어야 하고, 그 중 한 사람은 환자를 입원시킬 병원 소속이 아니어야 한다(영국 등). 또한 그렇게 입원시키더라도 길어야 1개월 정도만 강제입원이 가능할 뿐이다.

[box type=”info”]세계적으로, 헌법이 정한 엄격한 신체구속의 절차규정들이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거의 유일한 경우는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할 때의 강제격리 조치다. 이 제도는 적절한 격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위험이 너무나 크고, 그와 같은 격리 이유가 객관적이고 공적으로 확인 가능하며, 격리 시기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을 뿐이다.[/box]

법관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시킬 때 만큼은 헌법의 저 엄격한 원칙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법원과 같이 독립적인 기구가 강제입원을 결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 한 사람의 진단만으로 무려 6개월을 입원시킬 수 있다. 게다가 의사는 그 환자를 입원시키는 병원 소속이어도 무관하다.

대체로 많은 정신과 전문의들이 객관적인 진단기준으로 입원을 결정하리라 믿지만, 이들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얽힐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편 가족들은 많은 경우 정신질환이 있다고 여겨지는 가족구성원을 위한 선택을 하고 그를 지지하겠지만, 우리가 모두 예상하듯 가족구성원이 ‘정신질환’이라고 여기는 그 질병의 범주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는 기독교의 교리를 이유로 하여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이라고 여기겠지만, 어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열성적인 신념 자체를 정신질환이라고 여긴다. 나아가 충분히 외래치료가 가능한 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에도, 그 가족구성원을 돌보고 지지하는 다른 사회제도가 미비한 우리의 현실에서 가족들은 강제입원을 통해 환자를 자신들의 삶으로부터 떨어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결국, 정신질환이 있다고 ‘의심’만 받으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보다도 더 쉽게 신체구속이 정당화되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신장애인들은 쉽게 강제로 이송되고, 온몸이 묶이고, 장기간 병원에 갇혀 생활한다. 그들은 마치 인격이라고는 없는 존재가 된다.

Hartwig HKD, River of sorrow, CC BY ND https://flic.kr/p/4X7hMc
Hartwig HKD, River of sorrow, CC BY ND

잠식된 인격

장애인 운동은 한 인격을 가진 존재인 장애인의 가치를 절하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에 대해 투쟁해왔다. 그 결과 발달장애인이나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당사자나 그 아이를 둔 부모들은, 여전히 자신 또는 자신의 아이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할지언정, 동등한 인격체로서 대우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확신한다. 이는 아마 사회구성원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은 완전히 다르다.

자식에게 정신질환이 발생하면(또는 정신질환이라고 생각되는 특성이 나타나면), 부모는 아이의 인격적인 ‘본래의 존재’가 완전히 어딘가로 잠식당해 사라졌다고 믿는다. 자신의 ‘진짜 아이’는 정신질환 저 너머에 갇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진짜 존재’를 구출하기 위해 현재의 존재를 비인격적으로 다루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부모가 그럴 진데 국가와 사회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다. 정신질환의 저 너머에 잠식당한 인격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는(또는 다른 인격체를 보호하기 위해 정신질환을 격리하기 위한 작전에는), 헌법이 규정한 저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하지 않다. 헌법은 범죄자 같은 ‘나쁜 인격’들에 대해서도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요청하지만,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은 더는 그 어떤 ‘인격’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JD Hancock, Big Fear, CC BY https://flic.kr/p/85Mum2
JD Hancock, Big Fear, CC BY

물건이 된 인간 

그러므로 이 인간은 이제 하나의 ‘사물’이다. 응급이송차량이 가족의 전화를 받고 수백Km까지 환자를 이송하는 일이 가능하고, 그것을 국가가 범죄로 다루지 않는 데에는 이 행위가 마치 “화물운송계약”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잠식당한 몸뚱이는 신속하게 배달되어야 할 물건과 같다.

그렇게 배달된 존재는 이제 격리되고, 강박당한다. 그의 진술은 더는 진술이 아니다. 실제로 정신질환이 심각해서 치료가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일정 부분 치료를 받은 이후 그의 ‘인격’은 되살아날 수 있지만, 완치되었다고 의료시스템이 선언하기 전까지 그는 계속 ‘그 자신’을 회복하지 못한 비인격이며, 물화(物化)된 존재일 따름이다.

[box type=”info”]정신장애인이 ‘물적 존재’로 파악되는 현실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나는 “정신보건법상 강제입원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 물화되는 인격적 주체성의 복원을 중심으로- ”(신권철, 서울 「법학」, Vo.22, 2014)에 빚지고 있음을 밝힌다. [/box]

물론 어떤 정신질환은 실제로 한 사람의 고유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잠식한다. 그리고 발병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통해 완화될 수 있고, 발병 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인격적 특성이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회복도 가능하다. 그러나 성 정체성이 다른 것을 정신질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념이나 종교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정신질환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정신질환과 ‘본래의 인격’이 갖는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인간을 주장을 담은 체화물로만 보면 껍데기만 남는다. ( misspixels, CC BY NC ND)
misspixels, CC BY NC ND

헌법 예외, 인정해선 안 된다 

나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질환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질환이 의학적 측면에서 정신적인 특성과는 무관함에도, 나는 이 질병의 신체적, 사회적 경험 때문에 독특한 인격적 정체성을 획득했다. 정신질환과 인격적 요소는 더더욱 분리될 수 없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정신의학적으로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더라도 적절한 의학적, 사회적 도움을 받으면 그 자체로 고유하고 복합적인 새로운 ‘인격’으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세계장애인권리협약은 정신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장애인이 자기결정권을 가진 인권의 주체임을 명확히 한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 역시 한국정부에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제입원제도를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문제로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이제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적 권리의 ‘예외’를 인정하는 태도는 더는 허용해선 안 된다.

장애를 바라보는 열린 시선과 전문적인 의료적 판단이 결합해 정신장애에 대한 강제치료의 개입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며, 무엇보다 강제수용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정신보건정책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헌법이 예정한 사회의 모습이자 국제인권조약의 요청이며, 지난한 역사를 통해 장애인운동이 입증해온, 편견 없고 풍부한 정체성으로 가득한 세상의 조건이다.

Elisabeth Audrey, CC BY ND https://flic.kr/p/5d3b7b
Elisabeth Audrey, CC BY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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