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87년 이후 언론운동의 평가와 과제: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기획 세미나.
한국 언론운동은 정치병행성(political parallelism)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래된 질문이고 불편한 질문이다.
정치 병행성이란 무엇인가. 조항제(부산대 교수)에 따르면 정치 병행성은 “특정 정당과 미디어가 정치적 주의 주장을 같이하는 경향, 곧 이념이나 논조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는 일종의 정치와 미디어의 연합(coalition)현상”을 말한다. 정치 병행성이 정언유착처럼 특정 정당과 특정 언론의 교환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26일 오후에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기획 세미나에서 “87년 이후 언론운동 궤적과 정치 병행성”이라는 제목의 김동원(언론노조 정책실장)과 이준형(언론노조 정책실 정책위원)의 발표와 이정환(슬로우뉴스 대표)의 토론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윤창현(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세미나 인사말에서 “언론운동의 정치 병행성에 대한 비판이 자유언론 그 자체에 대한 도전적 과제가 되고 있다”면서 “저널리즘의 원칙이 정치 병행성이라는 공격에 흔들리고, 정권의 언론 탄압에 빌미를 제공하고, 지금까지 언론탄압에 앞장섰던 세력이 공정성이란 단어를 차용해 언론운동을 공격하는 무기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원·이준형의 주제 발표: “연대를 통한 공공성 구축이 절실하다.”
김동원은 이날 주제 발표에서 “공동화된 정당체제’에서 격화되는 혐오와 적대의 언어에 언론운동도 동참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라고 지적했다.
김동원에 따르면 한국 언론운동은 지배 구조 개선 투쟁과 편집권 독립 투쟁이 두 가지 큰 갈래였다.
첫째, 제도적 차원의 언론개혁 운동과 둘째, 대결 구도에 입각한 언론개혁 운동이다. 첫째는 언론연대가 대표적이고 둘째는 안티조선 운동이 대표적이다. 태생적으로 정치병행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였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정부는 보수 신문과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공영방송을 정권 중심의 개혁 연합으로 끌어들였다. 신문고시를 강화하고 기자실을 폐지하는 등 언론개혁을 밀어붙였으나 보수 신문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교착 상태에 빠진 언론개혁 운동이 ‘나는 꼼수다’를 비롯한 대안 언론의 대중적 파급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정파화돼 가던 시민사회와 언론개혁 운동 사이에 강한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동력을 끌어냈지만 정파적 제약과 정치병행성을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대안 언론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레거시 미디어가 정치 사회와 시민 사회를 매개하는 병목적 전략적 위치를 독점하지 못하게 됐다.

김동원은 문재인(전 대통령)이 방송법 개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 두고 “방통위-공영방송 이사회-사장으 로 연결되는 임명 구조를 손에 쥔 상태에서 기왕의 후견주의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동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 언론운동을 “민주적 언론개혁을 기치 삼아 힘있는 투쟁을 하기위한 동력도, 명분도 상실한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동관을 앞세워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언론개혁 운동의 동력은 15년 전보다 훨씬 약화됐다. 김동원은 “한국 언론과 정치의 병행적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발맞추어 전개되어온 언론개혁 운동은 누적되어 온 문제들이 언론개혁 운동의 토대를 흔드는 상황까지 와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를 지나면서 정치 팬덤이 강화된 것도 언론운동의 정치 병행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문재인 정부 탄생 이후 깨어있는 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지지자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우기 시작했다”는 강남규(’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의 분석도 흥미롭다. “시민의 승리로 탄생한 정부에서 역설적으로 시민의 후퇴가 일어났다”는 진단이다.

김동원은 “국가의 인격화가 정당 체제의 공동화를 불렀고 전체가 부분에서 반복되는 프랙탈(fractal)과 같은 형태로 정치와 언론, 시민사회, 학계까지 침투했다”고 지적했다.
김동원은 “언론의 자유란 고전적인 의미로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최상위이자 최우선의 자유가 아니라 작은 자들의 자유를 드러내게 하는 ‘매개로서의 자유’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환의 토론: “두려워할 것은 정치 병행성이 아니라 의제 설정 시스템의 붕괴.”
“임기 10개월을 남겨두고 해임된 공영 방송 사장이 있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이사회 멤버들을 갈아치웠고 정부와 여당 추천 이사들로 과반을 확보한 뒤 이사회를 소집해 사장을 해임했다. 부당한 해임이라며 대통령을 상대로 해임 무효 소송을 걸었는데 1심에서 패소하고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5년이나 지난 뒤였고 다시 정권이 바뀐 상태였다.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지만 해임이 무효라고 한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 사람이 바로 문재인 정부에서 해임된 고대영(KBS 사장)이다. (해임 사유는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처음 합격 점수 미달 △KBS 신뢰도·영향력 추락 △파업 사태를 초래하고 해결하지 못해 직무능력 상실 △졸속으로 추진한 조직개편으로 조직 내 반발과 갈등 초래 △방송법·단체협약 등을 위반한 징계 남발 △허위·부실 보고로 이사회 심의·의결권 침해 △상위직급 과다 운영 등 인력운용 부적정 등이었다.)
고대영의 데자뷔, 김의철
애초에 고대영이 KBS 사장으로 적합한 인물이었느냐를 두고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지난 정권에서 임명한 사장이 정권이 바뀌니 잘렸다는 사실이다. 잘릴 만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공영 방송 사장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서 다시 김의철(KBS 사장)이 임기(2024년 12월)를 1년 3개월 남겨두고 해임됐다. 김의철 역시 해임 무효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크다.
법원은 “KBS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KBS 사장으로서 적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임기 만료 전 해임하는 것은 사장으로서 직무수행 능력에 대한 근본적 신뢰 관계가 상실된 경우와 같이 직무수행에 장해가 될 객관적 상황이 발생한 경우로 제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장으로 자격이 부족하더라도 해임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고대영의 부당한 해임을 방치했기 때문에 김의철이 해임된 것이다. 고대영에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연못에서 물고기가 계속 죽으면 연못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보기에는 언론운동 진영이 진영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민주당 정권에 관대하다고 오해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다.
문재인과 이용마, 지키지 못한 약속
문재인이 이용마(MBC 기자)와 약속을 저버렸던 건,
- 첫째, 민주당 정권이 최소 5년 더 연장될 거라고 봤거나,
- 둘째, 그래서 당장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봤을 가능성이 크다.
- 셋째, 박근혜 탄핵 이후 한국 사회가 그 시절로 퇴행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정현)이 KBS 보도국장(김시곤)에게 전화를 걸어 “하필이면 세상에 (대통령님이) KBS를 봤네. 한 번만 도와주시오“라고 압박하던 그 시절 말이다. ‘눈 떠보니 선진국’인데 MBC 사장(김재철)이 큰집(청와대)에 불려 가 쪼인트 까이던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운동 진영이 더 가열차게 싸우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 첫째, 박성제의 MBC나 양승동의 KBS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급하지 않다고 봤을 수도 있고,
- 둘째, 민주당이 과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입법이 가능하다고 봤을 수도 있다.
- 셋째, 언론계 전반에 공영언론의 독립에 대한 문제 의식이 줄어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서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기 마련이고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정권을 잡고 난 뒤에 생각이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민주당 정권과 좀 더 치열하게 싸우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치 병행성에 관한 문제.
한국 사회가 지난 15년의 경험으로 얻은 교훈은 언론 개혁은 대통령의 선의로 작동하는 게 아니고 정권을 바꾸거나 또는 지키는 걸로 가능한 한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치열하게 싸우지 못했다는 반성은 가능하겠지만 그걸 정치 병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문재인 정부 때 언론중재법 개정안(징벌적 손해배상)을 두고 가열차게 싸웠던 것은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가 ‘가짜 뉴스’ 퇴출에 목을 매는 것처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도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비판 언론을 컨트롤하겠다는 욕심을 쉽게 꺾지 못했고 언론 개혁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냈다. (성격은 크게 다르지만 언론개혁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적다고 보기 어렵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언론운동 내부에서도 일부 이견이 있었지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못지 않게 시급한 현안이었다고 본다. 다만 수세적으로 징벌적 손배를 막느라 공세적으로 언론 개혁 입법을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언론은 정치 병행성이 아니라 투명성과 신뢰가 문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언론의 정치 병행성과 언론운동의 정치 병행성은 따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언론의 정치 병행성(에 대한 오해)은 태생적으로 불가피했다. 조항제는 ‘한국 언론의 공정성: 이론적 구성’에서 “정치와 병행하면서 언론은 정치의 문제를 상당 부분 떠안았지만, 문제를 약화하기보다 가중시켜 정치에 되돌려주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치 불신과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가 맞물린다는 이야기다.
황우석 사태는 비교적 명확했지만 광우병 소고기 논란 때는 견해가 엇갈렸고 조국 사태에 이르러서는 나라가 둘로 갈렸다.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상식과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주장과 정치적 견해의 충돌이다. 같은 말을 ‘바이든’으로 듣는 사람과 ‘날리면’으로 듣는 사람의 간극을 좁히기는 쉽지 않다.
‘날리면’인지 ‘바이든’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일부러 ‘바이든’이라고 강조해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건 저널리즘의 사명과 책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정치 병행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도 마찬가지고 이재명(민주당 대표) 구속 영장에 대한 입장 차이도 마찬가지다. (정치 검찰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입장과 이재명에게 볼모로 잡힌 정당 정치의 한계를 비판하는 입장이 충돌한다.)
강준만은 ‘소통의 무기’에서 언론의 객관주의를 “매체가 적고 그 영향력이 큰 시대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실이 의견을 압도한다고 보던 때가 있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는 게 강준만의 접근이다.
미첼 스티븐스(뉴욕대 교수)는 ‘비욘드 뉴스’에서 “매체가 적고 그 영향력이 큰 시대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니콜라스 레만(콜롬비아대 교수)은 이렇게 지적했다. “객관주의가 정말 중요하며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목표를 버려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홍원식(동덕여대 교수)은 지난해 10월 언론정보학회 학술대회에서 저널리즘의 객관성 추구를 “다중의 층위로 구성된 ‘사실’에 대하여 보다 깊은 층위에 놓여있는 심층적 실체를 발견하고자 적극적으로 취재하고 전달하는 실천적 저널리즘 행위를 독려하는 저널리스트의 윤리적 가치이자 세계관”이라고 정의했다. “형식적 객관주의를 넘어 목적론적 윤리관으로서 객관적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언론운동은 정치 의존이 더 큰 문제.
정치 팬덤이 강화되면서 언론의 정치 병행성이 강화됐다는 진단은 결과를 두고 하는 해석일 뿐 그래서 정치 병행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넘어가는 건 곤란하다.
결과적으로 정치 병행성의 경향이 나타날 수는 있지만 이런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는 건 사실 보도와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는 언론의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늘 비판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비판을 극복하는 것은 투명성 확보와 설명 책임이다.
뉴스타파는 문재인 정부 시절 윤석열 인사 청문회가 열릴 때 윤석열의 거짓말을 폭로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한 적 있다. 결국 윤석열은 검찰총장에 임명됐고 조국 사태로 문재인(대통령)과 갈등하다가 야권 대선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이 됐다. 뉴스타파 보도가 정치 병행성을 드러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김만배 인터뷰로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지만 뉴스타파의 저널리즘 윤리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언론개혁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 병행성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과도하게 정치 병행성을 의식하거나 탈정치화하는 흐름이 오히려 한계를 만들 수도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가 시민사회 진영에서 요구한 언론개혁 입법을 외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적 언론개혁을 기치 삼아 힘 있는 투쟁을 하기 위한 동력도, 명분도 상실한 시기였다”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너무 냉소적인 평가라고 생각한다. 잘 싸웠지만 실패했고 애초에 정치 병행성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의존이 문제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애초에 언론운동의 정치 병행성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지 않고 김동원이 말한 “작은 자들의 연대를 통한 공공성의 구축”이 그 대안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공동화된 정당 체제’에서 격화되는 혐오와 적대의 언어에 언론운동도 동참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지만 공동화된 정당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판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론 개혁은 정당을 넘어서는 시민 사회의 과제다. 민주당과 연대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국민의힘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언론인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정치 병행성이 아니라 언론이 정치와 병행한다는 오해와 편견, 신뢰의 추락, 언론이 정치에서 독립할 수 없는 시스템의 위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언론의 사명과 공적 책무에 복무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과 시민들의 신뢰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다양한 의견과 주장의 충돌, 발전적인 토론이 정치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때 비로소 언론의 정치 병행성 탈피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확보하는 게 언론운동의 과제가 돼야 한다.
나는 몇 년 전 미디어오늘 사설에 이런 말을 썼다. “개혁의 주체는 언론이고 그 대상도 언론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정치의 책임도 크지만 정치 탓만 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언론개혁 운동의 문제는 정치 병행성이 아니라 정치 의존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상황이 가슴 아프지만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당과 가열차게 싸우지 않았던 데 대한 처절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