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노회찬 평전.
2018년 7월23일 아침, 노회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삼성이 노회찬을 죽였다.’
최근 출간된 ‘노회찬 평전’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펼쳐 본 챕터가 “삼성 X파일, 7년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이렇게 쉽게 잊혀서는 안 될 사건이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삼성 X파일은 한국 정치와 경제의 유착이 응축된 사건이었다. 드러난 건 일부일 뿐이고 우리는 이 사건의 전체 실체를 아직 모른다. 노회찬의 죽음은 삼성 X파일과 떼놓을 수 없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타락한다. 그때 ‘떡값 검사’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검찰 공화국에 살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 재벌 기업 총수가 집권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에게 100억 원을 건넸다. 계열사 언론사 사장이 돈 심부름을 했다.
- 1997년의 일이다. 이학수(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가 홍석현(당시 중앙일보 회장)을 통해 이회창(당시 신한국당 후보)에게 뇌물을 건넸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이들을 도청했는데 8년 뒤에 그 녹취록이 공개됐다. 이게 그 유명한 삼성 X파일 사건이다.
- 검찰 수사에서 김인주(당시 삼성전자 비서실 재무실장)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이회성씨를 만나 자기앞수표 1만 매 10억 원을 직접 건네준 사실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두 명이서 15개를 운반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30개는 무겁더라구. 비서실 김인주가 믿을만 하니까 그 친구, 나, 이회성, 셋이서 백화점 주차장에서든지 만나 가지고…” 홍석현의 말이다. ‘빼박(빼도박도 못할)’ 증거였지만 검찰은 서둘러 덮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 삼성 X파일 사건의 장본인들, 이학수와 홍석현, 이회창, 이회성 등은 아예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검찰은 불법으로 녹음된 테이프를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면서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때 수사를 총괄한 검사가 나중에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황교안(당시 서울중앙지검 차장)이다.
- 이 사건을 보도한 이상호(당시 MBC 기자)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고 국회에서 ‘떡값 검사’들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은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둘 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였다.
- 이상호는 1심에서 무죄(2006년), 2심에서 유죄(2006년), 대법원에서 확정(2011년)됐다. 노회찬은 1심에서 유죄(2009년), 2심에서 무죄(2009년)로 바뀌었다가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2011년), 결국 유죄가 확정됐고 의원직을 상실(2013년)했다.
- ‘노회찬 평전’을 쓴 이광호(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는 “황교안은 도둑을 풀어주고 ‘도둑이야’라고 외친 노회찬을 기소했다”고 평가했다.
- 국회의원은 회기 중 발언에 대해 면책 특권을 갖는다. 그런데 대법원은 기자회견도 무죄고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도 무죄지만 이 보도자료를 인터넷에 올린 것은 유죄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폈다.
- 노회찬은 “폐암환자를 수술한다더니 암 걸린 폐는 놔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라고 비판했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 ‘노회찬 평전’에 뒷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이상호가 여러 의원들에게 떡값 검사의 실명을 터뜨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모두 거절했다. 그 가운데 심상정도 있었다. 심상정은 녹음 자료를 확보하기 전에 터뜨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 그때 유일하게 나선 의원이 노회찬이었다.
- “노회찬이라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개하기 전에 수십 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후회하지 않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공개 이후 어떤 일이 생길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최악의 사태도 감수해야 했다.” (‘노회찬 평전’ 가운데.)
- 다음은 그날 노회찬이 올린 글 가운데 일부다.
- “내가 도청 테이프에 들어 있는 떡값 검사들 명단을 보고도 국민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으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옳다면 해야 한다. 다시 또 이런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의 행동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 다음은 노회찬이 2013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힌 당시 상황이다.
- “8월 18일 열린 법사위에 법무부 장관을 대신해서 ‘떡값검사’로 의혹을 받는 법무부 차관(김상희)이 나와 있었다. ‘당신의 이름이 X파일에 들어간 걸 알았느냐’고 물으니까 ‘알았다’더라. 어떻게 알았느냐니까 대검 수사부에서 알려줬다고 했다. 세상에, 수사 대상에게 수사는 하지 않고 당신 이름이 들어가니까 조심하라고 알려준 거다. 법사위 회의에서 본인이 증언한 내용이다. 나는 그걸 이야기했다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는데 정작 의혹이 되는 사람에게 알려준 수사검사는 누군지 밝혀지지도 않았고 처벌받지도 않았다.”
삼성 돈은 뒷 탈이 없다고들 했다.
- 김용철의 말이다. “삼성 돈은 안전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받아도 탈이 없다는 것이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처럼, 치밀한 이미지가 뇌물을 받는 자들을 안심시켰다.” “잘나가는 검찰 간부의 80% 이상이 삼성 장학생”이라고도 했다.
- 삼성 X파일에는 삼성이 1997년 외환위기 때 기아자동차를 부도나게 해달라고 정치권에 청탁한 정황도 담겨 있다. 삼성자동차를 살리느냐 접느냐 따지던 무렵이다.
- 홍석현이 강경식(당시 부총리)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이학수가 3~5개를 주라고 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회창이) 기아에 대해 답을 줬다”면서 “자기가 힘을 보태겠다고…”라는 대목도 있다. 삼성은 금융 계열사들을 내세워 대출 상환을 압박하면서 뒤로는 기아차 주식을 사들였다. 기아차는 결국 법정 관리에 들어갔고 세 차례 입찰 끝에 현대자동차에 넘어갔다. 삼성이 기아차를 노렸지만 그때는 이미 삼성도 발등의 불을 끄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 삼성이 검찰 간부들에게 떡값을 건넨 정황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검찰 쪽 K1(경기고 출신)들한테는 내가 줄 테니 5000만원만 보내 주세요.” 녹취록에 등장한 홍석현의 말이다. 실제로 떡값 검사들 가운데 처벌은커녕 조사조차 제대로 받은 사람이 없다.
노회찬과 드루킹의 악연.
- 노회찬이 드루킹의 경제적공진화모임에 처음 초청 받은 때가 2013년이다(의원직을 잃고 백수가 됐던 무렵이다). 그때부터 1년에 한 번 특강을 했다.
- 2016년 창원에서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던 무렵 김동원(드루킹)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김동원이 2000만 원을 건넸고 나중에 노회찬 부인의 운전기사를 통해 2000만 원을 추가로 전달했다.
- 노회찬은 이 4000만 원을 회계 담당에게 전달했고 선거 비용과 선거 직후 부채를 갚는 데 썼다.
- 노회찬이 죽기 며칠 전 노회찬의 아내 김지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기자회견을 하자. 우리가 그 돈을 착복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양심에 찔리는 거 하나도 없어. 법적으로 잘못한 게 있으면 책임을 져야지. 고백하고 용서를 빌자. 그게 노회찬이잖아.”
- 노회찬은 “그것도 방법이지” 한 다음 한참 뒤에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라고 말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 만약 노회찬이 ‘떡값 검사’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 의원직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드루킹의 돈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2017년 기준으로 국회의원 후원금 순위에서 노회찬은 2위를 기록했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정치자금법의 한계.
- 노회찬은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의원으로 당선됐고 2008년에는 노원병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2012년 노원병에서 당선됐으나 의원직을 잃었고 2014년 재보궐 선거에서는 동작을에서 나경원에게 밀려 떨어졌다. 2016년 창원에서 당선됐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 노회찬이 드루킹을 만난 건 의원직을 상실한 직후였고 드루킹에게 돈을 받은 건 2016년 선거 직전이었다.
- 원외 정치인은 후원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노회찬은 3년 가까이 무직 상태였다. 노회찬이 드루킹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선거를 한 달 앞둔 무렵이라 후원금 모금이 가능했지만 원외 정치인의 경우 1인당 500만 원을 넘을 수 없었고 애초에 단체 후원은 불가능했다. 노회찬이 신고를 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 월간중앙이 쓴 노회찬 부고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진보 정당의 발전을 추구했던 그는 다른 여느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늘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삼성 X파일 폭로 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망자는 말이 없지만 2016년 20대 총선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인 빚과 생활비, 선거운동자금 등 금전적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 “높아진 인지도와 위상 때문에 활동 반경과 씀씀이는 커졌는데 예비후보 등록 전에는 후원금을 모금할 수 없으니 금전적 압박이 심했으리라 본다”는 분석도 있었다.
- 노회찬의 변호를 맡았던 박갑주(변호사)는 “진보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풍찬노숙이 아니었던 적이 없지만, 특히 삼성 X파일 사건은 정치인 노회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중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TMI.
- 이광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4년 동안 221명을 인터뷰하고, 원고지 3600장을 썼다고 한다. 상당한 분량을 덜어냈고 원고지 1300장 분량으로 냈다.
- 노회찬은 에버노트로 이슈 관리를 한다고 소개한 적 있다. 이슈 폴더가 100개가 넘었다.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입담의 비결을 밝힌 적 있다. “사드 배치 문제만 해도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거의 다 섭렵하려고 한다. 그래야 사안의 본질, 핵심적인 포인트가 보이고 생각이 정리된다. 그거 없이 표현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인위적인 냄새가 나면 전달 효과가 작다.”
- 삼성 X파일에 보면 홍석현이 이학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얼마 전 조선일보 방씨 일가가 모여 ‘누가 되든 간에 김대중이가 되는 것은 절대 막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고 그 자리에서 김○○ 주필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김 주필 역시 공감하고 하여 1차적으로 DJ의 큰 약점인 건강 문제를 치고 나가기로 했다는 겁니다.”
뒷 이야기: 삼성 X파일의 주인공들.
- 이학수는 삼성 재직 시절 10억~30억 원 정도 연봉을 받았던 걸로 추산된다. 스톡옵션으로 300억 원 이상을 챙겼고 수십억 원의 퇴직금도 챙겼다. 삼성을 그만둔 뒤에는 고려대학교 재단 상임이사와 고려대 교우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 홍석현은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 주미 대사였다. 한때 UN 사무총장을 노렸으나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주미 대사도 중도 사퇴했다. 2017년에 중앙일보 회장에서 사퇴했을 때 대선 출마를 노린다는 관측이 많았는데 결국 실패했다. 아들인 홍정도가 중앙일보 사장을 맡고 있다.
- 이회창은 방상훈이 예측한대로 1997년 대선에서 낙선했다.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다 2002년과 2007년 두 차례 더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지만 별 재미를 못 봤다.
- 떡값 검사로 거론된 검사들도 모두 잘 나갔다. 홍석조(홍석현 동생)는 광주고검장을 사퇴하고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으로 옮겨갔다. 2015년까지 9년 동안 500억 원 가까이 배당금을 받았다. 지금은 아들인 홍정국에게 경영을 물려줬다. 안강민(전 서울지검장)은 변호사로 개업했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 장석준(당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저 사법 적폐란 노회찬이 맞서 싸우고 노회찬을 물고 뜯은 자들의 긴 목록에 다름 아니다.”
- 이상호(당시 MBC 기자)는 2011년 MBC에서 해고된 뒤 2015년 해고 무효 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했다가 2016년 징계를 받고 퇴사했다.
노회찬이 남긴 질문.
- 노회찬은 의원 시절 정치 자금 관리에 철저했다. 크지 않은 금액의 후원금이 허술하게 처리된 사실을 알고 나서 “나를 불구덩이에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담당자를 무겁게 질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이광호는 “유서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의 잘못은 한순간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발생한 실수에 가까운 것이었다”면서 “하지만 그는 이를 실수라 하지 않고 무거운 벌로 단죄해야 할 부끄러운 판단이라 했다”고 강조했다.
- “노회찬을 죽음에 이르게 한 부끄러움은 사건 자체보다는 여러 차례 국민을 상대로 이를 부인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라는 게 이광호의 결론이다.
- 이 글은 노회찬의 잘못을 두둔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노회찬이 모든 걸 걸었던 사법 적폐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남아있다.
- 다음은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했던 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이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에 정의가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중략) 오늘 대법원은 저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지만 국민의 심판대 앞에선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 앞에 만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노회찬 평전 / 이광호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