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영문판은 대중 지식의 마지막 종착역이자 성전이다.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편집자들이 최신 뉴스와 학술 성취를 바탕으로 실시간 업데이트 한다. 특히 인물에 대한 정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영문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한국인이라면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성 싶다.

일전에 한번 언급했는데, 싱가폴 대학엔 리포트 과제 제출을 ‘영문 위키 등록’으로 대체하는 교수님도 많다. 그러니까 자신이 1학기 동안 천착한 주제를 위키에 인용(citation)을 정확히 달아 등록하는 게 과제란 이야기다. 당연히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고, 공부가 실질로 연결이 되니 문과 학생에 큰 도움이 된다(심지어 과제 발표도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자신이 만든 위키를 띄워 놓고 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캄보디아 사람

한국인 가운데 ‘캄보디아’ 친구를 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유명 인사 이름을 떠올릴 수도 없다. 그런데 최근 3~4년 사이 가장 유명해진 캄보디아 사람이 한 분 있다. 올해 서른두 살, 스롱 피아비(Sruong Pheavy)라는 프로당구 선수가 주인공이다. 이런 저런 언론 보도에 수백 번 나왔기 때문에, 그 존재를 모르는 분은 없을 듯 싶다.

약관 스무 살에 충북 청주의 한 노총각(47살)을 만나 결혼했는데, 우연히 남편의 취미인 3구 당구(carom billiards)에 재능을 보였고, 1년 만에 아마추어 최강이 되고, 3년 만에 세계랭킹 2위에 올랐다는 동남아 출신 며느리셨던 것이다. 지난해에는 한국 조계종이 주는 ‘2022 불자(佛子) 대상’까지 수상하셨더라. 이리저리 스타급 유명세다.

이미 뻔한 스토리 같지만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 까닭은, 뉴스를 읽다가 흥미가 생겨 구글에 그 이름을 검색해본 게 계기다. 캄보디아 언론이 특히 난리였다. 한국에 관심있는 동남아 영자 신문들이 모두 한 번 이상 기사로 다뤘다. “한국으로 시집간 동남아 처녀의 성공기”. 그런데, 놀랍게도 위키피디아 영문판에는 스롱 피아비 항목이 없었다.

English-Speaking World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스롱 피아비의 위키 항목을 내가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주부터 틈틈이 그녀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영문 위키를 써 보신 분은 알겠지만, 초보자가 다루기 상당히 어렵다. 내용과 정보를 구체적으로 인용을 달아서 외국어 메뉴를 컨트롤해 등록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그래서 아직 완성을 못하는 중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굉장히 빡치는 것이다. 무언가 세상이 크게 단절된 느낌이었다. 스롱 피아비는 적어도 고국 캄보디아에서 김연아급의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는 인물이다. 코리안 드림을 이룬 스타 인물이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아시아 영자 신문에서 기사를 써댔던가. 그렇게 많은 정보와 뉴스가 주어졌는데, 아직까지 영어 에디터 단 한 명도 스롱 피아비의 항목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영문 위키가 철저하게 제1세계 미디어기 때문이다. 한국과 캄보디아 사람은 여전히 제3세계의 자기 언어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영문 위키 편집자들이나 독자들은 제3세계 뉴스를 전혀 보지 않는구나, 그리고 아시아 사람들 역시 영문 위키에는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으로 안 되는 재능의 영역과 재능을 발견할 기회

우리가 당구장에서 ‘삼구 죽빵’이라 부르는 스포츠가 영어로 ‘캐롬 빌리어드(carom billiards)’다.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 취미다. 1990년대 초 대학생이라면 당구 좀 쳐줘야 사람 대접을 받았다. 죽빵을 칠 수 있다면 적어도 200점 이상의 고수였다. 내가 당구장을 다닐 때만해도 당구장에서 여성을 본 적이 없다. 한갓진 남자들의 최고의 취미였기 때문인지, 마치 금녀의 구역같았다.

윤석열 대통령처럼 당구에 진심을 다한 자는 영광의 ‘500점 고지’에 오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노력의 영역이 아니다. 바둑으로 치면 아마 2단쯤, 골프로는 싱글쯤 되는 것일까. 당구에도 분명 재능의 영역이 존재한다. 노력으로 못 오르는 마의 구간이 있다. 그 재능을 테스트하기 위해선 노력으로 200까지는 올려봐야 한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이 수반된다. 당구에 재능이 없다면, 바둑이나 테니스, 또는 춤이나 노래로 바꿔봐도 된다. 한국 청소년이라면 기회가 사방에 깔린 셈이다.

스롱 피아비 같은 캄보디아 소년소녀들이 안타까운 이유는, 어릴적 흙바닥에서 뛰어놀다가 잠시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10대 후반이 되면 농사나 공장 등 생업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남아 대부분의 청소년이 마찬가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 지를 테스트할 기회를 갖질 못한다. 그저 월 수입 200달러의 노동 시장으로 천편일률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이다.

“이왕이면 캄보디아 선수로 뛰자”

그런 시골에 살던 여성이 스무 살에 한국의 중년 어른과 결혼을 결심하고 스물한 살에 낯설고 추운 북쪽 나라로 건너와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이런 이주 여성이 사실 우리 주변에 굉장히 많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확률을 뚫고 스롱 피아비는, 남편의 취미 공간에 따라갔다가 깜짝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더 운이 좋게도, 남편은 육아나 복종보다는, 아내가 한국에서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기를 바라는 멋진 남자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남편의 외조를 발판삼아 단 3년 만에 세계 정상급 당구 선수가 된다. 심지어 남편은 아내의 국적을 캄보디아로 유지해 주고, 고향에 가서 국가 대표로 활약하게끔 배려해 줬다. 국가 대표가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더 큰 목표가 생긴 것이다. 동시에 언제든 남편을 떠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때 중요한 건 캄보디아인데, 이 나라에는 프로 당구도 없고 당구 협회나 조직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그리하여 스롱 피아비를 위해 부랴부랴 협회를 만들고 대표 선수단을 꾸렸다. 그런 나라에서 스롱 피아비가 캄보디아 국기를 달고 동남아게임(SEG)이나 국가 대항 당구대회에 나가 캄보디아에 영광의 금메달을 안겨주기 시작했으니 국가적인 영웅이 된 건 당연했다. 사실 이런 스토리는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다.

스롱 피아비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시골에서 감자를 캐던 소녀였다”며 “한국에 와도 평범하게 살 생각이었다”고 했다. 피아비는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느낌”이라며 “캄보디아에서 만난 젊은 여성들이 나를 보면서 ‘언니 덕분에 희망을 얻었다’며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핵심은 기회의 부족이다

물론 예전에 헐리우드 영화에도 엇비슷한 스토리가 있긴 했다. 멕시코나 쿠바 난민이 플로리다에 도착해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카네기 홀에 선다거나 하버드에 간다거나 하는 스토리 말이다. 미국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프로파간다적 스토리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피아비의 스토리는 이와는 결이 다를 수 있다. 우선 한국 땅에 와서 프로 당구선수가 된 것은 비슷하다. 재능의 발견은 환경이라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한국 남편과 살면서도 캄보디아 국적으로 대회에 나갈 수 있다. 그녀의 성공은 한국보다 오히려 캄보디아 국민에게 더 큰 감동을 전달한다. 없던 제도까지 만들어 냈다. 당구 협회를 만들고, 국가 대표단까지 꾸린다. 그녀는 자신이 번 돈을 캄보디아에 학교를 만드는 데 쓴다.

핵심은, 재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기회의 부족이었던 것이다. 국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과 가족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녀가 한 얘기 중에 인상적인 얘기는 두 개다.

  •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키가 160cm 정도였는데, 이후 환경적 요인 덕분에 167cm 가 되었다고 한다.
  • 그리고 가난으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캄보디아 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 이밖에도 한국에 와서야 세상이 넓고 크다는 것을 알았다는 대목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스롱 피아비는 한류의 완성형 모델같다.

P. S.

스롱피아비가 지난 5월 캄보디아에서 열린 동남아 경기에서 또 우승을 차지했다. 올해 하반기에 스롱 피아비를 주제로 위키피디아가 아니라 논문을 하나 써볼까 싶다. 스롱 피아비 같은 인재를 세계적인 스타로 키우는 게 바로 한류의 최전선이자 한국 문명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모두 스롱 피아비의 페이스북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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