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5일 23살 여성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계에 앞치마가 빨려 들어가 숨졌다. 이 죽음을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이 죽음은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이 죽음에 암묵적으로 공조했다는 의미에서 무엇보다 사회적이다.
2018년 SPC 그룹의 수백억 원대의 임금체불과 제빵사 불법파견 등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자, SPC는 한 걸음 물러나 ‘사회적 합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참담하고 쓸쓸한 ‘휴식권’이라는 말, SPC의 부당노동행위를 세상에 알린 임종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무엇보다 노동자가 잠시라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파리바게뜨 여성노동자 달빛 간담회, 2022. 9. 29.). 임 지회장은 지난 5월 19일까지 53일간 단식을 이어갔고, 많은 이들이 임 지회장의 투쟁을 지켜봤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처절하고 간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너무도 평화롭고, 고요했다.
그러다가 한 죽음이 세상을 깨웠다. 23살 여성 노동자의 죽음. 이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다. 이 죽음은 앞서 말했듯,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이며, 우연한 사고사가 아니라 제도적인 살인사건이다. 그러니 이 죽음은 죽임을 당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피살이지만, 그 죽음에 관한 ‘미필적 고의’를 가진 기업의 입장에서는 살인이며, 그 기업의 ‘미필적 고의’를 묵인한 정치과 경제, 언론의 권력담합체 입장에서 보면 방조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누더기’가 된 중대재해법과 이를 보도하는 다수 언론의 태도를 보더라도 그 방조 혐의는 명확하다. 우리라고 다를까. 사고사의 모습을 띤 제도적 살인, 체계적이며 정치경제적인 살인에 관해 우리도 대체로 무관심하다.
하지만 시체에 가깝게 말라비틀린 우리의 사회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죽음은 이미 미라화한 사회적 감각을 일깨운다. 23살 청년이 홀로 새벽에 거대한 기계에 끼어 숨지는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다. 3인 1조, 아니 2인 1조로만 일했어도 막을 수 있는 사고, 아니 살인사건이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한다. 이 죽음은 ‘예정된 살인사건’이면서 기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살인사건이다.
참담하게도 고인의 빈소에 ‘빵’ 상자를 보냈다는 그 살인기업의 홈페이지는 오늘도 반갑게 우리를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