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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엔 치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

이마가 펄펄 끓거나 미열이 지속되는 가운데 제멋대로 잠을 잤다. 아침에 저녁을 먹고 저녁에 아침을 먹었는데, 이렇게 밤낮을 멋대로 바꾸어가며 사는 삶이 축복인지 지옥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침과 저녁을 남들처럼 맞이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출퇴근이 그렇게 갖기 어려운 것일 줄이야. 내 몸은 나를 원하는 어딘가가 있을까 앓는 듯했고, 의사의 진단은 그걸 꿰뚫은 듯 쉽고 명쾌했다.

“산책하며 볕도 쬐세요. 집에서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요. 다 스트레스야 스트레스.” 

현대인 주제에 이정도 가지고 병원에 온 게 죄라도 된다는 말투였다. 나는 의사에게 눈을 흘기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없었다. ‘아저씨, 너는 잘 지원 받고, 잘 배웠고, 거절 따위 당해본 적 없지?’ 속으로 그를 씹었다. ‘열폭’ 하면서도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열심히 먹었다. 마음이 아플 때 진통제가 실제로 도움이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내심 의사가 돌팔이고 나에게 잘못된 약을 처방해줘서 내가 더 아프길, 의사가 내게 미안하다고 석고대죄를 할 일이 생기길 바랐다. 타의에 의해 멈춰있어야 하는 상황이, 사과와 위로를 듣는 상황이 오길 바랐다. 그러긴커녕 나는 멀쩡해졌다. 약발 한번 더럽게 잘 받는 몸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을 견뎌야 하는 시기가 왔다. 아프다고 미뤄둔 만큼 더 무거워진 일상이.

그해 여름은 치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
그해 여름은 치가 떨릴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 척 몇 명의 남자를 아무렇게나 만났다. 무거운 일상을 견디는 데 사랑을 답처럼 여겼지만, 사실은 그냥 나를 원하는 ‘어딘가’가 필요했음을 그렇게 포장했는지 모른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이미 번듯한 직장이 있으면서도 나같이 그랬던 거 같다. 몇 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이름마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나 몰래 머릿속 그들을 치대고 치대다 한 덩어리로 대충 뭉개놓기라도 한 듯 기억 대부분이 곤죽이 되어버린데다, 이 정도로 흐린 기억이 노화 때문인지 중요도 때문인지 조금 헷갈릴 뿐 나란 사람은 죄책감조차 없는 것이다. 딱히 멀쩡한 놈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정말 없구나, 했던 진심어린 감탄만 또렷하다. 다만, 몇몇은 특징으로나마 뇌리에 남아있다. 버리고 싶은 그 기억은 20대 후반 내가 사랑에서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자
그래서 열심히 사는 척 몇 명의 남자를 아무렇게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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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23″]‘스쿼트’[/dropcap]는 당시에 뜨는 콘텐츠 회사에 다녔다. 그가 내 엉덩이가 예쁘다고 놀라워하던 날 나는 조금 우쭐해져 자기 전 스쿼트를 20회 정도 하고 잤다. 그게 둘 사이 존재했던 가장 큰 노력이었다. 스쿼트의 문화 취향은 그럴 듯 했고, 나는 영화나 책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가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괜찮은 남자는 영화와 책에 대한 취향과 상관없이 그냥 애초에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심지어 스쿼트는 취향을 과시하고 권유하다 못해 내가 떠오른다며 목수정 책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막 만날 만큼 무기력했다거나,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는 것이 확률 싸움이라는 걸 다시 인지하게 만들었다는 걸 제외하곤 내 인생에서 어떤 중요도도 갖지 않았는데, 한 마디로 까먹어버리기 충분한 사람이었다.

다만, 스쿼트 입장에서는 내 엉덩이가 잊히질 않는지 쌩뚱 맞은 타이밍에 자꾸 연락을 해서 자신을 내 기억에 억지로 남겼다. 그게 썩 유쾌하진 않아서, 나는 스쿼트가 문자라도 보낼 때면 그가 항문 소양증이라도 걸려 엉덩이를 긁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길 기도하곤 했다.

스쿼트
그가 내 엉덩이가 예쁘다고 놀라워하던 날 나는 조금 우쭐해져 자기 전 스쿼트를 20회 정도 하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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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23″]‘예비신랑’[/dropcap]은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과 우직함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유럽여행 민박집에서 내게 반했다던 그는 꾸준하게 연락했다. 한국에서 처음 만난 날, 그는 모를테지만,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급똥’으로 창백해진 채 핑계를 대고 황급히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두 번째 본 다음부터 예비신랑은 나와 곧장 결혼을 생각한 거 같았다. 그는 목디스크 증상이 심해 빌빌거리는 나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값비싼 마사지 샵으로 데려가거나, 양은 찔끔 주고 돈은 많이 받는 곳에 앉혀놓고 밥을 먹였다. 가족이야기를 하고 결혼과 꿈을 말했다.

참 다정했고 돈도 많고 듬직한 남자였는데, 글쎄, 단 한 번도 내 글을 읽지 않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나는 상대방이 내 글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내 초능력에 따르면, 그는 내가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연락을 줄이자 예비신랑은 몇 달 안지나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

이런 말은 뭐하지만, 신부는 묘하게 나와 닮아있었는데, 예비신랑이 나를 잊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여리여리한 이미지를 선호했고 당시 그녀도 나도 그런 이미지였다는 말이다. 예비신랑은 내가 아닌 그런 누구와도 결혼할 사람이었다.

신랑 남친 남자
‘예비신랑’은 참 다정했고, 돈도 많고, 듬직한 남자였는데, 글쎄, 단 한 번도 내 글을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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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이 근처 살아.” 

단연코 [dropcap font=”arial” fontsize=”23″]‘오빠이즈’[/dropcap]의 기억은 독보적이다. 오빠이즈는 정말 ‘오빠는’ 거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저렇게 내 서식지 근처에 산다고 뻥을 쳤고, 훨씬 멀리 잘 사는 동네에 사는 주제에 그런 척까지 해가며 나를 만나려던 게 기특해 시작된 만남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오빠이즈같이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남아있었는데, 왜냐면 내가 그런 회사와 그런 사회에 대한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오빠이즈는 매너 있었고, 선도 넘지 않았으며, 나름 괜찮은 감각의 소지자였다. 더해 그는 결혼하기 괜찮은 남자로 보였고, 그걸 은연 중 그놈의 ‘오빠는’, 하며 어필하곤 했다.

마침 나는 결혼을 하고 싶고 말고를 떠나, 결혼하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결혼하기 좋은 남자’는 똥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터 같았다. 그리해 나는 그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미래에 대한 그의 시각을 조심스레 떠보곤 했다.

반포의 한 카페에 앉아 떠들던 날도 그랬다. 오빠이즈는 미래에 두 명 정도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신기한 게 그의 아이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는데 그 곁에 내가 있을 거란 상상은 영 쉽지 않았다. 상상력이 후달리는군,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아래를 찢는 건 무섭다고 말했다. 오빠이즈는 자기 누나도 애 둘 낳고 멀쩡하다고,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애 낳다 죽지는 않는다고 젠틀하게 답했다. 그 말을 하는 낯이 해사했다.[footnote]해사하다: 얼굴이 희고 곱다랗다.[/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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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의학이 발달해 애 낳다 죽지는 않는다고 젠틀하게 말하는 그 낯이 해사했다.

‘오, 네놈 고추도 한번 찢어보고 그런 소릴해보시지! 죽지는 않을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 이렇게 말하고 그때 끝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선 오빠이즈는 치밀할 정도로 선을 넘지 않았는데, 한마디로 나에게 내 애 둘을 낳아줘, 라고 말하거나 암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암시나 강요도 불쾌했겠지만, 그런 암시가 아예 없는 것도 설명하기 어렵게 불쾌했다.

그와 나는 미래를 이야기할 때마다 서로가 그 미래에서 삭제된 그림을 묘사하는 것처럼 말하곤 했고, 내가 저렇게 말하는 건 나 혼자 선을 넘어버리는 일이자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럴 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애 비슷한 감각이 필요할 만큼은 공허해서, 그렇게 그어둔 선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 만남이 지속되었다. 나로선 살면서 처음 겪는 방식의 만남이었다.

흔한 말다툼 한번 없이 한 8주가량 만났나. 데이트는 기이하고 꾸준하고 평화롭게 이어졌다. 맛있는 걸 먹고, 유명한 곳을 구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번은 오빠이즈와 들렀던 모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함께 탄 중년 커플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에게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뭐라도 내 맘대로 하고 싶었지만,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는 불만 상태에 줄곧 머물렀던 거 같다.

중년의 남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고, 나는 좀 온순해져 그들의 신발로 눈길을 돌렸다. 투박한 갈색 등산화와 생채기 난 검정 에나멜 구두가 거의 틈 없이 붙어있었다. 전혀 다른 재질의 두 신발은 잘 어울렸다. 오빠이즈의 신발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내 신발과 그의 신발은 일정 거리를 준수하는 법이라도 있는 듯 항상 예의발랐다.

엘리베이터
모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함께 탄 중년 커플을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중년 커플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남자 곁에 꼭 붙은 여자가 민망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들이 부러웠다. 나오던 모텔에서 아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날따라 절망스럽, 아니 절망조차 하지 않았다.

어색함도 두려움도 없던 상태는 용기나 뻔뻔함이 아닌 무의미에 가까웠는데, 스스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던 나머지 나는 어쩐지 내가 망가졌다고 느꼈다. 오빠이즈도 타인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였는데, 그 타인엔 나도 포함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차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의 차에 들어앉았다. 운전하는 오빠이즈의 좋은 시계가 선득하게 빛이 났다. 승차감 참 좋았다. 길가에 울퉁불퉁함 같은 건 없다는 듯 매끄러이 흘러가는 값비싼 차 속에서, 나는 이렇게 다 좋은 식으로 어디론가 흘러가게 둔다면 흘려버린 나를 영영 되찾지 못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빠 나 사랑해요? 난 아닌데 우리 왜 만나지?” 

그 주말 나는 처음이자 충동적으로 제동을 걸었고, 저런 낯간지러운 질문으로도 관계는 끝났다. 아는 척을 좋아하고, 주절주절 말 많던 오빠이즈는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이 와장창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을 하고 관계를 짓밟은 용기 있는 나 자신을 어쩐지 뿌듯하게 느끼며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저녁에 전화를 건 오빠이즈는 특유의 매너를 발휘해 말했다. 오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지은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겠지. 그는 끝까지 오빠는, 을 고수했고, 나는 별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오빠이즈와 만나던 시기 모든 건 정말로 매너 그 자체였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비로소 누군가를 애정하던 내 마음이란 단 한 번도 추잡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선을 넘는 건 선을 넘지 않는 것만큼 중요했다. 젠틀한 오빠이즈는 나를 비둘기 똥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스쿼트는 질척거렸고, 예비신랑은 적극적으로 구애했지만, 오빠이즈는 질척거리지도 구애하지도 않았다. 나도 그랬다.

그치만, ‘쌤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8주가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한 내 인생 최초의 만남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전까지 만남엔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있었을지언정 사랑은 있거나, 혹은 함량 미달의 끌림 같이 뭐라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서로 빠르게 손절했다. 나든 상대든 어느 쪽은 사랑 중이거나 제 애정에 취하거나 구리거나 냉정하거나 끊어내거나 했다.

그런 것에 어느덧 익숙해진 이십 대 후반에, 나와 한 남자는 사랑 없이도 매너 있게 8주나 만난 것이었다. 매끄러운 나머지 그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는 만남이었고, 아무것도 없는데도 지속된 만남이었다. 새롭고 공허한 방식의 만남이 내 세상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어떤 이들이 위협을 섞어 예언하듯, 이십대가 끝나가며 내가 가진 정말로 중요한 무엇이 끝나버렸거나 스러져가는 거 같았다.

그래서 한번 또 아프고야 말았다. 뭐라도 무너뜨리고 싶었는지 어딘가 자꾸 무너졌다. 손톱이 부러지고 잇몸이 줄곧 부었다. 이를 닦고 늘 피를 뱉었다. 혓바늘이 잔뜩 돋은 혀로 입안을 핥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 미끄럼틀에서나 날법한 맛이 났다. 그 위로 말도 식욕도 미끄러져서, 나는 놀이터의 죽은 모래처럼 가지런하게 누워 무엇에라도 짓밟히길 기다렸다. 어떤 결벽증 환자가 내 안을 남김없이 청소하고 사라진 거 같았다.

나는 놀이터의 죽은 모래처럼
나는 놀이터의 죽은 모래처럼 가지런하게 누워 무엇에라도 짓밟히길 기다렸다.

나는 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한 무능 속으로 발을 디뎠을까 두려웠다. 다시는 추잡하게 굴 일도, 추잡함을 볼 일도 없을까 겁이 났다. 작은 일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듯, 위험도 모험도 없을 거라는 듯, 내가 그어놓은 견고한 선이 영원히 나를 보호할 것만 같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오빠이즈는 그 가능성을 최초로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거야 말로 그가 곤죽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사랑과 멀리 떨어져 보고서야 정돈된 나의 무능보다 무능한 사랑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질척거리고 추잡하고 손쓸 도리가 없어도 그 편이 나은 것이다.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그 전과 비슷한 약을 주었지만, 낫는 데는 전보다 더 오래 걸렸다. 내 몸은 자의로 무언가를 부수고 있었다.

그해 가을, 나는 무능해지지 않기 위해 온 몸으로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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