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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간 붙잡고 있던 홍콩 관련 논문이 끝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홍콩 민주화 시위도 안타까운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오늘까지 홍콩에 있다가 나오신 선배님이 홍콩 학생들의 시위가 목적 없는 ‘아나키'(무정부상태)처럼 느껴졌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그 말이 가장 실제에 가까운 표현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자발적인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위.

 

많은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적 의사표현의 방법인 듯 하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촉발된 최초의 촛불시위에서도 기존의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된 ‘여중생 범대위’가 과도하게 개입하여 이 이슈를 ‘미군 철수’로 연계시키려 한다고 강한 비판이 일었고, 끝내 연말에 두 개의 시위가 분리되는 사태로까지 갔다. 재작년 탄핵 시위에서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강력한 시위 주도 ‘세력’이 두드러지게 전면에 나서지 않은, 못한 것은 2002년부터 이어진 약 네 차례의 촛불시위를 통해 체득한 대중 전략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행위’로서 시위가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려면 조직과 목표 설정, 그리고 전략적 선택이 필수적이다. 홍콩에서 2012년 교과서 반대 시위를 계기로 구성된 대학생 단체인 홍콩전상학생연회(학련)과 중고등학생 단체인 학민사조(조슈아 웡이 이끌었던, 당시엔 오히려 학련보다 더 핵심에 있었던)가 힘을 발휘한 것이 2014년 우산혁명이었다.

당시 일반인, 지식인, 교수를 중심으로 ‘Occupy Central’ 운동도 뒤늦게 벌어지지만, 동시기에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를 흉내낸 방식이나 시위의 공식 명칭을 ‘Love & Peace’로 한 것이나 애초에 체계적 반체제 운동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라서 세 세력들 중 제일 먼저 깃발을 내리고 주동자들이 당국에 자수하는 것으로 끝났다. 현재 홍콩 시위에서 중장년층의 지식인, 진보 세력들이 낄 자리가 없게 된 이유다.

홍콩의 우산 혁명 (2014)
홍콩의 우산 혁명 (2014)

우산혁명 79일의 싸움에서 가장 늦게까지 버틴 것이 학민사조였다. 그리고 이들은 2019년 홍콩 시위에서 가장 먼저 일어섰다. 2014년 당시 15~16세의 중고등학생들이었으니 지금 대략 대학생 정도의 세대다. 문제는 조슈아 웡을 필두로 한 학민사조 역시 대단히 느슨한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조슈아 웡이 부각되기는 했으나 그런 조직화가 시위의 순수성을 저해한다는 두려움으로 체계적인 조직이나 의사 결정 조직, 행동과 지원 조직 등이 부재한 의기만 충천한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우산 혁명 때도 명확한 정치적 목표나 돌파전략을 수립하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다.

이번 홍콩 시위 역시 마찬가지다. 뚜렷한 요구 조건을 정리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던 시위대는 최근에서야 5대 요구조건을 정리하여 손가락 다섯 개를 펴는 행동으로 통일하고 있으나 어느 하나도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온전히 들어주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조항들이다. 정치전략으로 보자면 홍콩행정장관을 선출하는 대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시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친중파를 대거 낙선시키고, 민주파 위원들을 대거 당선시키는 단기 전략과 지리멸렬한 민주파 위원들을 정당으로 묶어내어 대만의 국민당 vs 민진당 구도처럼 친중파 vs 민주파의 대립구도로 정계를 개편하여 자치의 여지를 조금씩 확장해나가는 장기 전략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몇 달 간의 시위에서도 그런 전략은 체계적으로 수립, 시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공공도로와 시설을 점거, 파괴하는 ‘여명 행동’으로 학생 시위대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있다.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범죄자를 홍콩에서 중국 대륙 등으로 송환할 수 있게 한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 시민불복종 운동인 2014년의 '우산 혁명'의 규모를 뛰어 넘는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 사진은 2019. 4. 28. 모습 (출처: etan liam, CC BY ND) https://flic.kr/p/2ekbLwP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범죄자를 홍콩에서 중국 대륙 등으로 송환할 수 있게 한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 시민불복종 운동인 2014년의 ‘우산 혁명’의 규모를 뛰어 넘는 홍콩 역사상 최대 시위. 사진은 2019. 4. 28. 모습 (출처: etan liam, CC BY ND)

그런 행동의 근저에는, 단지 ‘중앙 조직의 부재’만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젊은이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 구도의 재편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실업, 열악한 주거, 나고 자라며 계속 써왔던 광동어를 한순간에 제2외국어로 만들어버린 중국 본토인들의 쓰나미 같은 홍콩 점령 같은 총체적으로 ‘거지 같은 상황의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슬로건이 ‘시대혁명’, 즉 ‘우리 세대의 혁명’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그들의 생존과 꿈을 위한 혁명인 것이다. 그리고 기성세대와 중국 정부는 그들에게 쓰라린 현실을 최루탄으로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내가 홍콩 시위의 시작 지점에서부터 함부로 지지와 응원을 보내지 못했던 이유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려는 사람의 용기를 ‘노력하면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힘내라’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다. 물론 세상의 의미있는 변화는 그런 용감한 이들이 짚불처럼 몸을 사르고 살라 재가 되어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저 소심한 나는, 보도블록을 아스팔트에 내리쳐 투석용 돌을 만드는 저 학생이,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며 화염병에 휘발유를 정성껏 담는 저 학생이, 고무줄로 커다란 새총을 만들고 ‘투석기’라며 자랑스럽게 웃는 저 학생이 그저 살아있기만을, 무사히 살아 집으로 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저 살아남는 것,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2019년 6월 16일 현지 시각 19시 40분쯤 시위대 중 한 명이 호흡 곤란으로 탈진했다는 응급 신고가 접수돼 앰뷸런스가 해당 시민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장면. 2019년 6월 16일 홍콩에서 일어난 '모세의 기적'
2019년 6월 16일 현지 시각 19시 40분쯤 시위대 중 한 명이 호흡 곤란으로 탈진했다는 응급 신고가 접수돼 앰뷸런스가 해당 시민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장면. 2019년 6월 16일 홍콩에서 일어난 ‘모세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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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싸움: 정체성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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