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은 2019년 9월 30일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 글 속에서 흐르는 시간의 열기가 지금 흐르는 시간의 온도와 다르다고 느끼는 예민한 독자가 계시다면, 그건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이 50일쯤 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 가족을 둘러싼 검찰 수사와 이에 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럼에도 정말 치열했던 그 ‘사태’의 한복판에서 한 걸음 정도는 물러서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확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이 주변을 더불어 둘러볼 수 있는 그 마음의 자리를 조금 더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편집자) [/box]
검찰 개혁 혹은 조국 수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는 찬반을 떠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런 사안에 이런 인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일이었다. 다음주엔 더 늘어날 기세로 보인다.
광장에서 지워진 사람들
삼성의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고공농성 중인 김용희 씨, 직접 고용을 쟁취하기 위해 농성 중인 톨게이트의 노동자들 등 작은 시위자들을 조명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비탄과 비판, 분노와 자책의 목소리였다.
“이 규모의 인파가 강남역 사거리에 모였다면, 삼성은 진작에 김용희 씨에게 사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정치적 쟁점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이들은 홀로 고공에서 산 채로 미이라가 되고 있거나, 건물에 갇혀서 씻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다. 광장으로 나오지조차 못한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광장마저 침탈한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삼성 해고 노동자나, 성소수자, 톨게이트 노동자, 기후변화 문제에는 이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은 검찰개혁이 더 중요하고,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해결해야 한다지만, 최소한 내가 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30여 년 동안 저 문제에 당사자 조직 아닌 시민들이 이만큼 몰려든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그 문제의 당사자나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고, 서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나중으로 밀리는 사람, 나중으로 밀리는 문제는 대체 언제 해결하나. 그 우선 순위는 대체 누가 정하고, 이 순위는 누구에게 더 이롭나. 이런 얘기를 하면 대개 운동권들이 잘하지 못해서라 한다. 물론 운동권들의 문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안/덜 가지는 시민/국민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 그들의 무관심과 한쪽으로만 쏠린 관심을 지적하는 일은 잘못인가. 이 누적된 불균형에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이 또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서초동 일대를 해방구로 만들었던 이들에게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귀를 열어두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계속 나중으로 밀리는 사람들
광장을 침탈당한 사람들
수많은 인파의 관심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이야기는 묘하게도 역사상 광장의 힘이 가장 찬란했던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내 자식이 저런 일을 하면 안 된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사상 최대의 노동운동이었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두 역사적인 광장에는 명과 암이 공존했고, 그 암의 하나가 ‘3D 저임금 하청 노동자’의 양산이었다. 이 역작용은 처음에 작은 사안으로 취급되었다. 언론 등의 지적이 있었지만, 이렇다 할 대중의 관심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30여 년 전 (나와 내 부모를 포함한) 대중은 노동 약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관심의 정체는 하지만 이런 방향을 띠고 있었다.
‘내가, 내 자녀가 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노동 약자들의 처우 개선이 어려웠던 것은 대중이 이 사안에 관심을 덜 갖거나, 안 가져서가 아니었다. 노동 약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관심이 너무 컸기 때문에, 노동 약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도리어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를 통계로 보면 노동소득분배율이 정점을 찍고, 중산층 귀속감이 무려 80%에 육박하던 90년대, 사교육비와 대학진학률이 폭증하는 한편, 소폭이긴 하나 분배지표가 악화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성취 속에서, 장시간의 노동시간 하에서, 많은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에 못지 않은 벌이를 하며 국민 다수의 소득과 사교육비가 팽창할 때, 그 한켠에서는 저임금 노동 약자들의 들리지 않는 비명이 점증했던 것이다.
87년 이후 10여 년은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린다.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블루칼라까지 포함하여 국민 다수에게 돌아가던 시기다. 그러나 즐거운 한때는 잠시, IMF 경제위기가 엄습한다. 많은 가정이 고꾸라졌고, 살아남거나 겨우 다시 일어선 이들은 IMF 이전 한국 경제의 황금기 때도 열심이었던 ‘각자도생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벌여나간다.
흔히들 외환 위기의 충격파로 인해 나만 챙기는 한국의 각박한 세태가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대다수가 경제 성장의 이로움을 맛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하던 시절에도 ‘약자로 낙오되지 않기 위한’ 한국식 각자도생은 동일했다.
약자에 대한 무관심, 약자가 되지 않으려는 뜨거운 관심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약자가 되지 않으려는 뜨거운 관심은, 수십 년에 걸쳐 확립된 한국의 생활 양식이며 삶의 규칙이다. 사회적 합의라고 칭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합의는 세대를 초월한다. 청년 세대 일각으로부터 제기되고 보수언론 등이 확대재생산하는 ‘공정’의 화두는 ‘약자의 처우를 끌어올리자’에 방점이 찍혀 있지 않다. 약자의 여건은 그대로 둔 채 ‘약자 탈출의 과정을 공정하게 하라’는 처음부터 모순적인 공정을 추구한다. 탈출하지 못한 약자들의 문제는 숱한 청년들에게 무관심의 영역이다.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서초동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소외된 약자들의 문제에는 그만한 행동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서운해하거나 매섭게 질책하는 목소리가 주로 왼쪽 성향의 이들로부터 터져 나왔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지 않은 문제제기다. 하지만 어딘가 헛헛함이 느껴진다.
약자에게는 무관심하기로, ‘공정하게’ 경쟁해서 약자가 되지 않는 사안에만 열망을 갖기로, 약자에게는 이따금만 측은지심을 표하기로, 한국인 대다수가 사회적 합의를 맺어왔다. 정치적 성향과 세대를 불문하여 확립된 규칙이다. 실용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어리석은 합의와 규칙이지만,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다들 이에 따라왔다.
서초동에 집결한 대규모 인파는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합의와 규칙을 충실히 이행해온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이들은 철탑 위에 갇힌 김용희 씨에게 가지 않았고, 도처에서 새어 나오는 다른 약자들의 외침에도 함께하지 않았다.
검찰 개혁 시위대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확고한 사회적 합의에 근거를 둔 행동이었다. 이 시위대의 열정이 소외된 약자들에게도 미치면 좋겠다고 나 역시 바라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비난의 화살을 쏠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 이들만을 손가락질하기엔 거의 모두에게 해당되는 수십 년 된 관성의 문제이고, 질타보다는 이렇게 해야 득이 된다는 ‘미끼’의 제시가 변화의 동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희망버스의 쓸쓸한 추억
시위 인파가 김용희 씨를 비롯한 약자들과 연대한다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단편적인 발상이다. 한국에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많은 약자들의 투쟁이 있다. 연대적 운동이 늘어나야 함은 당연하지만, 물리적 조건상 운동이라는 해법으로 다가갈 수 없는 수많은 사안이 산적해 있다.
노동 약자들의 처우를 전폭적으로 개선시킨 노동운동은 서유럽과 북유럽의 산별노조 연대임금제이다. 이러한 방식의 노동운동이 한국처럼 막혀 있는 상태에서,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향하지 않는 별건의 시민운동을 책망하는 것은 실용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산별노조 연대임금제가 불가한 상황에서 간헐적인 시민운동의 무력함을 잘 보여준 일이 과거 ‘희망버스’다. 우연한 계기로 불특정의 시민들이 노동쟁의 사안에 연대적 운동을 실천하였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노동 여건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희망버스가 일단락되고 ‘희망텐트’를 방방곡곡에 치자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대중의 외면 속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그라들었다.
검찰 개혁 시위대가 노동 약자들의 사안에도 연대적으로 나서라고 비판할 수 있는 일이다. 김용희 씨에게만이라도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내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연대운동은 효용성이 떨어지고 지속가능성도 없다. 검찰개혁 시위대가 이런 연대운동을 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이야기는 비판을 위한 비판의 성격이 다분하다.
‘연대’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 사회
일찍이 아담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감정 이입하는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 신정완 교수가 말하듯 타인의 불행이나 행복에 대한 공감은 연대의식의 원초적인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감 능력만으로는 연대의 발화와 유지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대의식이 가장 높은 사회인 북유럽을 들여다보면, 그네들이 착해 빠져서 남다른 연대사회가 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연대가 내게도 이득이 된다’는 증거가 뚜렷할 때 구성원 간 연대가 굳건하게 자리잡는다.
한국에서는 타인과 연대하는 행위가 내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지, 제도적 차원의 사회연대를 구축하면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지 학습하는 과정이 전무했다. 대신에 누군가의 이기성을 힐난하는 목소리만 나부꼈다.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접근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공감과 내가 얻을 이득에 대한 기대가 합쳐져야 강한 연대가 촉발될 수 있다.
한국은 지난 시간 거의 전 국민이 약자를 소외시켜온 사회다. 약자가 되면 소외당할 것을 잘 알기에, 한국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과 자녀의 경쟁에 몰두했다. 나는 이런 환경이 적잖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 상처를 입에 달고 살진 않아도, 치유의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대의 구축이 가져다주는 갖가지 혜택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상처의 치유다.
앞으로는 왜 연대하지 않느냐는 질책이나 손가락질 대신, 연대로부터 얻는 기쁨과 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이것은 누군가를 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알아야 할 것도 더 많고, 과장 없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늘어날 때 더 좋은 사회로 성큼 갈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