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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열매

내가 유치원생 무렵, 부모님은 우리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아파트 상가에서 치킨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예전 아파트들은 지금처럼 평지가 아닌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유치원이 끝나면 혼자서 버스를 타고 아파트 입구의 정류장에 내려 길다란 언덕길을 올랐다.

유치원생에게는 너무도 가파르고 길었던 언덕길을 오르면서 나는 어디까지 왔나 가늠하는 기준을 쓰레기통으로 삼곤 했다. 언덕길 초입에서 길이 끝나는 부분까지 철로 된 네모난 은색 쓰레기통이 세 개 있었는데, 아직 한 개밖에 안 지났네, 두 개째니까 이제 절반은 왔구나, 이야 세번째 쓰레기통이다, 거의 다 왔다,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쓰레기통을 지나치고 나면 울창한 나무들이 등장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조경이랄 것이 없고 그저 많이 심는 것이 최고였던 시절이었는지, 아파트 이 곳 저 곳 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잎이 울창했다. 나무 밑에 멋모르고 서 있다가 어깨에 송충이가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가을이 되면 주렁주렁 정체불명의 열매들이 열렸다. 새빨갛고 탐스러운 열매들.

빨간 열매

하루는 언덕길을 올라 부모님의 가게로 향하는 길에 나보다 한두살 많았던 아이들이 빨간 열매를 전투적으로 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몇 몇은 나무 위까지 올라가 가지를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밑에 있던 아이들은 땅에 떨어진 열매를 동그란 츄파춥스 통에 소중하게 담았다. 갑자기 나도 빨간 열매가 가지고 싶어졌다. 야트막한 가지에 매달린 열매에 손을 뻗으니 대장격인 남자아이가 다가와 밀치며 말했다.

“안돼! 다 우리꺼야!” 

상가로 돌아가 당시 같이 놀던 아이들을 꼬드겨 남아 있는 열매를 찾아 아파트 안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은 누군가 따간 후였고, 남은 것들은 너무 높거나 멀리 있었다. 절망한 우리들은 풀이 죽어 터덜터덜 돌아섰다. 그러다 정말 기적같이 아직 손을 타지 않은, 심지어 열매가 아주 크고 무성하게 달려있는 나무 몇 그루를 발견한 순간에는 다들 뛸 듯이 기뻐했다. 신나서 작업에 착수하려는 바로 그 때, 아까 마주쳤던 큰 아이들이 나타났다. 털던 나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열매를 찾아 이 쪽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 이후는 예상대로이다. 우리가 먼저 왔다고 소유권을 주장해도 할 수 없었다. 큰 아이들은 아파트 열매는 다 저희들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같이 있던 친구 중 한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어느새 모두 시들해져 열매 따위 필요 없다며 다른 놀이를 한다고 가버렸다.

놀이터

그러나 나는 도무지 빨간 열매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큰 아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파트 열매가 다 자기들 것이라니, 너무도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키가 10cm도 넘게 차이 나던 아이들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는 덤벼서 싸우거나 그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는 대신, 몰래 숨어서 지켜봤다. 아이들은 땅으로 추락시킨 빨간 열매를 아까처럼 차곡차곡 통에 모았다. 그러다 해가 어스름해지자 나무 밑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후에 거기 넣고 묻었다.

나는 그 나무를 잘 보아두었다가 저녁을 먹은 후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려서 다시 보러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밑동을 파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동시에 묘한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사이로 은빛의 반짝거리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츄파춥스 뚜껑이었다. 나는 흥분에 차서 가느다란 손잡이를 잡고 낑낑대며 묵직한 통을 끌어냈다.

뚜껑을 열자 빨간 열매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보석같았던 열매는 이제 보니 그냥 지저분하고 군데 군데 짓무른 나무 열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의 흥분은 어느새 시들해지고 없었다. 이제 어쩌지? 하는 마음만이 남았다. 그건 심지어 먹을 수도 없없다. 그대로 들고가면 엄마에게 그런 걸 뭐하러 가져왔느냐고 타박을 들을 것이 뻔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이 순식간에 처치 곤란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있던 자리에 그대로 다시 두려니 낮에 윽박을 질러대던 큰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한 쪽 손에 통을 들고 절뚝거리며 아파트 안을 빙빙 돌다가, 한 나무를 골라 밑동을 파서 다시 묻었다. 혹시 몰라 주변에 있던 돌멩이로 조그맣게 표시를 해두었다. 돌아온 나를 보고 부모님은 이 밤에 뭘 하고 왔길래 꼴이 그러냐며 혀를 끌끌 찼다.

추파춥스

다음 날 유치원이 끝나 여느때처럼 버스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왔는데 멀리서 어제 보았던 대장 남자아이가 달려오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야! 너! 너지! 너가 그랬지!”

“뭐가?”

“너가 열매 가져갔잖아! 죽을래?”

“아니거든?”

“이게??? 너 말고 누가 있어! 너 맞잖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열매 없어진 걸 왜 내 탓을 해? 증거 있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앙칼지게 말했다. 남자아이는 몇 번 주먹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아빠에게 이를거라는 내 말을 듣고선 물러섰다. 나는 남자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게로 향했다. 가슴이 몹시 쿵쾅거렸다. 그 날 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열매를 찾으러 가봤다. 한참을 헤매었으나 결국 끝까지 찾지 못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윽박을 지르고 소유권을 다투며 그토록 열심히 모았던 열매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자라면서 열매는 다른 것들로 바뀌었다. 가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으나 막상 손에 들어오면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 세상에는 무수하게 많았다. 남들이 가지고 싶어 하므로 가지고 싶어지는 것들이. 남들이 가지지 못해야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들이. 그중 많은 것이 빨간 열매처럼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오늘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다 빨간 열매가 달린 조그마한 나무를 보았다. 어릴 적 땄던 그 열매는 아니지만. 탐스러운 빨간 열매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예쁘게 달려 있었다. 요즘은 아무도 열매를 가지고 싸우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놀이터에서 무리지어 노는 아이들 자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 열매 있다. 예쁘지?” 

그렇게 말하니 아이는 관심을 보이며 다가섰다. 조심스레 열매를 만져보다가 하나를 따서 내 손바닥에 놓아주었다.

ⓒ 한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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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한승혜
초대필자. 에세이스트

다양한 것을 보고 읽고 쓰는 사람. 서울신문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블로그에 비정기적으로 서평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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