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단어가 있다. 친구. 누구를 ‘친구’라 하고 누구를 ‘그냥 아는 아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친구라 여기지 않는 그냥 아는 애가 나를 친구라 청할 때는 당황스러웠다.
반면, 졸업과 동시에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친구’들과 멀어질 때, 그리하여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어 시간이 흐를수록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질 때, 그러다 간신히 몇 년에 한 번 만나 하는 얘기들이 마음에 닿지 않고 겉돌기만 할 때는 마음이 아주 허전하고 불편했다.
과거, 내가 가지고 있었던 친구의 기준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미워하고 사랑하며 시간을 함께 견디어 내는 것만큼 관계를 단단히 해 주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믿음엔 크게 변함이 없다. 단지, 이제는 ‘친구’와 ‘그냥 아는 애’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싶어 하던 그 시절의 엄숙함을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관계를 규정된 틀 속에 가두려는 것이 곧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겠다.
그러나 친구의 정의를 해체하는 것과 구체적인 인물 A를 그리고 B를 놓는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와 A와 B를 묶어줄 끈이 사라져 버린다는 느낌은 자유롭지만, 또 한편 슬프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흐르도록 내버려 두려 한다. 그것이 서로 마음의 짐을 덜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래된 노트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정의 최상급, 친구에게 내가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어도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은 것.”
한순간, 어떤 느낌에 사로잡혀 휘갈겼던 것 같다. 그때의 순간이 이제는 일상이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A에게도 B에게도 친구라 불리지 않아도 괜찮다. 나에게 그들 또한 친구가 아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