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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 언어, 그 표현을 쓰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한다.

우리가 국가에 세금을 낼 때는 ‘납입(納入)’이라 한다. 반면 국가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면 그때는 ‘지급(支給)’이라 한다. 국가뿐만 아니다. 예컨대 근로복지공단도 우리가 고용보험료를 낼 때는 납입이고, 공단이 우리한테 실업급여를 줄 때는 지급이다.

또 학부모가 학교에 등록금을 낼 때는 납입·납부한다고 하고 거꾸로 학교에서 학생한테 장학금을 줄 때는 지급한다고 한다. 우리가 다달이 받는 고지서에는 납입·납부·납세 등 ‘납’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없다.

납, 들도록 시킨다


‘납(納)’이라는 한자는 ‘들이다’로 풀이된다. 이 낱말을 의미에 따라 쪼개면 ‘들+이+다’가 된다. ‘들’은 들어간다(入)는 말이고 ‘이’는 다른 사람더러 무엇을 하도록 시키는 이른바 사역형(使役形) 어미(語尾)이다.

‘들이다’는 ‘(무엇이) 들어오도록 (누구에게) 시킨다는 말이다. 옛날도 지금도 힘 있고 높은 사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더러 움직이도록 한다. 그들은 세금을 받지 않고 세금이 자기네한테 들어오도록 힘없고 낮은 백성들에게 시켰다. 납세, 납품, 상납, 공납(公納), 공납(貢納), 헌납 등 하나 같이 높고 크고 힘센 존재가 대상이다.

급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급(給)은 준다는 뜻이다. 높은 존재가 낮은 존재에게 하거나 최소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쓰인다. 공급, 급여, 급식, 배급, 하도급, 환급, 성과급 등. 그래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급식을 하고 하청은 원청업체한테 납품을 한다.

납과 급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단어가 있다. 요즘 새롭게 쓰이기 시작한 납식(納食)이 그것이다. 구내식당이 없는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공단에 가면 ‘회사 납식’ 글자를 볼 수 있다. 납식 말고 급식이라 하면 아무래도 불손할 것 같아 삼가는 기색이 완연하다.

이처럼 같은 밥이라도 식당에서 회사에 대는 경우에는 급식이 아닌 납식이 된다. 이는 한자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도 납과 급의 차이를 일상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요즘 새롭게 쓰이는 ‘납식’이라는 표현. 사진은 김훤주. 강조 표시는 편집주.

나는 세금을 ‘지급’하고 싶다


나는 이런 글과 말을 마주할 때마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거기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는 차별과 구분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영어는 용례가 어떤가 싶어 살펴봤더니 그런 구분이 없었다. 그냥 ‘PAYMENT’ 하나로 끝이었다.

납입·납부라는 낱말에는 국가, 집단, 전체를 우위로 보고 인간은 그 아래 수단 정도로 여기는 시선이 녹아 있다. 하지만 국민은 국가보다 아래가 아니다. 국가와 국민은 서로를 위하는 대등한 관계다. 나는 세금 납입 고지서 말고 세금 지급 고지서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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