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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에 ‘일반적인 사람’은 없어. 다 박람회장에 내놔도 돼.”

“그럼 어머니나 저도 그런 거예요?”

“그렇지, 너도 나도 그런 거지.”

“세상에 ‘평균인 인간’은 없는 거군요!”

졸지에 박람회장 출연 자격을 얻은 아침. 좀 더 내 멋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오늘날은 ‘유형(type)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차이에서 시작해서 혈액형, 성격검사, 애니어그램, MBTI 등 다양한 유형 테스트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일 잘하는 사람들의 OO 가지 특징’, ‘성공한 CEO들의 OO 가지 습관’, ‘내향적인 사람들의 OO 가지 특징’ 등 사람들을 특정한 유형으로 묶고 그 특징을 깔끔한 목록으로 제시하는 포스트가 넘쳐난다.

대부분 ‘재미로 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나오는 이런 컨텐츠들이 정말 재미에 그칠까? 남녀 차이를 그저 재미로 읽는다는 말은 얼마만큼 진실일까? ‘성공한 사람들의 OO 가지 특징’에서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렇게 조금씩 스며드는 생각이 사람들을 대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정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듯 우리의 생각도 조금씩 영향을 받는 건 아닐까?

섣부른 유형화에는 위험이 따른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형은 과거의 나로 지금의 나를 판단한다. ‘전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나간 시간의 퇴적물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는 미래와 과거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변화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몇 개의 라벨(label)로 손쉽게 분류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까지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몇 개의 꼬리표만으로 우리는 인간에 관해 쉽게 말해도 괜찮을 걸까?
몇 개의 꼬리표만으로 우리는 ‘한 사람’에 관해 쉽게 말해도 괜찮을 걸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라. 나에게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마라. 이것이 나의 도덕이다. 이것이 내 신분증명서의 원칙이다.”라고 말했다.[footnote][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 이정우 역, 민음사: 2000. 서론 중에서[/footnote]

‘그 사람 이런 타입이야’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일을 접했을 때 ‘어? 그 사람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라고 반응하곤 한다. ‘원래’라는 말에 대해 어떤 주저나 의심도 없이 말이다. 그들은 그저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을 생각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렇지 않나?

그렇다. 정체(正體, identity)는 정체(停滯, stagnation)와 전혀 다르다. 누군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시대는 우상(icon)을 만들기 위해 달려간다. 대개 우상은 이미 만들어 놓은 갖가지 틀에 부합하는 이들이다. 부와 명예, 미와 지식, 스펙과 이력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나는 유형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 즉 우상 파괴자(iconoclast)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형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보는 이들, 단지 몇 개의 범주 안에 사람들을 가두지 않는 이들,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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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4월에 출간된 책 [어머니와 나]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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