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에 대한 많은 오해 중 하나는 이것이 게임이나 360도 영상 같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적합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처음 개발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기 연구자들 중 그 누구도 게임에 쓰일 것을 예상하고 연구하지 않았다. 초기 연구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없는 가상 세계(Virtual World)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 현실을 연구했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을 통해 가상현실의 대중화를 이끌어 내려는 여러 노력들이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 몰리면서 가상현실의 응용 분야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그래도 균형의 추가 완전히 기울기 전 게임이나 360도 영상 같은 콘텐츠를 벗어나 커뮤니케이션 기반 협업 모델에서 가상현실 대중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까지 가상현실에서 강조되지 않았던 커뮤니케이션 기반 서비스들은 물리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간과 거리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처음에 가상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실체화하기 위한 시각 기술로 연구를 시작했던 것처럼 가상 세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새로운 협업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몇몇 서비스를 주목하는 이유다.
페이스북 스페이스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는 오큘러스 커넥트4 행사 모두 발언에서 교통수단이 발전해도 비트가 더 빠른 이동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매일 아침마다 수많은 차들로 꽉 막힌 길을 출근하는 것보다 가상현실에서 회의를 한다면?’ 짧지 않은 출퇴근 거리를 오가는 동안 허비되는 에너지와 시간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이들에게 이 같은 상상은 귀가 솔깃하게 다가올 것이다.
누가 그런 상상을 현실화시킬지 모르지만, 페이스북은 그 꿈을 이뤄주려는 의지를 지닌 기업 중 하나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지난 10월 11일 진행했던 ‘오큘러스 커넥트 4′(Oculus Connect 4) 행사 모두 발언 중 가상 공간에서 직원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물론 이런 회의가 아직까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에 대한 예로 들기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마크 주커버그가 들었던 협업 사례는 실현 불가능한 게 아니다. 페이스북은 이미 이를 응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놨다. 지난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페이스북 스페이스'(Facebook Space)가 바로 그것이다. 페이스북 스페이스는 친구들끼리 카페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듯 오큘러스 리프트를 쓰는 4명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가상 세계의 한 공간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인터넷 브라우저나 모바일 메신저에서 여러 친구들을 불러서 대화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가상 세계 안에 모이는 만큼 문자 대화가 아니라 실제 친구들의 아바타를 통해 말과 음성, 행동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VR 헤드셋을 쓰고 있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가상 공간에 표시할 수는 없으므로 친구들은 모두 3D 아바타로 대체된다. 페이스북의 인공지능이 프로필 사진을 분석해 비슷한 얼굴의 윤곽이나 눈, 코, 입, 머리 모양 등을 유추한 뒤 이용자가 세세한 부분을 조정하면 3D 아바타는 말할 때 입모양을 움직이고 컨트롤러 움직임에 따라 손동작도 그대로 따라한다.
그런데 소통을 위한 가상현실 공간인 페이스북 스페이스가 어떻게 협업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일까? 페이스북 스페이스는 업무용 도구라 말하기 어려운, 그저 친목을 위한 몇 가지 도구가 갖춰져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다.
스페이스에 있는 가상의 테이블에는 셀카봉, 주사위, 액자, 펜, PC를 다룰 수 있는 태블릿, 그리고 라이브 방송을 위한 스마트폰 같은 도구가 있다.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스페이스의 도구들은 원래 그 공간에 모인 이들의 재미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지만, 협업용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
아직 문서 자료를 공유하는 기능은 없지만, 이미지로 준비된 회의 자료를 이용할 수는 있다. 스페이스라는 회의실에 이미지화된 문서를 띄우고 토의하면서 펜으로 메모를 남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회의를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만 보는 것은 아니다. 가상현실을 하지 않더라도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맺어진 사이라면 페이스북 메신저의 화상 통화로 회의를 보거나 간접 참여도 어렵지 않다.
때문에 오큘러스 리프트를 이용하는 이들은 3D 아바타로 참석하고 메신저 이용자는 실제 모습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신기한 풍경도 펼쳐질 수 있다. 중요한 점은 3D 아바타라도 진짜 회의실에 모인 것처럼 다양한 자료를 공유하면서 주제에 대한 토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 대가 다른 곳에 있더라도 이 공간에는 함께 모여 의견을 말할 수 있다.
스페이스의 협업 모델이 꼭 회의 같은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 팔로워를 위한 강의도 도 가능하다. 페이스북 스페이스의 라이브 카메라 도구를 이용해 페이스북 팔로워들에게 실시간으로 방송할 수 있다. 이 때 칠판 이미지를 가져와 배경에 띄운 뒤 펜으로 글을 쓰면서 강의를 하면 진짜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강의를 위한 전용 스튜디오를 만들지 않아도 페이스북 스페이스를 전용 스튜디오처럼 꾸밀 수 있고 PC에 띄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내용을 보완할 수도 있다.
이처럼 페이스북 스페이스는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의 형식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회의실로, 때로는 강의를 위한 스튜디오로 쓸 수 있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카페나 가벼운 놀이터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페이스북 스페이스는 아직 베타 버전이라 특정 목적으로 쓰기에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페이스북이 불편한 부분을 그대로 놔둔 채 베타 딱지를 뗄 것 같지는 않다.
엔비디아의 ‘홀로데크’
페이스북 오큘러스가 가상현실 하드웨어와 서비스 부문에 적극적인 회사라면 엔비디아는 사실감넘치는 가상현실 그래픽 기술을 꾸준히 내놓는 기업이다. 엔비디아는 가상현실 헤드셋의 디스플레이나 렌즈 같은 광학 기술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더 생생한 가상 세계를 표현한다.
엔비디아는 그래픽 효과나 왜곡 없이 표현할 수 있는 표시 기법, 그래픽 프로세서의 부하를 줄이면서 더 질감을 살리는 그래픽 처리 기술 등 가상현실의 모든 그래픽을 처리하는 부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상현실에 최적화된 지포스 GTX 10 같은 그래픽 칩셋은 물론 이를 제대로 쓸 수 있는 VR웍스라는 개발 도구까지 내놨다.
그렇다고 엔비디아가 가상현실 그래픽 처리와 개발자 지원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고급 가상현실을 겨냥한 협업 서비스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래픽 전문가와 디자이너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협업 공간인 엔비디아 홀로데크(Nvidia Holodeck)가 바로 그것이다.
홀로데크는 목적이 분명한 협업 공간이다. 실물 크기로 사실적으로 렌더링된 3D 디자인 모델을 여러 참여자가 함께 보고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 자동차를 예를 들면 프로토타입을 실물로 만들기 전 가상 세계로 먼저 불러온 뒤 관련 엔지니어나 디자이너가 각자 VR 헤드셋을 쓰고 한 자리에 모여 세세한 부분을 검수할 수 있게 해준다.
홀로테크는 단순히 렌더링을 끝낸 3D 모델을 보는 수준이 아니라 모델 내부 부품까지 빠짐 없이 배치하고 재질의 영향과 주변 환경에 따른 변화까지 아울러 확인할 수 있는 디자인 시뮬레이터에 가깝다. 공동 작업자들은 실물 크기로 표현된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안팎을 둘러보는 것은 물론 내부 부품 구성을 살펴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실제 차나 오토바이에 탑승한 상태로 느낌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고, 버튼이나 다이얼 등의 조작도 해볼 수 있다.
엔비디아는 처음 홀로데크를 발표할 때 대당 190만 달러(21억5천만 원)인 코닉세그레제라(Koenigseg gRegera)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에게 디자인 검토를 하게 한 뒤 이들이 어떻게 활용하는지 본 뒤 살펴봤다. 가상현실에 등장한 자동차를 탐험하고 실시간으로 설계 변경을 상의했다. 디자이너는 계기판이나 통풍구, 엔진 부품 등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의견을 나눴고 주간, 야간, 도로 상태, 날씨, 다양한 건물 실내외 등 여러 상황에 따라 조명 구성을 바꿨을 때 창이나 운전석 유리의 반사 수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했다.
렌더링된 실제 수준의 3D 모델을 볼 수 있는 엔비디아 홀로데크는 참여자들이 모델 검토에 지장 이 없도록 실사 렌더링 속도가 매우 빠른 것이 장점이다. 실제 렌더링은 엔비디아 클라우드에서 맡고, 렌더링된 모델을 가상현실에서 보는 것은 참여자 PC 성능에 의존한다. 엔비디아는 코닉세그, 고고로 외에도 미항공우주국(NASA), 글로벌 건축 설계 회사인 KPF 등에 있는 건축가, 제품 디자이너, 콘텐츠 제작자들을 상대로 홀로데크에 대한 비공개 테스트를 진행했고, 10월부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베타 테스트도 시작하는 등 가상현실에서 디자인 중심의 협업을 늘려가고 있다.
가상현실 협업에 적응한 우리의 미래
페이스북 스페이스와 엔비디아 홀로데크의 예를 보면 가상현실 기반 협업 서비스는 단순한 실험 단계를 넘어서 이미 초기 실행 단계에 들어선 상황이다. 물론 아직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완벽한 해법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환경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활용한 효과를 서서히 입증하고 있다.
페이스북 스페이스와 홀로데크의 공통점은 가상현실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한국과 미국, 영국의 디자이너나 엔지니어, 사업가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 한 곳에 모이지 않아도 가상 공간에서 만나 회의를 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다.
비용적인 측면의 장점도 있다. 가상현실 환경 구축 시 초기 비용은 들어가지만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만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가상 세계에 만듦으로써 이동에 따른 손실이나 초기 시제품 제작에 드는 비용 등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실물 공간을 가상 세계 안으로 옮길 때 절감되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장점은 더 클 수 있다.
그렇다고 비용적인 장점만 앞세워 가상현실 기반 협업을 당장 전방위로 도입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가상현실을 활용한 협업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투자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가상현실에서 협업을 위한 서비스와 도구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 같은 특수한 영역, 짧은 회의 수준의 협업을 넘어 가상현실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래도 집에서 헤드셋을 쓰면 가상현실 속 직장에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고 가상현실에 출근한 옆자리 동료를 불러 의견을 나누는 일이 우리 일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상상해보는 것은 재미있지 않은가?
헤드셋만 벗으면 곧바로 퇴근해 아이를 볼 수 있는 상상을 가상현실이라면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만드는 시작이 가상현실 기반 협업 서비스다. 가상현실 속 협업은 가상현실 기반의 소통에 익숙하게 한다. 누군가는 가상현실이라는 기술부터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소통 그 자체가 가상현실에 적응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소통에 기반을 둔 가상현실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는 협업 도구의 등장은 우리의 미래를 바꿀 새로운 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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