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커뮤니케이션 경험의 대체를 시도하는 수많은 장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장치들이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의 대체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MWC 같은 모바일 전시회에서 스마트폰이 매번 이슈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한 우리는 스마트폰에 대한 주목을 멈추지 않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주목도 높은 스마트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전시회가 MWC다. 새로운 스마트폰에 대한 소식이나 스마트폰 제조사 또는 시장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다만 이번 MWC 2017은 강력하고 인상적인 몇몇 아이템으로 인해 스마트폰의 무게감이 이전보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의 발전 동력이 떨어졌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스마트폰 시장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에 나서고 있는 많은 기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 돌아온 노키아와 블랙베리, 다른 길을 걷다
노키아와 블랙베리. 이 두 개의 브랜드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때 휴대폰의 절대 강자와 초기 스마트폰 시장의 선도자로서 그 브랜드 가치는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새롭고 패기 넘치는 젊은 스마트폰 시대에 변화하지 못한 두 브랜드는 뒤로 밀려났고,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잊힐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 부서를 인수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손을 들었고, 블랙베리는 하드웨어 사업을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저울질 끝에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신을 선언했다. 이제 이 두 브랜드는 역사에 이름을 새기고 사라지게 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 두 브랜드가 MWC에 등장했다. 종전 노키아와 블랙베리의 상표를 그대로 단 제품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처지는 예전과 다르다. 말 그대로 브랜드만 돌아왔을 뿐, 그 주인이 돌아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키아의 귀환을 주도한 것은 HMD글로벌. 과거 노키아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을 주축으로 세운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사다. 마이크로소프트 휴대폰 사업부에서 나온 일부 인력도 여기에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지난해 말 마이크로소프트가 갖고 있던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 부문에 대한 자산과 권리를 폭스콘과 나눠서 인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제조 부문을 폭스콘에 매각하는 한편 2024년까지 노키아 브랜드를 쓸 수 있는 권리를 HMD글로벌에 넘겼다. 브랜드만 가졌던 HMD글로벌은 제조 설비를 가진 폭스콘의 자회사와 제휴를 맺고 HMD글로벌-폭스콘 연합군이 됐고, MWC에서 스마트폰 사업 출정식을 열었다.
HMD글로벌-폭스콘 연합은 빈손으로 MWC에 온 게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노키아와 마이크로소프트 부스 사이, 정확하게는 노키아 부스 앞에 제품을 전시했다. 노키아 3, 5, 6 시리즈라 부르는 3개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 노키아 3310이라는 휴대폰이었다.
이 제품들의 특징은 명확하다. 프리미엄 시장 대신 노키아의 브랜드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는 중저가 시장을 목표로 한다. 고성능을 위한 값비싼 부품이나 화려한 디자인 보다 실리적인 접근을 추구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실제 5인치에 2GB 램을 가진 노키아 3는 150달러 미만의 판매가를 책정하고 신흥시장에 주력한다.
블랙베리는 노키아와 정반대다. 블랙베리는 프리미엄 시장을 위한 공략에 동원된다. 블랙베리 브랜드를 도입하기로 한 곳은 TCL. 프랑스 스마트폰 브랜드인 알카텔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알카텔을 소유하고 있는 TCL은 블랙베리 브랜드 사용권을 확보했다. 비록 독점사용은 아니나 그동안 블랙베리 스마트폰 설계, 개발 경험이 있어 제조 측면에서 이점이 있었다.
TCL은 프리미엄 전략에 있어 알카텔 대신 블랙베리를 주요 브랜드로 내세운다. 즉, 알카텔과 블랙베리를 투톱으로 내세우는 전략이다.
TCL은 이번 MWC에서 블랙베리 키원(BlackBerry KEYone)을 처음 선보였다. 블랙베리 이름을 그대로 살린 스마트폰으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쿼티 자판을 달아 블랙베리의 감성을 최대한 살리려 했고, 보안 소프트웨어 디텍(DTEK)을 실어 강점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첫 제품 ‘블랙베리 키 원’이 아직 블랙베리 이미지에 완벽하게 일치한 제품이라는 평가는 나오지 않지만, 올해 3~4개의 TCL판 블랙베리를 더 나올 예정임에 따라 향후 제품 평가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한국 출시 역시 검토하고 있을 만큼 TCL의 공격적인 움직임이 블랙베리를 되살릴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
트렌드 융합 미룬 ‘풍요 속 빈곤’의 스마트폰
블랙베리와 노키아의 귀환은 말 그대로 제조사의 시장개척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면 기존 제조사들에 소비자 경험의 확대를 위한 트렌드 융합을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MWC 2017의 스마트폰은 이 기대와 상당 부분 어긋났다. 종전 스마트폰에서 볼 수 없는 긴 화면, 독특한 카메라 같은 몇몇 새로운 시도들이 눈에 띄긴 하였으나, 스마트폰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혁신은 상당 부분 실종됐다.
MWC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내놓은 곳은 한둘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TCL 블랙베리 키 원과 HMD글로벌 노키아 시리즈 외에도 LG G6, 화웨이 P10 시리즈, 지오니 A1 플러스, 모토 G5 시리즈, 소니 엑스페리아 XZ 프리미엄과 XA1, ZTE 액손 7 맥스 등이 부스를 채웠다. 비록 삼성의 전략적인 선택으로 갤럭시 S8을 이번 MWC에서 볼 수 없었다 할지라도 신제품 수만 보면 가장 풍요로운 시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스마트폰 사이에서 풍요 속 빈곤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은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 증강 현실 같은 트렌드를 엮기 어려운 문제 때문이다. 스마트폰 대부분이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나 실제로 새로운 재주를 추가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MWC에서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부분은 인공 지능 기반 지능형 음성 비서다.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 알렉사, 마이크로소프트 코타나 등 기대를 모으는 인공지능 비서 플랫폼은 여럿 공개됐던 터라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선택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MWC 2017에서 음성 비서를 결합한 스마트폰은 LG G6뿐이다. 이번 MWC에서 구글 어시스턴트 진영의 공식 스마트폰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G6가 유일하다.
이처럼 수많은 제조사가 음성 비서를 채택하지 않은 데는 여러 배경이 있다.
먼저 언어 장벽으로 인한 음성 비서 플랫폼의 범용성이 떨어질뿐더러 자체적으로 인공지능 기반 음성 비서 시스템의 개발을 진행하는 만큼 다른 음성 비서 플랫폼 도입에 신중해졌다. 더구나 모바일 운영체제로 강력한 입지를 다진 구글과 같은 기업의 협력은 차기 플랫폼으로 인식되는 음성 비서 시장의 주도권을 쉽게 내줄 수 없다는 제조사의 의식도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음성 비서의 진화에 필요한 음성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스마트폰 같은 대중적인 장치에 기능을 실어야 하는데, 스마트폰 초기 선택지가 거의 없었던 모바일 운영체제와 비교하면 지금 음성 비서 시장의 선택지는 훨씬 넓은 상태여서 스마트폰 제조사가 서두르지 않는 상황이다.
가상현실과 거리도 더 좁히지 않았다. 이번 MWC에서 공개된 스마트폰은 이미 가상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성능과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다. 특히 엑스페리아 XZ 프리미엄은 그동안 모바일 가상현실의 약점으로 지적된 디스플레이의 약점까지 극복할 수 있는 4K 디스플레이를 채택했다. 하지만 소니는 이 스마트폰에 가상현실 플랫폼을 탑재하지 않는다.
LG나 화웨이, 그 밖의 다른 스마트폰 제조사 가운데 모바일 가상현실 플랫폼을 탑재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지난해와 가상현실을 도입하려던 여러 움직임과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처럼 모바일 시장에서 가상현실 도입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꼭 필요한 운영체제와 달리 모바일 가상현실은 선택적인 옵션이다. 이를 넣으려면 가상현실이 스마트폰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거나 그 생태계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오큘러스 플랫폼을 독점 적용한 삼성은 스마트폰과 가상현실을 단순한 옵션 이상의 차세대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과 달리 다른 제조사들은 이 같은 전략을 쓰기 어렵다.
지금 스마트폰 제조사가 도입할 수 있는 확실하고 현실적인 선택은 모바일 가상현실 플랫폼인 구글 데이드림뿐이다. 구글은 이를 특정 제조사에게 독점 공급하는 전략 대신 개방된 전략을 취한다. 그런데도 많은 제조사가 이 플랫폼을 탑재하려면 구글의 하드웨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레이턴시(대기시간)처럼 가상현실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이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제조사 책임이다.
구글 데이드림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면 모르겠으나, 굳이 제조사에 이익이 돌아갈지 불투명한 플랫폼을 위해 자금을 투자해가며 스마트폰을 개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구글이 데이드림에 더 열성적으로 홍보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삼성처럼 CES나 MWC 같은 주요 전시회마다 대규모 어트랙션을 만들어 흥미를 끌어내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이번 MWC도 그렇다. 삼성은 가상현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어트랙션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린 반면 구글은 몇 개의 데이드림 뷰를 가져다 뒀을 뿐이다.
구글 데이드림 생태계에 대한 흥분을 끌어낼 만한 활동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글 데이드림은 개방을 앞세워 스마트폰 제조사의 참여를 기대했지만, 전략적인 접근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이번 MWC에서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스마트 제조사의 움직임은 새로운 셈법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이익이 되는 것을 철저히 따져 서로의 힘과 재능을 보탤 뿐, 덤으로 하나를 더 얹어 주는 시대의 끝을 보여준 것이다. 절대 반지의 군주 같은 공통된 적을 향해 칼을 겨누며 개방된 생태계에서 힘을 모았던 이들이었지만, 이제 표준화된 생태계 안에서 각자의 셈법으로 힘의 균형을 맞춰가려는 것이다.
MWC 2017에서 스마트폰은 다른 키워드에 비해 덜 돋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스마트폰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우위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산업 전쟁의 새로운 서막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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