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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2017년 1월 8일, 이란의 타지리시에서 호메이니와 함께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끌었던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이 83년의 생을 마쳤습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은 바야흐로 혁명 1세대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이란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후견인으로서 라프산자니의 빈자리를 염려합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 이후, 이란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앞으로 3편에 걸쳐 이란이 걸어갈 길을 중국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비춰 전망합니다. (편집자)

  1. 이란과 중국 
  2. 혁명을 갈망하고 혁명에 지치다 
  3. 중국은 이란의 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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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산자니는 덩샤오핑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우선 그는 경제적인 면에서 개혁을 추진했고,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황폐화한 국토와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를 추진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면에서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정책이나 이슬람 혁명정부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지는 않았다(비록 퇴임 후에는 개혁적 포지션으로 이동하지만). 하지만 그는 역시 정치적 정당성을 털끝만큼도 손상당하지 않은 막강한 보수파 세력을 제압할 수 없었고, 부분적인 성과만 거둔 채로 임기를 마무리한다.

라프산자니 등소평 덩샤오핑
라프산자니와 덩샤오핑

1. 테헤란: 작용과 반작용 

호메이니 사후 이란은 혼란한 상태였고, 이란과 중국의 또 다른 차이가 여기서 다시 부상한다. 철저한 공산당 독재 국가였던 중국과 달리 이란은 굉장히 통제를 받긴 했지만, 민의가 불완전하나마 반영되는 선거를 하는 국가였다. 그것을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비하기엔 미흡했지만, 국민 다수의 의견은 선거를 통해 국가에 반영될 수 있었다.

국민의 의지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강력한 정당성과 맞서 싸울만한 최고의 무기였다. 그렇게 이란은 라프산자니와 비교해 본격적인 개혁파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모하메드 하타미 대통령이 1997년에 당선되었다.

모하마드 하타미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2.0)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D%95%98%EB%A7%88%EB%93%9C_%ED%95%98%ED%83%80%EB%AF%B8#/media/File:Mohammad_Khatami.jpg
이란의 제7대, 제8대 대통령 모하마드 하타미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2.0)

그야말로 이란의 후야오방이자 이란의 자오쯔양이었다. 두 개혁파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이나 천윈처럼 혁명 시점부터 공산당 고위간부가 아니었던 것과 같이 하타미도 하메네이와 라프산자니와 구분되는 본격적인 3세대 정치인의 시대를 열었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하타미는 라프산자니 정권보다 더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경제에 있어서 더 과감한 사유화를 추진했고, 세계은행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이란의 빈곤율과 부채를 낮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미 세계는 덩샤오핑이 열어젖힌 해외투자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유럽, 일본, 즉 외주지역의 자본이 대대적으로 투자되지 않는 이상 국제 경제에서 고립된 이란이 국민들을 만족시켜줄만한 성장을 이뤄낼 수가 없었다.

외국 자본의 유치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화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하타미라고 하더라도 그것까지 완수해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모사데크와 팔레비 시대의 기억을 가진 이란 보수파와 다수 국민은 미국과의 화해까지 허용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는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과거 전쟁을 벌였던 일본이나 미국과 수교를 이끌어낸 중국과 또다시 비교되는 점이다. 내주 지역 국가 중국은 외주 지역과의 연결을 선택했다.[footnote]내주 지역, 외주 지역: 지정학자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심장지대와 주변지대의 구분)에 반발하여 주변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곳은 대략 스칸디나비아, 독일을 거쳐 터키와 인도를 지나 중국의 연안지대까지 이어지는 ‘내주 지역(inner rim)’영국에서 필리핀, 대만, 일본, 아메리카 대륙과 같이 유라시아 바깥에 위치한 ‘외주 지역(outer rim)’으로 구분된다.[/footnote]

이란 중동

중국은 어떻게 외주지역의 문을 대대적으로 열어젖힐 수 있었을까? 이 또한 80년대 전체를 씨름할 정도의 정치적 논쟁을 불러오긴 했으나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답은 혁명가이자 창업자, 그리고 최고지도자에 있다.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분명 일본군과 싸웠고 한국전쟁에서는 미군에 의해 아들도 잃었다. 하지만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안보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국가 그 자체와 같았던 마오쩌둥이 이런 결단을 내리지 않고 미국과의 대결적 구도를 바꾸지 않은 채 죽었다면 미·중 수교는 한결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가 오래 살았으면 미국에 긍정적으로 나왔을지 의문이지만, 미국과의 대립 구도는 세계인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해놓고 죽었기 때문에 중국과 같은 일이 벌어질 일은 없었다.

'핑퐁 외교'로 상징되는 미국과 중국의 수교, 사진은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낙수를 나누는 마오쩌둥과 닉슨.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핑퐁 외교’로 상징되는 미국과 중국의 화해. 사진은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낙수를 나누는 마오쩌둥과 닉슨. 핑퐁 외교는 1979년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가져오는 초석으로 작용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하타미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훨씬 더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는 이란의 민주주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보고,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공고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인권과 시민 자유의 측면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는 최고지도자와 보수파 그룹과 임기 내내 충돌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고 권력기관을 손에 쥐고 있는 보수파에 하타미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적 대중의 지지만으로 아직 보수파에 맞설 수는 없었다. 마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대중과 사회의 지지를 얻고 중국에 더 많은 자유화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천윈, 왕전, 보이보 등 고위 원로들에게 역풍을 맞고 끝내 실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하타미도 마찬가지로 보수파의 대대적 견제 속에서 끝내 그의 정책적 비전을 완수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2. 테헤란과 베이징: 아웃사이더의 등장

하타미에 이어 정권을 잡은 것은 ‘신보수파’라고 불리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였다. 아마디네자드는 성직자 출신이 아니었으나 핵 개발을 선언하여 이스라엘, 나아가서 미국과의 전면적 대결 구도를 조성했다. 그는 이란인이 하타미 개혁 정부에 가졌던 불만에 성공적으로 호소했다.

이란의 제9·10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1956년 10월 28일 ~ , 페르시아어: محمود احمدی‌نژاد)
이란의 제9·10대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1956년 10월 28일 ~ , 페르시아어: محمود احمدی‌نژاد, 출처: Agencia Brasil, CC BY 3.0)

라프산자니와 하타미로 이어지는 이란의 경제 재건 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농촌 지역과 도시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소외되었고 불평등이 커졌다. 이를 뛰어넘을 지지를 확보하려면 역시 외국 자본의 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불완전했고 아마디네자드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석유 수입으로 얻은 돈을 농촌과 도시 빈민에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기존의 자유화 기조에 역행하여 상품 가격, 임금에 대한 국가통제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당연히 정치적, 사회적 자유화 정책이 버텨나갈 수는 없었다. 많은 인권단체가 반대파에 대한 고문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이란 인권 상황의 후퇴를 지적한다. 또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는 때때로 돈을 풀어 표를 매수했으며 그와 긴밀히 얽혀있는 혁명수비대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아마디네자드의 사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슬람 혁명 수비군은 보통 '혁명 수비대'라고 불리는 이란군의 한 부대이며, 이란 혁명 이후인 1979년 5월 5일에 창설됐다.
이슬람 혁명 수비군은 보통 ‘혁명 수비대’라고 불리는 이란군의 한 부대이며, 이란 혁명 이후인 1979년 5월 5일에 창설됐다.

초창기 정책 기조들은 하메네이를 필두로 하는 전통적인 보수파 세력의 이해관계와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라프산자니까지는 몰라도 하타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이어 양날의 칼로 돌아왔다. 아마디네자드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성향은 전통 이란의 보수파에 온전히 섞여 들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녹색혁명’(아마디네자드의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footnote]녹색혁명: 2009년 6월 12일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 의혹 속에 압도적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마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한 시위. 대학생 등 젊은 층과 여성이 주축이 된 시위대는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이란 총리를 지지하며 그의 상징색인 녹색 깃발과 머리띠를 두르고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다.[/footnote]으로 두 번째 임기 시작부터 대통령의 가장 큰 자산에 타격을 입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 과정에서 숨져 '녹색혁명'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네다 아그하-솔탄(Nedā Āghā-Soltān) https://en.wikipedia.org/wiki/Death_of_Neda_Agha-Soltan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선의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시위 과정에서 숨져 ‘녹색혁명’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26살의 대학생 네다 아그하-솔탄(Nedā Āghā-Soltān) 오른쪽 사진은 사망 당시 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임기 말에는 하메네이의 보수파와도 갈등을 빚는다. 더불어 부패 추문과 의회와의 지속적인 갈등, 미국의 제재로 심화한 경제불황으로 대중적 지지마저 상실하면서 아마디네자드 정권은 초라하게 끝나버렸다.

아마디네자드와 비교할만한 개혁·개방기 중국 정치인은 마땅하지 않은데, 이는 이가 성직자를 비롯한 이란 정치의 주류그룹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적 당 통제 국가인 중국은 이런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란은 역시 선거 때문에 이런 인물들의 등장과 고위 권력으로의 진입이 상대적으로 더 용이했다. 개혁·개방기는 아니지만 아마디네자드와 비교할만한 인물을 중국에서 찾아보면 역시 보시라이가 아닐까 싶다.

보시라이
보시라이(간체: 薄熙来, 정체: 薄熙來, 한자음: 박희래. 1949년 7월 3일 ~ )

보시라이는 어떤 의미에서 중국 정치의 최고 주류그룹 중 한 명이다. 그는 8대 원로인 보이보의 아들로 최고위 진홍 귀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롄시 시장과 랴오닝성 성장을 거쳐서 중경시 서기로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후진타오 지도부에 인망을 잃은 그는 향후 최고지도자 그룹으로의 진입에 실패하였는데, 이때 그가 선택한 전략은 개혁·개방에 소외된 중국인을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높아진 중국의 불평등 속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이들에게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경제적 자유화 대신에 당이 경제를 관리하는 모델을 선호했으며 미국에 맞서고 과거 공산당의 전통적 가치들을 다시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권력의 주류 집단이 대하기에는 정말 껄끄러운 타입이었다. 보시라이는 당과 국가가 기반을 둔 정당성의 근간에 호소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까다롭게 만들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보시라이는 숙청된다.

3. 중국은 이란의 미래인가 

아마디네자드는 인물로서는 보시라이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개혁과 개방이라는 프리즘으로 보자면, 아마디네자드의 이란은 천안문 사태 직후의 중국과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진 개혁파가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다가 정치적 역풍을 맞아 그 동력은 고사했다.

그 직후 개혁파 세력은 위축됐고, 보수파가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특히 외주지역(특히 미국)과의 관계는 극적으로 악화했다. 여러모로 개혁파에 불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녹색혁명의 좌절은 당시 개혁파가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규모 군중 시위가 연일 이어졌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젊은 층과 여성이 대거 참여한 이란의 '녹색혁명'은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출처: spunkybong.com) https://spunkybong.files.wordpress.com/2013/06/iranians.jpg
젊은 층과 여성이 대거 참여한 이란의 ‘녹색혁명’ (출처: spunkybong.com)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이어온 개혁을 통해 중국과 이란은 애초부터 그들 정권을 탄생시킨 힘을 다시 깨닫는다. 바로 국가와 구별되는 존재로서 시민 사회의 힘이다. 국가의 빈자리에서 사회적인 힘이 꿈틀거렸고, 그들은 구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취약한, 불완전한 근대국가를 뒤집어엎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그런 면에서 청 제국과 카자르 왕조 위에서 세워진 중화민국과 팔레비 왕조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정치적 정당성과 행정적 역량을 갖춘 국가들이 근대적 교육과 제한적 경제발전을 시작하자 다시 사회적 역동성과 다양한 사회집단의 목소리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칭찬 응원 사람들 협동 시민 남자 여자 여성 남성 민주주의

중국과 이란에서 보수파는, 과거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던 정치와 경제 시스템으로 회귀하고 싶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개혁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개혁파의 요구가 있긴 했지만, 일단 최소한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권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생존을 위해 개혁을 시작하면 그 흐름을 틀어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혁의 단비를 한 모금 마신 사람은 더욱 갈증에 타오른다. 흐루쇼프 시대에 성장한 사람이 고르바초프 시대를 만들어나간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경우, 80년대에 교육받고 본격적으로 상대적 자유를 누린 사람들은 경제적, 사회적 개방이 역풍을 맞아 좌절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천안문 사태 자체가 그런 학생들의 급진적인 목소리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공산당은 곤봉으로 틀어막았지만, 그것은 김이 나오고 있는 끓는 냄비의 뚜껑을 꽁꽁 틀어막는 일에 불과했다. 당장은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더 큰 파국이 올 수도 있었다. 소련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그런 사회의 목소리를 기민하게 잡아채고 대중적 지지와 개혁·개방의 수혜자를 동원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무력시위였다. 메시지는 대략 이러했다. ‘너희들이 이걸 모조리 무시하고도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말 할 때 다시 문 여시지?’

중국 개방 개혁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0031125123522.jpg
중국 개방 개혁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오락가락하던 장쩌민은 끝내 덩샤오핑을 따르기로 하고 3세대 지도부 하에서 사영 기업인들의 공산당 입당마저 허용한다. 중국은 미국에 모든 문을 열어 맥도날드와 코카콜라가 대륙으로 입성했다. 외주지역의 경제적 기회를 수용하기로 하자 중국은 요동쳤으나 그것은 과거와 달리 훨씬 역동적이었고 무엇보다 생산적이었다. 그렇게 공산당은 진화에 성공하여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세계에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아마디네자드의 치세가 1989년 천안문 사태부터 1992년 남순강화 사이의 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면, 이란의 남순강화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하산 로하니의 당선과 핵 협상 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핵 협상을 타결시킴으로써 이란은 자신들도 외주지역의 거대한 자본과 부에 접근하여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고자 했다. 얼어붙은 경제와 암울한 사회는 그를 통해 새로이 활력을 찾을 것이고 혁명 정부는 진화하여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산 로하니(1948년 11월 12일~ ), 2013년 대선에서 당선된 이란의 일곱 번째, 제11대 대통령.
하산 로하니(1948년 11월 12일~ ), 2013년 대선에서 당선된 이란의 일곱 번째, 제11대 대통령.

녹색혁명은 무의미한 군중 시위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이란의 집권층에 효과적인 압박이 될 수 있었다. 사회의 억눌린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 터져 나올 수 있을지, 그 야수 같은 힘을 통해 팔레비 정권을 몰락시켜본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핵 협상 타결 직후 이어진 선거에서 로하니의 대승은 이것이 일회적인 승리가 아닌 모종의 추세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가까운 미래: 국가와 사회의 긴장

나는 앞서 라프산자니를 덩샤오핑에 비유했지만, 로하니야말로 진짜 이란의 덩샤오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78년 3중 전회로 개혁의 시작을 알렸지만, 결국 그의 1세기에 가까운 과업이 완성된 것은 1992년 남순강화를 통해서였다. 마찬가지로 호메이니 이란의 혼란에 안정을 가져다준 것은 라프산자니였고 나는 그래서 그를 이란의 덩샤오핑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외국 자본의 유입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절대 덩샤오핑이 이루어낸 성과를 만들 수 없었다. 하타미 정권의 실패는 이를 잘 입증해주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중도파인 로하니는 마침내 핵 협상을 타결함과 동시에 외주지역의 거대한 부를 이란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이란을 세계 경제 한복판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그 라프산자니가 죽었다. 그래서 다양한 전망이 나온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와 함께 한 혁명 동지라는 정치적 자산은 그를 수많은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는 오뚝이처럼 설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은 중도파와 개혁파가 그의 우산 속에서, 그리고 그가 폭넓게 가진 인적 네트워크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라프산자니, 그의 사후 이란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라프산자니, 그의 사후 이란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란은 중국처럼 기존 정권이 정당성을 대대적으로 깎아 먹은 적이 없었기에, 그 때문에 보수파들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힘든 시기가 이어질 수도 있다. 로하니의 개혁과 개방이 다시 타격을 입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미국이라는 변수(트럼프의 승리)로 선거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이란은 아직 남순강화를 시작했지만, 이를 끝내지는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어둡다고는 볼 수 없다. 중국의 전례를 보건대 말이다. 장쩌민 시기 양안 문제를 놓고 중국은 포격하고, 미국은 항모전단을 보내는 등 미국과의 갈등도 있었으며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오폭으로 인해 대규모 반미 시위가 중국에서 조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가면서 국가 전체를 세계 경제의 요구 하에 개조시켜나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급증하는 사회적 힘에 국가가 압도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이란인들은 혁명과 전쟁으로 10년에 가까운 혼란기를 겪었고, 지지부진한 개혁과 핵 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란인과 이란 사회는 다시 열린 기회를 닫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입증해왔다. 라프산자니의 죽음으로 개혁파는 당분간 타격을 입을 것임이 예상되지만, 정치적 자유화가 아닌 경제적, 사회적인 자유화를 전면적으로 뒤집으려 한다면 이란인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자신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정당성 있는 권력이 계속해서 좌절당한다면 선거 이외의 급진적 수단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이란의 엘리트 집단은 이를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번 핵 협상을 통해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또한, 라프산자니가 죽었다는 것은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인 하메네이도 역사의 물결 속으로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남순강화 이후 덩샤오핑도 죽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천윈이 죽은 것과 유사하다. 트럼프의 미국, 유럽 자본의 유입으로 변화할 이란의 정치·경제는 이란 정치인의 세대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란의 경제발전과 사회적인 역동성이 지속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역시 중국을 통해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지역 격차, 불평등으로 퍼져나가는 전 세계적인 민족주의적 흐름과 맞물려 과거 그들이 어떻게든 물리쳤던 지도자들이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발전으로 사회의 힘은 더욱 커질 것이고 불평등도 더 심해질 것이다. 만약 정치가 이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다면 중국과 이란 양측에서 제2의, 제3의 보시라이나 아마디네자드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국의 지도자는 이를 염두에 둬야 한다.

5. 먼 미래: 지정학으로의 귀환

이런 전망은 국제적으로는 또 다른 함의를 가진다. 다시 지정학으로 돌아오자. 19세기 세계 대분업 시기에 성장한 내주지역의 국가들은 외주지역과의 무역에 참여하면서 힘을 키워갔다. 이를 통해 외주 지역과 내주 지역의 모두가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않았는데, 힘을 키운 후발주자들이 내주지역과 심장부를 장악하고 외주지역의 국가들과 대결하고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롯이 구체화한다. 독일과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심장부와 내주 지역을 장악하고, 그 광대한 배후지를 통해 힘을 키워서 미국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출처: tackk.com https://tackk.com/uzdv8w
지정학자 니콜라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심장지대와 주변지대의 구분)에 반발하여 주변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곳은 대략 스칸디나비아, 독일을 거쳐 터키와 인도를 지나 중국의 연안지대까지 이어지는 ‘내주 지역(inner rim)’영국에서 필리핀, 대만, 일본, 아메리카 대륙과 같이 유라시아 바깥에 위치한 ‘외주 지역(outer rim)’으로 구분된다. (출처: tackk.com)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이들은 모두 영국 혹은 미국과 살갑게 지내던 국가들이었다는 점이다. 독일과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비해 허약했고, 친선과 무역을 통해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의 정치적 불안, 독일의 중산층이나 일본의 빈농들의 정치적 급진화와 맞물려 이들 국가에서는 대결적 리더십이 형성됐다.

만약 보시라이나 아마디네자드가 전 세계적인 민족주의적 흐름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들이 외주지역과의 무역을 통해서 국제질서에 위협을 끼칠만한 힘을 구축해놓은 상태라면(적어도 중국은 이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세계는 100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20세기 소련의 붕괴로 결국 심장 지대가 역사에서 승리한다는 지정학자 매킨더는 주변 지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파이크먼에게 패배했지만, 21세기에는 매킨더의 반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일대일로를 통해 중국은 내주지역과 심장부를 철의 실크로드로 다시 통합하고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란도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다.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 모든 것은 따라서 기회이자 도전이다. 중국을 통해서 세계는 본격적인 아웃소싱의 시대를 맞았고, 이는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발판이 되었다. 중국보다는 작지만, 이란을 통해 좁게는 중동과 나아가서는 국제사회의 안정을 위한 지렛대를 마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두 자부심 넘치는 내주지역 국가들을 밀물에 맡기는 것이 된다. 두 국가는 밀물을 타고 올라올 것이지만(밀물은 모든 배를 들어 올린다!), 급류를 타고 배가 난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란과 중국의 발전은 그 발전을 가능하게 한 사회의 역동성을 더 부추겨 안팎으로 정치적 불안정성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이 위기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방의 정치인이 인내심으로 지켜봐야 한다(트럼프 행정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두 국가 정치인의 역할일 것이다.

그들이 사회적 압력과 경제적 요구를 소화하면서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성공해나갈 것인가? 보시라이와 아마디네자드가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면서 자유화에 안착해나갈 것인가?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길밖에는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중국은 1992년에 앞으로 나아가리라고 천명했다. 이란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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