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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2017년 1월 8일, 이란의 타지리시에서 호메이니와 함께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끌었던 라프산자니 전 이란 대통령이 83년의 생을 마쳤습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은 바야흐로 혁명 1세대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이란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후견인으로서 라프산자니의 빈자리를 염려합니다. 라프산자니의 죽음 이후, 이란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앞으로 3편에 걸쳐 이란이 걸어갈 길을 중국이라는 ‘역사의 거울’에 비춰 전망합니다. (편집자)

  1. 이란과 중국 
  2. → 혁명을 갈망하고 혁명에 지치다 
  3. 중국은 이란의 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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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의 현대국가를 세운 것은 중국이 이란보다 약 30년 빨랐다. 중국인들은 1911년 청 제국의 몰락으로 전통 질서가 더는 현대 세계에서 온존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통치는 청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진 중화민국 정부조차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명 중국 연안, 유라시아의 내주지역은 외주지역과의 무역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상해는 근대도시가 되었고 자본가와 지식인 그룹이 성장했다. 하지만 내륙은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 빈곤에 신음하고 있었다. 토지 개혁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으며 군벌들과의 허약한 연합정권이었던 장제스 정부는 중국 전역에 토지 개혁, 대규모 국민교육과 인프라 확충 등을 실시할 정치적 역량은커녕 의지조차도 의심받고 있었다.

북벌 기간 중 장제스 (1926년)
북벌 기간 중 장제스 (1926년)

1. 베이징: 마오쩌둥의 어록

그 자리를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기민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강서 소비에트와 연안의 공산당 해방구 등에서 토지개혁 프로그램들을 실행한 홍군은 중국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원하는 의제를 제시하여 지지를 끌어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토지개혁이 있었다.

내륙의 공산당원, 농민, 도시의 노동자들을 바탕으로 한 공산당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중화민국 정부보다 적었을지라도 조직력은 비교를 불허했다.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손문 이래로 실질적인 발전을 못 하고 있던 모호한 삼민주의보다 훨씬 명확했다.

사회적인 힘을 정치적인 역량으로 전환시킨 공산당 정부는 1949년을 ‘신중국’ 원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해방의 비극이 이어졌다. 만년 지하정당이던 공산당은 처음에는 자유주의자, 중화민국의 구 관료, 자본가와의 협치가 필요했으나 통치역량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들과 권력을 공유하고자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삼반운동, 오반운동, 반우파운동이 이어졌으며 1956년이 되면 중국은 토지개혁을 완료하고 농업의 집단화(중국에서는 집체화라고 한다)를 완료했으며, 소련 기술자들이 세워준 거대한 중공업 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외주지역과의 무역이 차단되었음을 의미했다.

분명 공산당 정부는 민국 정부에서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성과들을 이루었다. 토지개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매우 폭력적이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제거한 뒤 국민교육과 공공보건을 시행하였고 빠른 속도로 철도를 비롯한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이런 방식은 공산주의 개발모델의 특징이었으나 아무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폭넓은 지지와 동원능력, 조직능력을 확보한 곳에서나 가능했다. 인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시작한 중국의 문해(文解)율과 평균수명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을 겪고도 인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혼란이 문제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이 되자 중국의 상황은 정말로 심각했다. 소련이 세워주고 간 공장들은 외주지역, 특히 가까운 일본의 공장과 비교해보자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도시민들은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농촌은 식량이 부족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졌다. 바로 외주지역, 과거 자신들을 침략했던 나라들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2. 테헤란: 호메이니의 파트와

이란은 구질서가 조금 더 오래 온존했다. 청 제국이 1911년에 무너진 지 10년 뒤인 1921년, 카자르 왕조는 레자 샤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레자 샤는 1925년 또 다른 왕조를 세우는데 그것이 유명한 팔레비 왕조였다. 팔레비 왕조는 중화민국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제조업을 육성하고자 하였고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중화민국과 마찬가지였는데, 국토 전역에 근대적 규율을 이뤄낼 정치적인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석유 기업을 중심으로 도시에서는 제조업이 발전하였으나 대다수 농촌은 오히려 갈수록 빈곤해졌다. 이 역시 토지개혁의 실패에서 기인했는데, 당시 가장 중요한 사회의 행위자였던 성직자 그룹이 대토지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토지개혁을 핵심 의제로 걸었던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의 백색혁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관개수로에 접근이 쉬운 토지들은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개별 농가의 손에 쥐어진 토지는 자립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러다 보니 기존 지주제하에서 운영되던 규모의 경제도 활용하지 못하게 된 이란의 농가들은 되려 개혁의 결과로 더 빈곤해졌고, 많은 농가가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이런 불완전한 근대화는 사회적인 불만과 경제적인 불안정에 더하여 많은 식자층을 양성했는데 이들 또한 반정부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그렇게 폭발한 정치적 긴장은 얼마 안 가 이란 혁명으로 이어졌다. 마오쩌둥과 같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이자 본능적인 정치 감각을 지닌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혁명을 이끌었다.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혁명은 좌파,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세력이 참여하였고 그들이 갖고 있던 비전도 제각각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들과의 세력연합을 통해서 팔레비를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바깥의 모든 세력을 숙청한 것처럼 이란도 마찬가지의 숙청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중국처럼 국가가 안정되어 가서 숙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란은 국가가 혼란했기 때문에 숙청의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이라크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서 이란을 대대적으로 침공한 것이다. 인류가 치른 최후의 총력전이라고 해도 좋을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측 백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이란 정권에 엄청난 도전을 안겨다 주었다. 거기에 이란인들은 과거 1953년 자신들이 만들어낸 총리를 미국 CIA의 공작으로 잃게 된 기억도 갖고 있었다. 미국 대사관 인질극을 둘러싼 대외적 위협의 증폭은 숙청의 좋은 빌미가 되어주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호메이니는 이를 통해 시아파 성직자만을 권력 핵심에 남겨두고 다른 모든 정치 세력들을 제압하여 이슬람 혁명을 완수하였다. 신중국이 정치적인 힘과 조직력을 통해 사회를 바꿔낼 수 있었듯이 이란 또한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바탕으로 총력전을 수행하면서 국가의 힘을 키워갔다. 팔레비 정권보다 여성의 교육참여가 늘어난 것은 단적인 예시이며, 전쟁 수행을 위해서 대대적 인프라 확충도 이 시기에 이루어냈다. 이전에는 생소한 대중동원이라는 방식을 써서 말이다.

그러나 혁명 10주년, 호메이니가 사망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해가 되자 이란은 다시 이후의 행보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는 마오쩌둥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비상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단 폭풍이 지나고 나자 남은 자리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수행을 위하여 국영기업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는 비효율의 온상이었다. 호메이니는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관리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치는 극단을 오락가락하곤 했다. 국내의 좌파 세력과의 투쟁으로 정치는 여전히 불안했으며 냉전에서 승기를 잡아가던 미국과의 갈등은 핵심적인 불안요인이었다. 역시 뭔가 변화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3. 베이징: 덩샤오핑과 개혁개방으로 가는 길

1978년 3중 전회에서 덩샤오핑과 천윈은 역사적인 선언을 했다. 이제 중국은 폐쇄적인 공산주의 경제를 탈바꿈하기를 원했다. 처음에 관료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덩샤오핑은 일본,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외국 자본을 투자받아서 경제적 활력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선 이념보다는 실용주의가 앞서야 했다. 최측근인 완리가 수행한 포산도호 정책, 즉 자영농을 부활시키는 정책으로 중국은 식량 부족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사적 거래를 풀어주자 향진기업, 개체호 등을 중심으로 시장에 드디어 물건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동성 선전에서 중국은 처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중국 개방 개혁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0031125123522.jpg
중국 개방 개혁의 상징, 덩샤오핑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 SA)

그러나 누구에게나 좋은 정책은 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국영기업과 연계된 당의 보수파 고위관료들은 개혁개방이 철저히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경제의 개방이 정치의 개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개혁개방이 진행되면 진행되어 갈수록 정치, 경제적 자율성을 원하는 수많은 사회집단의 힘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80년대는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가 중앙고문위원회를 무대로 하는 주도권 다툼의 시대였다.

이 중에서 총서기 후야오방과 후임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이 후임으로 점찍어둔 개혁파의 수뇌였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보수파의 공격에 취약했으며, 덩샤오핑이 추진한 정책 실패를 이들이 독박 쓰는 일도 흔했다. 또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개방도 추진했기에 이들은 더더욱 당내의 공격에 취약했다. 덩샤오핑도 여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기에, 때로 자신이 직접 이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1988년 가격개혁이 도화선이 되어 번져나간 학생시위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엄청나게 격화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덩샤오핑은 이런 것까지 용납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오쯔양은 실각당하게 된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중국 천안문 6.4 항쟁은 중국 공산당의 무력 진압(사실상 대학살)으로 끝났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전방위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선 소련이 멸망해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정당성과 비전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하여 개혁·개방기를 거치며 성장한 중국 사회의 힘이 한 번 좌절당하자 당국의 통치 정당성도 위태로워졌다.

원로 간부들도 때마침 세상을 떠나고 있었고, 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을 보여줘 중국 고위 간부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는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로 이어졌다. 자신이 개혁개방을 통해 이뤄낸 성과를 직접 중국 전역에 보여주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한 최후의 정치적 액션이었다. 이것으로 보수파는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진정한 ‘신중국’이 시작된다.

이런 이유로 197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을 덩샤오핑으로 선정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덩샤오핑은 지금의 중국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세계를 만드는 데도 엄청나게 이바지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197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덩샤오핑
197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덩샤오핑

4. 테헤란과 베이징: 마오쩌둥과 호메이니 딜레마

그리고 역설적으로 1979년 ‘올해의 인물’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이란에서는 덩샤오핑이 넘어서고자 했던 마오쩌둥과 훨씬 유사한 인물이 국가를 장악했다.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호메이니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호메이니

이는 혁명가의 죽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것처럼 이란도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과 지도부 교체가 변화의 계기가 됐다. 호메이니가 죽고 중도 개혁적인 성향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이 되어 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 자유화 계획을 들고 왔다.

하지만 중국과 이란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첫째로 혁명가이자 창업자의 사망 시기와 관련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에 신중국을 건립하고 약 27년간 중국을 다스렸다. 정무직을 수행하며 검증을 받지 않은, 전형적인 비여과형 지도자인 그는 자신의 개성을 정치에 가감 없이 드러냈고 그 결과 중국은 파탄 났다.

한편 호메이니 치하의 이란은 이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았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장악하고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갖출 기회가 없었다. 그가 할 일은 반대파를 고문하고, 숙청하며,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고 미국에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조직된 정치세력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는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 등지에서 검증된 것처럼 놀랍도록 효과적인 일들이었다.

그래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뛰어나나 통치능력은 전혀 검증받지 못한, 극단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장기간 통치를 하는 일이 이란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서 덩샤오핑과 라이벌이었던 천윈은 이런 말을 했다.

천윈과 덩샤오핑(1966년)
천윈과 마오쩌둥(1966년)

“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고 27년간 통치를 했다면 이란은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이 그랬듯이 훨씬 황폐해졌을 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고령이었던 호메이니는 1989년에, 국가의 권력이 공고화되고 외국의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시점에 절묘하게 죽는다. 천윈이 마오쩌둥에게 바라마지 않던 시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가 지나치게 호메이니의 카리스마에 휩쓸리지 않게 되었다는 장점도 주었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을 안겨주었다. 바로 역설적으로 이란 혁명 정부의 정치적 정통성이 털끝만큼도 손상받지 않고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는 점에 있다. 이는 호메이니 딜레마라고 할 만하다.

호메이니는 1989년에 타계한다.
호메이니는 1989년에 타계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단점이 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중국의 마오쩌둥 딜레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골자로 하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실책으로 추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 정당성은 건국 시 이룩한 대업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오욕을 씻어내고 인민들에게 적어도 안정과 나아가서는 부를 쥐여줘야만 정권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인민들은 더는 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새로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상을 해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더하여 마오쩌둥 통치는 마오쩌둥 사후 국가의 발전 방향성을 제시할 리더십의 구성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당내 강경 좌파들이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조리 쓸려나갔다는 점에 있다. 4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화궈펑도 없어졌다. 2세대 지도부는 이로써 국가를 정상화하고 개혁개방을 밀어붙일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두 번째는 포스트 마오쩌둥으로 거론될 명망 있는 원로 고위간부 그룹들의 인적구성에 씻을 수 없는 손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도시 지하 노동자 조직을 이끌던,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던 류사오치나 명망 있는 군 지휘관 펑더화이는 모욕을 받고 비참하게 죽어야 했다. 만약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대신 1956년, 중국이 당시 마지막으로 누렸던 안정된 시기로의 회귀를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천윈을 비롯한 보수파 간부들은 어느 정도 이를 바라고 있었다.

사후(198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국 건국의 아버지 4인으로 뽑히지만,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의 표적이 돼 결국 1969년 비극적인 삶을 마친 류사오치.
사후(1987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국 건국의 아버지 4인으로 뽑히지만,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의 표적이 돼 결국 1969년 비극적인 삶을 마친 류사오치.

하지만 덩샤오핑은 자신이 키워낸 개혁개방파의 지지를 동원하고, 본인의 당과 군의 고위간부들을 두루 포괄하는 친분과 명망을 통해서 보수파를 결국 제압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군부의 주요 원로들과 장쩌민의 정치적 라이벌인 차오스과 함께 회의를 주최했다. 이는 자신이 군을 동원해 개혁에 미적지근한 장쩌민에게 모종의 압력(이를테면 차오스로의 정권교체)을 줄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장쩌민은 이에 기민하게 대처하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선언한다.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적절한 시점에서 죽었기에(혹은 부적절한 시점에 너무 일찍 죽었기에)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비교적 개혁적인 라프산자니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호메이니 밑에서 대통령을 지냈던, 보수파의 거두인 알리 하메네이였다. 호메이니, 하메네이, 라프산자니는 모두 이란 이슬람 혁명의 한 가운데에 있던 혁명지도자였는데, 라프산자니는 이 때문에 적어도 하메네이와 대립해도 자신만의 독자적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하메네이를 제압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란에서는 혁명의 혼란이 호메이니의 죽음과 함께 비교적 재빨리 정리되긴 했으나, 호메이니의 직접적인 후계자로 거론되던 보수파 그룹은 이슬람 혁명과 이란인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 정치적 정통성을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비교하자면, 셋 다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마오쩌둥이 정말로 1956년에 죽고 류사오치가 20년 가까이 중국을 그럭저럭 관리하고 있었다면 개혁개방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란의 상황이 이와 유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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