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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컴퓨존의 2016년 매출이 6,340억 원을 달성했다는 기사를 봤다. 컴퓨존은 컴퓨터 부품을 파는 온라인 쇼핑몰 중 하나인데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컴퓨터 부문의 쇼핑몰 하나가 그 정도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데 많이 놀랐다.

컴퓨존

최저가 검색의 보편화, 그 너머의 노동자

더 놀란 점은 그해 컴퓨존의 영업이익이 1%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정말 박리다매를 넘어서서 존폐를 줄타기하며 장사하고 있는 거다. 안타까운 건 이게 컴퓨존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품을 파는 대다수 업체의 문제라는 점이다.

쿠팡이 휘청거린다. 더는 투자받기 힘들단 이야기도 나돈다. 쿠팡이 로켓배송의 규모를 축소하고 있으며, 사실상 실패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애초에 로켓배송은 잘못된 승부수였을지도 모른다. 컴퓨존의 영업이익에서 볼 수 있듯, 애초에 최저가 검색이 가능한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영업이익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픈마켓은 전략적으로 보세 상품 등 패션 쪽에 중점을 두고 있는 모양새다. 그쪽 상품은 최저가 검색이 모호한 분야다.

쿠팡

쿠팡은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전략 상품을 던지는 승부수를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지만, 이는 압도적인 자본이 있지 않은 한 오래가지 못한다. 게다가 ‘생활용품 대부분을 빠르고 편하게 배송 받는 서비스’를 전략적으로 내세운 쿠팡이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배송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는 대형마트의 벽을 쉽게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하고자 하는 점은 앞서 이-커머스 기업들의 전략이 옳다 그르다 같은 분석이 아니다. 앞선 상황이 왜 일어났으며 그 결과가 어떻냐는 점이다. 포털과 가격비교사이트를 중심으로 최저가 검색은 용이해졌고, 소비자는 가장 싼 가격의 물품을 쉽게 찾아서 살 수 있다. 그래서 과당경쟁을 넘어 출혈 경쟁으로까지 변했고, 해당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나날이 줄어드는 영업이익 덕택에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쿠팡은 심각한 인력유출을 겪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와 생산자가 잘못한 것은 없다. 기술은 발전했고, 사람들은 그걸 이용했다. 진보든 좌파든 이런 기술을 이용하는 데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노동자들은 해고의 위험에 직면하거나 줄어든 월급봉투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노동자의 위기를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최저가

 

이런 문제는 매우 많다.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대부분은 순진한 이념적 구호보다는 훨씬 첨예하고 복잡한 사실들이 얽혀있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에 대한 해고를 중단하라’라는 이야기나 ‘어떻게 기업 하라는 이야기냐’ 같은 주장에 섣불리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구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고민을 통해 결론을 내릴 때면 따라오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그래서 넌 누구 편이냐?

혹자는 나를 굉장히 왼쪽에 치우쳐진 사람으로 보는 듯하지만, 경제 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살펴보면 난 그리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을 벗어난 스펙트럼을 갖다 대면 다분히 ‘오른쪽’으로 분류될 사람이다. 나는 최저임금 1만 원의 구호에 찬성하지만, 지금 당장 도입하기엔 선결문제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그 돈도 못 줄 자영업자들은 다 죽으라’고 하기엔 자영업자 숫자가 너무 많다. 그 자영업자 중 많은 수가 더 이상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져 쫓겨나듯 창업을 하는 사람이다.

국가별 자영업주 비중

프랜차이즈만 손봐서 해결될 구조도 아니다. 착취에 가까운 프랜차이즈 기업을 비판하지만, 프랜차이즈 자영업자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자영업자에 비해 세배나 높다.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 시스템에 관해서는 반대로 다분히 ‘왼쪽 정책’들을 지지하며 여전히 가장 왼쪽에 있는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들도 아쉽다고 평가한다. 나는 차별이나 혐오 같은 문제가 비용을 비교해 어느 하날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동성결혼의 법제화 문제는 반대여론보다 차별 당사자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 여성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고민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다 나름의 고민을 거쳤던 것 같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이 ‘어느 소속’의 취향과 딱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종종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 종종 오르내렸던 경험에서 이야기하면, 나는 종종 ‘일베’, ‘좌좀’, ‘메갈’, ‘한남충’, ‘진신류’ 같은 상당히 일관적이지 않은 단어로 명명됐다.

확실한 건 내가 진보신당 당원이었던 것도 맞고, 업무상 일베나 메갈을 들락날락했던 것도 맞고, 한국 남자인것도 맞고 다 맞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소속에 의미를 둔 적이 없다.

물음표 퀘스천
Marco Bellucci, CC BY

심지어 정당도 일종의 친목 커뮤니티의 차원에서 가입했었고 지금은 탈당했다. 사람들은 내가 왜 그런 사이트에 들어갔는지, 내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내가 왜 그런 결론을 도출했는지, 내가 왜 정당에 가입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결과적으로 그 이야기나 그런 행동은 어디에 도움이 되고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의 소속이라는 평가만 주로 받았다. 나는 나인데 그런 나는 조각조각 나서 여기저기 편의에 의해 전시됐다.

저는 제 편입니다만

나는 선거국면이 피곤하다. 단편적인 평가들이 난무한다. 그런 평가들은 후보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선거운동이랍시고 피아를 구분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어떤 사람의 어떤 고민은 ‘그래서 당신은 누굴 지지하냐’는 이야기로 귀결되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종종 일베라는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는 사실보다, 바른정당이나 자유한국당을 지지한다는 사실보다, 당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가 궁금하다. 비단 그런 결정이 나와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런 선택을 한 당신의 고민을 내가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며, 보통 그런 고민이 일관적이라면 나는 그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앞으로도 충분히 많을 거로 생각한다.

다른 측면에서 피곤한 건, 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을 넓히는 대신 누군가에게 그걸 의탁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어떤 후보의 세계관과 자신의 세계를 비교 평가하여 그를 ‘지지’하려 하는 대신 그 사람을 지지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세계를 곧 자신의 것으로 결정하며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강풀 중에서
강풀 [26년] 중에서
어떤 후보의 공약을 하나하나 블라인드로 평가했을 때, 그 사람의 공약과 자기 생각이 100% 일치할 수 있는 경우는 사실상 0에 수렴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무비판적 지지가 그 정치인의 미래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한다.

나는 선거 때만 되면 반복되는, 지지라는 이름의 폭력을 그만 보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을 내리다가 흠칫 놀란다. 이맘때쯤이면 선거가 스포츠며 내가 승점 3점을 얻는 순간 상대는 승점 0점으로 패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낀다.

투표 선거 승부

나는 정치가 그렇게 ‘경기’화 되는 것이 무섭다. 경기장 안쪽 사람들이 경기장 밖에서 피켓을 든 사람들에게 ‘실력을 키워오라’고 조롱하는 것도, 자기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것도 보기 싫다. 누가 당선됐든, 누가 정치권력을 잡든 우리 대부분은 여기서 부대끼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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