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성실성일까. 아니면 대인관계일까. 올해 초에 대학생, 취업준비생, 직장인 등 2,8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2030이 생각하는 성공 조건 1위 ‘부모의 재력’
응답자 가운데 40%에 가까운 이들은 ‘부모의 재력’을 가장 중요한 삶의 성공 조건으로 꼽았다. 개인의 역량이나 성실성, 또는 대인 관계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결정될 수 있는 항목은 부모의 재력에 밀려 2, 3위에 그쳤다.
여기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노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계층 간의 장벽,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절망감이다. 실제로, 더 부유한 부모의 자녀일수록 훗날 더 나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이들의 절망감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먼저 부유한 부모를 만난 아이의 삶을 들여다보자.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 달 학비가 수백만 원에 달하는 영어유치원에 다닌다. 학창 시절 동안에는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학업에 집중한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매니저처럼 딱 붙어서 학업 관리를 도맡아 하기도 한다. 아이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한다. 꼼꼼한 내신과 입시 관리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대학교에 진학한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목표한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면, 다시 도전할 수도 있다. 재수에만 전념할 수 있게 부모가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체계적인 학점 관리로 좋은 성적을 유지한다. 틈틈이 해외여행도 다니며 세상이 넓다는 것을 보고 느끼며 안목을 키운다.
한편, 인생 경험 삼아 잠깐 해보는 것 말고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는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족하지도 않을뿐더러, 남의 밑에서 잡일을 하느니 미래를 대비한 자기계발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부모와 지인들의 인맥을 디딤돌 삼아서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좋은’ 부모가 될 준비를 한다.
흙수저의 생애주기
반면에, 넉넉지 못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은 어떠할까. 같은 하늘 아래지만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살펴보자.
입학할 나이가 되어 학교에 들어간다. 그런데 시작부터 다른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학교 선생님은 선행학습을 한 것을 전제로 수업을 진행한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된다. 그런 것이 있음을 아무도 알려주지도 챙겨주지도 않았을 뿐인데. 결국, 자신의 부모에게 원망의 화살이 향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모른다. 그 부모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그 부모 자신도 잘 몰라서, 설사 안다고 해도 먹고 살기 바빠서 미리 챙겨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학교는 이런 앞뒤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아이의 자존감에 상처를 남긴다.
인슐린 주삿바늘에 여러 번 찔린 피부가 점점 굳어가듯, 아이들의 원래 순수하고 부드러웠던 마음도 시간이 가면서 딱딱하게 굳어간다. 학교에 다니는 둥 마는 둥 겉돌다가 정규교육의 마지막 역에 도착한다.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떠밀리듯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곧바로 사회로 나간다. 결국, 비정규직 통계의 모집단에 숫자 하나를 더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대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가 ‘인생 경험’이었다면, 이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점차 ‘인생’ 그 자체가 되어간다. TV에서는 청년 취업을 위해 대기업이 올해 몇천 명을 더 뽑기로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된 지 이미 오래다.
혹시 올림픽에서 육상경기를 본 적이 있는가. 선수들이 출발선에서 움츠리고 있다가 총성과 함께 동시에 출발한다. 같은 출발선, 동시 출발은 공정한 경쟁의 기본이다.
하지만 오늘날 부모의 재력에 의해 미래가 정해지는 우리들의 아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규칙도 보장받지 못한다. 같은 출발선에서 동시에 출발하고 싶다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우리 사회는 불공평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부족하다. 부의 대물림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가난의 대물림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잔인하리만치 무관심하다.
여기서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는 자수성가의 사례를 들면서 말이다.
내가 되묻겠다. 자수성가가 정말 의미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는가. 자수성가가 이목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드물게나마 있던 자수성가의 사례마저도 사회적 계층이 고착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수성가에 대한 환상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가리는 것은 기만이다. 자수성가는 결코 탈출구가 아니다. 자수성가에 희망을 걸 필요가 없는 사회가 진짜 정의로운 사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요컨대, 당신이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자리는 당신 부모의 영향 아래 이미 오래전에 거의 결정되었다. 설문조사에서 성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부모의 재력’을 선택한 40%의 사람들은 틀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다행스럽고, 또 누군가에게는 분노가 치밀 정도로 부당한 현실이다.
유전공학에 드리운 욕망의 그림자
그런데, 곧 이마저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 지금까지 부모의 재력이 미친 영향은 차라리 소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교육이 나무 합판에 압정을 눌러 고정하는 것이라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콘크리트 벽에 강철 못을 박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유전공학에 의한 인간 개조다. 알다시피 유전공학은 이제껏 신의 영역으로 여겨진 많은 한계를 기술의 힘을 빌려 극복하게 해주었다. 그 결과 더 건강하고, 더 똑똑하고, 더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정의론’ 열풍을 몰고 왔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은 그의 또 다른 책 [완벽에 대한 반론] [footnote]원제 : Case Against Perfection | 마이클 샌델 지음 | 이수경 옮김 |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6년 06월 27일 출간[/footnote]에서, 유전공학이 세간의 긍정적 기대와 다르게 어두운 면도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유전공학을 통해서 신체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어떤 영향과 변화를 가져올지 짚어보며, 유전공학 밑바탕에 깔린 인위적인 조작과 지배에 대한 욕구를 살펴본다.
먼저 저자는 유전공학이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는 영역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근육 강화, 기억력 강화, 신장 강화, 성별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유전공학에 의한 근육 강화를 통해 운동선수들이 더 높은 성적에 적합한 신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억력을 향상시켜서 학업이나 업무 수행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키를 높이기 위해서 활용될 수도 있고, 임신을 계획할 때 원하는 성별의 자녀를 얻기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 이처럼 신체적 특징이나 지적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서 유전공학은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자. 신체적 특징이나 지적 능력들은 이제껏 꾸준한 노력과 우연의 도움으로 성취했던 것들이다. 아무리 부모의 재력이 돕는다고 해도, 마지막에 가서는 노력과 어느 정도의 운도 필요했다.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유전공학은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우연과 노력의 요소를 건너뛰고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유전공학이 초래할 세 가지 재앙
이런 변화가 인류에게 과연 축복이기만 한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저자가 유전공학의 장밋빛 미래에 반론을 제기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책임의 증폭
유전공학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더욱 쉽게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언뜻 생각하기에는 책임도 줄어들 것 같다. 사람은 힘들여 얻은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법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 발짝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축구 선수가 경기 중에 실수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간다. 하지만 유전공학으로 신체 기능을 향상하는 것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상황이 다르다. 유전공학으로 신체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음에도 누군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팀에 피해를 끼친다면, 그 모든 책임은 유전공학을 활용하지 않은 선수 개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학교에서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도, 좀 더 노력하면 다음에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유전공학 기술을 활용하여 아이들의 지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어떨까. 자녀의 낮은 성적은 곧 부모의 무책임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과제에 대한 해결책이 유전공학으로 모이면,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정답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 연대감의 붕괴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에게 성공의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운’을 그 이유로 꼽는다. 이미 이룬 자의 겸손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삶의 향방이 때때로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의 삶에 우연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이 왜 중요할까. 지금 행복에 겨운 삶을 살고 있더라도 주위의 불운한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우연적 요소를 인정하는 것은 누구나 다른 이의 처지에 놓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공학에 의해 능력이 결정되면 어떨까.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이유가 사라진다. 운이 아니라 유전공학으로 향상된 능력 덕분에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된 이들에게만 그들이 원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유전공학은 사회 구성원 간의 연대감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회 불평등의 정당화
능력의 차이가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유전공학의 혜택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일이 없어지는, 그래서 서로 공감하기 어려운 사회는 어떤 곳일까.
축적한 부를 토대로 유전공학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더욱 건강하고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거듭 더 많은 부를 거머쥔다. 반면에 못 가진 자들은 점점 더 불리한 상황에서 그들의 고달픈 삶을 소진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며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불평등은 더 이상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개선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당연한 그 무엇’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준비 없이 맞이한다면, 유전공학은 축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사이의 불평등을 전례 없이 심화시키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유전공학을 잘못 사용하면 사람들은 극도의 책임감 아래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사회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은 허물어질 것이다. 결국, 사회적 불평등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오늘날 부모의 재력에 따른 사교육으로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상황이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전공학이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몰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자세’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가 말한 ‘삶을 선물로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 나도 처음 들어서는 바로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비로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개조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적 요소와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 성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한쪽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는 동안,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겸손’, 그리고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관심’. 그것이 바로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자세’이다.
선택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유전공학이라는 도구를 우리의 삶으로 끌어오기에 앞서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