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1.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리고 나의 아이는 24개월이 되었다. 나의 아이는 어쩌면 이제 비로소 온전한 하루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눈도 채 뜨지 못했던 아이가 기고, 걷고, 그리고 말하고, 온전한 사람의 행색을 갖출 때까지 24개월이 걸렸다.

아이가 아기였을 때 시댁에서 키우는 강아지보다도 더 강아지 같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제법 주인 행세를 하는 걸 보니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아기 아이 베이비

2.

2년 전 오늘을 기억하자면 기억은 생생하지만, 느낌은 퇴색된 게 사실이다. 아침에 출산용 준비 가방을 챙겨서 아무렇지 않게 병원으로 갔다.

‘오, 오늘은 아이를 낳는군!’

8월의 중순, 더웠다. 오지게 더웠다. 배를 짓누르는 이 아이를 한시바삐 빼내야겠다는 것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땐 몰랐지. 뱃속이 정말 편하다는걸. 어찌 되었건 개선 장군처럼 유도분만실에 들어갔고, 나는 결과적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모성 여자 임산부 임신 사람 인간 인권 생명

3.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러하듯, 마누라가 애 낳는 건 낳는 거고, 일은 일이니까 일 하러 갔었다. 남편은 오전까지 출근하고 점심 즈음에 와서는 유도분만제를 맞으며 혼절 중인 나를 보고서는 본인이 혼절할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유도제가 들어갈 때마다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었는데, 실제로 척추측만증의 증세를 가지고 디스크가 아주 살짝 튀어나와 있어 걱정은 했지만, 역시나 통증은 허리를 휘감아 돌아 나왔다.

그 기분은 마치 통증이 ‘받아라!’ 하면서 풀스윙하는 기분이었고, 허리가 홈런을 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구 스윙 소프트볼

남편은 달달달 떨면서 최선을 다해 걱정해 주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혼절하고, 내가 코 고는 ‘드르릉’ 소리에 깨어 다시 최선을 다해서 혼절하고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의 존재는 쓸모없음, 그 자체였다. 사실 그 자리에 누가 왔어도 ‘무쓸모’였을 거다. 당시 그 자리에 있지 못 했던  나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본인들이 계셨다면 내가 자연분만을 했을 거라고 하시지만, ‘댓츠 노노.’ 어차피 그 상황에서는 나 외에는 다 쓸모없음이다.

4.

자궁문이 5.5센티까지 열린 시점이 오후 4시. 그러니까 내가 10시부터 유도제를 맞았으니 6시간 만이었다. 양수를 터트려놔서 그때부터는 “왜 이러세요”가 입 밖으로 나오는 시점이었는데 최대한 좀 경건한 마음으로 진통을 겪고자 하였으나 그 시점부터는 “살려주세요”가 입 밖으로 나왔다.

나름대로 진통을 고상하게 겪어보자고 다짐했으나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고통 앞에서는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 어찌 되었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무통 주사’의 역사를 기다린 이유가 컸다. 드디어 무통이 오는구나.

어서 와요, 무통.

5.

가족분만실로 자리를 옮겼다. ‘달달달’ 거리면서 무통 주사를 맞으려고 하는데 웬걸. 아이가 하나도 안 내려왔단다. 나는 허리에 문제가 있어서 척추에 놓는 무통 주사를 다른 산모들만큼 맞지도 못하거니와 무통 주사를 맞으면 애가 내려오는 속도가 더 더딘데 이거 문제란다.

(생각해보니 진짜 아픈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화가 명확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인간의 사리분별이란 놀랍다.)

그냥 버텨서 아기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나 근데 그것도 언제 내려올지 장담은 못 하고 무통 주사 맞으면 내일까지 진행되는데 애한테 위험할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하겠냐고 한다.

남편은 덜덜 떨었고, 나는 차분히 말했다.

“이쯤이면 됐습니다. 수술할게요.”

6.

그랬다. 나는 8시간 이상의 진통을 겪게 된다면, 혹여 가망이 없다면 수술하겠다고 마음먹고 들어갔기에 아쉬울 것도 없었다. 마치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라는 그런 선수 같은 마음으로 이 정도 진통이면 어디 가서 ‘썰’ 풀 정도는 했어. 고생했다는 생각을 수술대 위에서 했으니 나도 생각해보면 제정신은 아닌 거 같다.

7.

수술대 위는 차가웠고 신기하게도 수술대 위에 누우니 진통이 사라졌다. 하반신이 벗겨진 채로 누워서 (심지어 굴욕 3종 세트를 다 당한 채로) 수술 준비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그때 생각했다.

“부끄럽다.”

8.

잠이 들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피비린내가 났다. 아이를 얼굴 근처에 가져다 대고, “아이가 잘 있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하고서는 “이제 다시 주무실게요”하고, 나는 긴 잠에 빠졌다.

ResoluteSupportMedia, CC BY https://flic.kr/p/9cE8my
ResoluteSupportMedia, CC BY

9.

남편은 수술실 밖에서 울었다고 했다. 팅팅 불은 아이를 보는 순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만 빼고 다 울었다. (제왕절개 한 어미들은 울 시간이 없구나.) 나중에 들었는데 지혈이 안 돼서 의사 선생님이 고생하셨다고 했다.

그랬다. 나는 지혈이 안 되는 자궁을 가지고 있었다. 출산은 역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10.

회복실에서 아이를 보여줬다. 앵앵거리고 빨간 아이였다. 나는 거동도 못 하는데 간호사가 젖을 물려줬다. 아이는 허겁지겁 입을 좌우로 움직이며 젖을 물려고 했지만, 나의 가슴은 너무나도 ‘플랫’했나 보다. 아이는 처음으로 엄마의 품에서 대실패를 경험하고 돌아갔다.

ResoluteSupportMedia, CC BY https://flic.kr/p/9cE8mY
ResoluteSupportMedia, CC BY

11.

엄마는 나에게 와서 누구 맘대로 수술했냐고 속상해했다. “좀 더 버티지”라고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시에는 너무 서운했고 지금도 서운하지만, 내 딸을 생각하면 그 무서운 수술대 위에 아이를 올린다는 생각이 두려운 걸 보니 엄마 마음이 이제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12.

그날은 그랬다. 7시 30분쯤 나는 친구들에게 아기를 낳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출산 완료”라고 모 친구에게 보냈다. 페이스북 상태 메시지에 ‘포유류 인증’이라고 올렸는데 생각해보니 멘탈이 온전했던 건 아닌 거 같다.

나를 빼놓고 온 가족은 근처 샤브샤브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그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홀로 누워서 네이버 뉴스를 봤다. 나에게는 너무 긴 하루였는데, 세상에는 그냥 보통의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은 빅뱅 GD의 생일이었다. 세상은 그게 다였다.

13.

2년 전 오늘의 기억 중에서 가장 놀라운 건, 고통의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엄청 아팠는데 아프다라는 말은 살아있지만, 느낌은 희미하다.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서 아마도 그것들을 이겨낸 것이 아닌가 싶다.

고통은 역시 총량이 정해져 있지만, 한순간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은 없다.

14.

그때 그 핏덩이가 옆에 누워서 잔다. 남편이 나에게 수고했다고 얼굴에 “수고했어!” 탁탁을 해줬는데, 아이가 그걸 보더니, “엄마 아프잖아!”라고 했다. 우리는 빵 터져서 웃고는 다행히 12시경에 자다 깬 아이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노래를 같이 불러줬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이 아기

15.

다시금 이 기억을 꺼내어 구구절절 적는 건 먼 훗날 아이가 ‘아 내가 우리 엄마가 나를 세상으로 끄집어낼 때 이렇게 고생했구나!’ 하면서 본인이 아기를 낳을 때 엉엉 울면서 잘못을 반성하라는 의미로 적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2년의 세월 동안 내가 저 아이를 다행히도 살려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마음과 함께 이제 고작 2년밖에 안 지났다는 사실이 소름 돋기도 하는 그러한 복합적인 마음이 들어 토해내는 이유가 더 크다.

그러니 내년에도 나는 이 복합적인 마음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 나의 아이를 1년간 어떻게든 살려낼 작정이다.

16.

아이가 생기고 인생이 다 끝날 것 같았던 순간이 있었다. 직장도 미래도 불안했던 어느 날.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는 아이 덕분에 돈 벌고, 아이 덕분에 인간이 되고, 아이 덕분에 산다.

어쩌면 오늘은 저 아이의 탄생이 아니라 나의 탄생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 간지나는 30대를 선물해준 나를 똑 닮은 저 빡세고 보석 같은 아이에게 나도 새끈한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 주어야겠다.

갓낫아이 임산부 엄마 베이비

[box type=”note”] 필자는 ‘내가니엄마’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 중입니다.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편집자) [/box]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