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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필자는 지난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투표하고 싶었던 유학생(국외 부재자)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결국 투표할 수 없었습니다. 대선과 총선에선 재외국민과 국외 부재자가 투표할 수 있지만, 지방선거에선 선거법상 투표할 수 없으니까요. 필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외국의 선거제도를 살펴보기로 결심합니다. 필자의 체험과 ‘공부’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편집자)

  1. 꼭 투표하고 싶었습니다
  2. 왜 투표용지를 바꿀 수 없을까
  3. “위대한 발견”, 선호투표제의 탄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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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대한 위대한 발견”(존 스튜어트 밀)

선호투표제, 들어보셨나요?

지구 상 어딘가에 더 훌륭한 선거제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선호투표제는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앞으로 선호투표제의 역사, 작동 원리, 장점에 대해서 짚어보고, 선호투표제를 실행하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선호투표제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죠.

1. 1819년 영국 버밍엄, 표를 독점하지 말라

1819년, 영국 버밍엄에서 한 학술 단체[footnote]Society for Literary and Scientific Improvement[/footnote]가 설립되었습니다. 단체 정관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단체 위원 투표 방식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투표방식은 이 단체의 회원이자 버밍엄에서 교사로 활동했던 토마스 힐(Thomas Wright Hill, 아래 사진)[footnote][Proportional Representation],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6[/footnote]이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발견”의 씨앗 

그는 선거에서 소수자의 대표성을 공정하게 보장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 “위대한 발견”의 투표제도의 씨앗을 창안합니다.

(좌)토마스 힐의 모습.[footnote][Proportional Representation],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6[/footnote] (우) 정관 앞표지
(좌)토마스 힐의 모습. (우) 정관 앞표지
투표용지에는 유권자의 이름이 쓰여있었습니다. 투표한 사람 중 일부는 투표를 여러 번 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투표방식이었길래 이렇게 투표했을까요?

[box type=”info” head=”토마스 힐의 투표제도 “]

1. 각 투표용지에는 그 투표용지를 받아든 유권자의 이름이 쓰여있다.
2. 5표를 받은 후보는 당선된다.
3. 한 후보자가 5표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면, 5표를 초과하는 잉여표(3표)는 그 표에 이름이 쓰여있는 해당 유권자에게 돌려준다.
4. 표를 돌려받은 유권자는, 당선된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다시 투표한다.
5. 잉여표가 없어질 때까지 3과 4의 과정을 반복한다. 필요하다면 같은 과정을 두 차례 혹은 세 차례 진행한다.[footnote]Thomas Wright Hill, [Laws of the Society for Literary and Scientific Improvement], 1819.10.19, 3-4쪽[/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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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방지 효과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에서는 이렇게 당선에 필요한 표(5표)보다 많은 표를 받은 후보자를 선택한 유권자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집니다. 가장 적은 표를 받아 당선될 수 없는 후보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footnote]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66쪽[/footnote] 이렇게 여러 번 투표하면 유권자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사표와 잉여표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투표하게 된 유권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지지하는 순서대로 투표하게 됩니다.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는 ‘가장 선호하는 한 명’이 누구인지를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권자들에게 후보자별 지지도 순위를 묻는 독특한 속성이 있습니다.

토마스 힐의 아들 롤랜드 힐의 영향으로 호주 애들레이드에서는 1840년 부터 선호투표제가 실시되었다. 위 이미지는 현재 호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쓰이고 있는 선호투표제 투표용지의 모습. 출처: 호주 선관위 홈페이지, www.aec.gov.au
토마스 힐의 아들 롤랜드 힐의 영향으로 호주 애들레이드에서는 1840년부터 선호투표제가 실시되었다. 위 이미지는 현재 호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쓰이고 있는 선호투표제 투표용지의 모습. 출처: 호주 선관위 홈페이지

소수자 대표성 확보 효과 

또한 토마스 힐은 한 명 혹은 매우 적은 수의 후보가 표를 독점할 수 없도록 투표제도를 설계했습니다. 한 후보자가 5표 보다 많은 표를 얻으면 이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 중 일부에게 다른 선택을 하도록 강제했죠.

게다가 가장 적은 표를 얻은 후보에게 투표했던 유권자에게도 다시 투표할 기회를 제공해서 사표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군소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의사도 선거 결과에 유효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토마스 힐은 이런 장치들을 통해서 소수자의 대표성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토마스 힐의 이런 의도는 그의 아들 롤랜드 힐의 전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전기에는 토마스 힐이 자신의 투표제도를 창안하며 제시한 첫 번째 목적이 쓰여있습니다.

“첫째,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대표한다.”[footnote]“1st. A fair representation (as near as can be) of all the classes of which the general body is composed.”- 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66쪽[/footnote]

토마스 힐은 유권자로부터 ‘각 후보자에 대한 선호도’라는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고, 그 선호도에 따라 ‘표를 재분배’함으로써 선거 결과의 공정성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비밀투표를 주요 원칙으로 삼는 현대 선거에 토마스 힐의 투표 방법을 직접 적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힐의 손에 의해 탄생한 이 수상한 투표제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부품’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그 부품은 덴마크에서 만든 ‘쿼터’라는 녀석입니다. 덴마크의 저명한 수학자였던 칼 안드레는 1856년, 당선자가 받아야 할 적절한 표의 숫자는 얼마만큼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2. 1856년 덴마크, 31.6% 득표율 당선이 적절한가

덴마크의 재무장관이었던 칼 안드레(Carl Geoge Andre, 아래 사진)[footnote]사진 출처: [Proportional Representation]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6[/footnote]가 1856년에 창안한 투표제도도 무척 ‘이상'(?)합니다.

‘쿼터’ 개념 도입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 하에서는 단지 다른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해서 당선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당락을 가르는 기준인 ‘쿼터’를 넘겨야 당선될 수 있습니다. 쿼터는 당선되기 위해서 후보자가 얻어야 하는 득표수의 최저한도입니다. 다른 모든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었더라도 쿼터를 넘지 못했다면 당선될 수 없습니다.

쿼터의 도입은 상대평가적인 선거의 기본적 성질에 절대평가적 요소를 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는 1855년 당시의 덴마크 헌법에 적혀있습니다. 그의 투표방식은 덴마크의 몇몇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시행됐습니다.

칼 안드레의 모습. 그는 국립군사대학(National Military College)에서 수학과 역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칼 안드레의 모습. 그는 국립군사대학(National Military College)에서 수학과 역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box type=”info” head=”칼 안드레의 투표제도”]

  1. 유권자들은 자신의 지지도에 따라 지지하는 후보를 차례대로 표시한다. 가장 지지하는 후보는 첫 번째, 그 다음으로 지지하는 후보는 두 번째, 또 그 다음으로 지지하는 후보는 세 번째…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2. 총투표수를 센다.
  3. 쿼터를 계산한다. 쿼터를 산출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총투표수 ÷ 뽑아야 하는 공직자의 수 = 쿼터 (소수점 이하는 무시)
  4. 개표를 시작하여 후보자 별로 득표현황을 집계해 나간다. 각 표에 표시된 첫 번째로 지지하는 후보에 따라 집계한다.
  5. 어떤 후보자가 쿼터에 해당하는 숫자만큼의 표를 얻으면 개표를 중단한다.
  6. 검표를 통해 이 후보자가 쿼터만큼의 표를 얻은 사실이 검증되면, 해당 후보자의 당선을 선언한다.
  7. 남은 표에 대한 개표를 재개한다. 이미 당선된 후보를 가장 지지하는 후보자로 표시한 표가 나올 경우, 그 표는 그 표에 표시된 두 번째로 지지하는 후보의 표로 본다.
  8. 개표가 완료될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footnote]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72-174[/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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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득표’만으로는 부족하다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에서 한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가장 많은 표를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모든 후보보다 많은 표를 받아도 당선이 확정되지 않습니다. 쿼터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됩니다.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에서 나왔던 ‘5표를 얻으면 당선’은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의 핵심인 ‘쿼터에 도달하면 당선’과는 다릅니다.

토마스 힐의 5표는 임의로 정해진 숫자입니다. 반면 칼 안드레의 쿼터라는 개념에는 한 선거에서 당선자가 얻어야 하는 적절한 표의 숫자를 계산해보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적절한’이라는 수식어에는 ‘당선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 가능한 한 투표한 유권자의 의사를 많이 반영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에서는 단순 다수대표제와 달리 한 후보자가 당선되기 위해 얻어야 할 절대적인 표의 숫자가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단순다수대표제 하에서 한 후보자는 다른 후보자에 비해서 많은 표를 얻기만 하면 당선됩니다. 이런 방식 아래에서는 투표 결과에 상당수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19대 총선 광주 동구 사례 

2012년에 있었던 19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 개표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선자는 무소속 박주선 후보입니다. 그런데 박주선 후보는 49,239표(투표수) 중 15,372표를 얻어 득표율이 31.6%밖에 되지 않습니다. 박주선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들의 득표율을 합하면 68.3%나 됩니다. 박주선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유권자가 당선되기를 바랐던 유권자의 2배가 넘습니다.

하지만 박주선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광주 동구 유권자 다수의 의사와 달리, 박주선 후보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자신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비율이 낮지만, 어쨌든 다른 후보들보다 많은 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단순 다수대표제 아래에서는 유권자 다수의 의사가 선거 결과에 반영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후보보다 많은 표를 받으면 당선되기 때문입니다.

19대 총선 당시 지역구 유권자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 (출처: 다음 '제19대 총선') http://media.daum.net/2012g_election
19대 총선 당시 지역구 유권자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당선된 의원들. (출처: 다음 ‘제19대 총선’)

칼 안드레는 위와 같은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쿼터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쿼터는 당선자 결정에 있어 단순 다수대표제보다 많은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만듭니다. 선호투표제에서는 절반을 넘는 유권자의 선택과 충돌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선호투표제 하에서는 유권자 다수의 의사와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낮다 자료: FairVote Minnesota, [FairVote_IRV_Display], http://fairvotemn.org/
선호투표제 하에서는 유권자 다수의 의사와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낮다. (원출처: 
FairVote Minnesota, [FairVote_IRV_Display])

잉여표 재분배 효과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에서는 쿼터에 이미 도달한 후보자를 지지하는 표가 나왔을 경우에는 즉각 그 표에 표시된 차순위 후보의 표로 보고 집계함으로써 잉여표가 재분배되는 것과 유사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이는 추가적인 투표행위를 거치는 토마스 힐의 방식과 외형상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한 후보자가 표를 독점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저 득표자의 표가 재분배되는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와 달리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에서는 최저 득표자의 표가 재분배되지 않습니다.[footnote]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74쪽[/footnote] 쿼터를 넘지 못한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표는 그대로 사표가 된다는 점에서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는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에 비해서 소수자의 대표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쿼터 개념의 특성과 한계 

여기서 잠깐 쿼터의 개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선호투표제에 따라 실시되는 선거에서 쿼터는 하나의 유권자 그룹에서 두 명 이상의 당선자를 배출할 때만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유권자 그룹에서 한 명의 당선자만 배출되는 선거에서는 일반적으로 쿼터 대신 과반 이상의 득표해야 한다는 규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구(하나의 유권자 그룹)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한국의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선호투표제를 실시한다면 과반 이상의 표를 얻은 후보가 당선됩니다.

투표 체크
LWVC, CC BY

하지만 두 개의 지역구를 합쳐서 하나의 지역구로 만든 뒤에 이렇게 합쳐진 하나의 지역구에서 선호투표제를 적용해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다면, 쿼터를 계산해서 그 쿼터만큼의 표를 얻은 후보자 두 명이 당선됩니다. 따라서 하나의 유권자 그룹에서 한 명의 당선자만 배출되는 경우에는 쿼터를 계산하는 과정이 과반의 표가 몇 표인지 계산하는 과정으로 대체됩니다.

당선자가 쿼터만큼의 표를 얻었다면, 낙선한 모든 후보가 득표한 표의 합이 당선자가 득표한 표의 합보다 많은 상황은 수학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 하에서 후보자가 당선되기 위해서는 ‘다른 후보보다 많은 득표’가 아니라 ‘투표한 모든 유권자의 표’를 얻어야 합니다. 한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선거라면 100%의 지지를 얻은 후보자가 당선됩니다. 여러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선거라면 100/n (n은 당선자의 숫자)에 해당하는 만큼의 표를 받아야 합니다.

두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선거라면 후보자는 각각 50%의 지지를, 세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선거라면 각각 33.33%의 지지를, 네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선거라면 각각 25%의 표를 받아야 당선됩니다. 칼 안드레가 고안한 방식에 따라 계산된 쿼터는 당선된 후보자들이 총투표수 전체에 해당하는 표를 얻어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개선됐습니다.

3. 1857년 영국 런던, 현대 선호투표제의 탄생

토마스 힐의 투표제도에서는 유권자가 표시한 ‘선호도’에 따라 ‘표의 재분배’가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표의 독점을 방지하고 소수자의 대표성을 강화했습니다.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에는 ‘쿼터’라는 독창적 개념이 있었습니다. 쿼터는 당락을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쿼터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하면 당선될 수 없습니다. 이 절대평가적 기준은 각 후보별 득표수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당선자를 결정하다가 오히려 다수의 의견이 선거 결과에 반영되지 않는 역설적 상황의 발생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두 가지 투표제도의 ‘주요 부품’인 선호도, 표의 재분배, 쿼터를 모두 한데 섞어 투표제도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토마스 헤어, 현대적 선호투표제를 ‘발명’하다 

영국 런던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토마스 헤어(Thomas Hare, 아래 사진)[footnote]사진 출처: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6[/footnote]는 1857년 ‘대표제 시스템'( The Machinery of Representation)이라는 소책자를 내놨습니다. 토마스 헤어는 여기서 자신이 고안한 투표제도를 하나 제시합니다. 토마스 헤어는 토마스 힐이나 칼 안드레의 투표제도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에는 선호도와 쿼터의 개념이 모두 녹아들어 있으며, 표의 재분배라고 볼 수 있는 요소도 들어있습니다. 세 가지 개념이 모두 반영된 현대적 선호투표제의 효시입니다.

(좌) 토마스 헤어의 모습 자료: The Macmillan Company, New York, 1926 (우) 토마스 헤어는 그의 책에서 현대적 선호투표제의 원형을 제시했다. 그의 책 '대표제 시스템'(The Machinery of Representation) 표지
토마스 헤어 ㅣ  현대적 선호투표제의 원형을 제시한 그의 책 ‘대표제 시스템’ 표지

[box type=”info” head=”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 “]

  1. 총투표수를 계산한다.
  2. 쿼터 혹은 총투표수의 과반에 해당하는 표의 숫자를 계산한다.
  3. 각 후보자를 가장 지지한다고 표시한 표를 집계한다
  4. 3의 결과 쿼터 혹은 과반만큼 득표한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3의 결과 가장 적은 표를 얻은 후보자의 이름을 모든 투표용지에서 지운다.
  5. 4의 과정을 거친 표를 다시 집계한다.
  6.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위의 4와 5의 과정을 반복한다.[footnote]Thomas Hare, [The Machinery of Representation 2nd Edition], 1857, Lincon’s Inn, 16-22쪽[/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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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통해 보는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를 예시[footnote]Alexander Redford, 2011년 가을학기 ‘Exploring Mathematics’ 수업자료 중 [Ch.17.1: Voting Methods],Washington State University, Dept. of Mathematics, 5-6쪽[/footnote]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한 명이 당선되는 어떤 선거에 A, B, C 세 명의 후보자가 출마했습니다. 1차 개표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ABC’라고 표시된 표는 A를 첫 번째로, B를 두 번째로, C를 세 번째로 지지한다고 표시한 표를 의미합니다.

1. 총투표수를 계산합니다. 0 + 7 + 5 + 3 + 4 + 1 = 20. 총투표수는 20표입니다.
2. 한 명의 당선자만 나오는 선거니까 총투표수의 과반에 해당하는 표가 몇 표인지 계산합니다. 20표의 절반인 10표보다 한 표 많은 11표입니다. 11표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당선됩니다.
3. 첫 번째로 지지한다고 표시한 후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표를 집계합니다.

선거 투표

4. 1차 집계의 결과 B후보가 8표를 얻어 최다득표를 했지만 세 명의 후보 중 과반에 해당하는 11표를 득표한 후보는 없습니다. 규칙에 따라 가장 적은 표를 얻은 C후보의 이름을 모든 투표용지에서 지웁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 투표

5. 표를 다시 집계합니다.

선호투표제 선거 투표

6. 표를 다시 집계한 결과, A후보가 과반에 해당하는 11표를 얻었습니다. A후보가 당선됩니다. 가장 적은 표를 얻었던 C후보의 표를 재분배한 결과, 1차 집계에서는 2등에 머물렀던 A후보가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는 유권자가 나타낸 선호도에 따른 표의 재분배가 일어납니다. 위에 제시한 사례에서는 한 명의 당선자가 나오는 상황을 가정했기 때문에 과반 득표자가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지만, 여러 명을 뽑는 투표였다면 쿼터도 적용됩니다. 이렇게 선호도, 쿼터, 표의 재분배라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는 투표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선호투표제, 세계로 퍼져나가다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는 당시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던 스위스 사람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1882년 스위스 바젤 선거에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를 변경해서 적용하자는 제안이 나옵니다. 그 다음해에 열린 선거에서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는 그 실용성이 입증되었습니다. 1889년에는 스위스 연방정부가 도입을 결정합니다.

스위스의 뒤를 이어 벨기에(1899년), 핀란드(1906년), 스웨덴(1909년), 포르투갈(1911년), 불가리아(1911년) 등이 선호투표제를 채택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독재가 시작되기 전인 1919년과 1921년 두 번의 선거에서 사용됐습니다.[footnote]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78-179쪽[/footnote] 미국, 호주, 아일랜드,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John_Stuart_Mill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사진)은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를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정치에 대한 이 위대한 발견은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듯이 나에게도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한 새롭고 낙관적 희망이라는 영감을 주었다. 누구든 이것을 한낱 이론적 미묘함이나 기발한 생각 정도로 치부하고 내동댕이치는 사람의 목적은 가치가 없는 경향이 있으며, 관심을 둘 가치도 없다. 그들은 무능한 정치인이며, 미래의 정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footnote]“This great discovery, for it is no less, in the political art, inspired me, as I believe it has inspired all thoughtful persons who have adopted it, with new and more sanguine hopes respecting the prospects of human society…Anyone who throws it overs as a mere theoretical subtlety or rotchet, tending to no valuable purpose and unworthy of the attention of practical men, may be pronounced an incompetent statesman, unequal to the politics of the future.”, 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79-180쪽에서 재인용[/footnote]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를 기초로, 후대의 사람들이 개선을 거듭한 결과 선호투표제는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선호투표제의 형태는 다음 동영상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YouTube 동영상
YouTube 동영상

잉여표를 재분배하는 방식이나 쿼터를 계산하는 방식 등 세부적으로 토마스 헤어의 투표제도와 달라지긴 했으나, 기본적 원리는 같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현재의 선호투표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많습니다. 현재 선호투표제를 부르는 이름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 미국에서는 즉석결선투표제(Instant-Runoff Voting)
  • 아일랜드에서는 단기이양식투표제(Single TransferableVote)
  • 벨기에에서는 선호투표제(Preference Voting)
  • 호주에서는 선택투표제(Alternative Vote)

부르는 명칭뿐 아니라 세부적인 형태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북아일랜드(Nothern Ireland)에서는 얼만큼의 선호도만 표시할 수 있다고 정해진 최저한도나 최대한도가 없습니다. 유권자는 제한 없이 원하는 만큼 선호도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footnote]영국선관위(The Electoral Commission), [The Single Transferable Vote in Northern Ireland], 2005.4.20, 1쪽[/footnote]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한 명의 후보에게만 투표할 수 있습니다(한 명의 후보만 찍는 것은 같지만, 당선자 결정 방식은 한국과 다릅니다).[footnote]Rudy B. Andeweg & Joop van Holsteyn, [Second Order Personalization: Preference Voting in the Netherlands], Paper prepared for the ECRP General Conference, 2011, 3쪽[/footnote]

네덜란드 투표용지의 모습. 한 정당에서 수십명의 후보자가 출마하고, 유권자는 이 중 한명의 후보를 선택한다. (출처: www.democraticaudit.com)
네덜란드 투표용지의 모습. 한 정당에서 수십 명의 후보자가 출마하고, 유권자는 이 중 한 명의 후보를 선택한다. (출처: www.democraticaudit.com)

라트비아의 경우에는 독특하게 긍정적 선호도(positive preference)를 나타낼 것인지 부정적 선호도(negative preference)를 나타낼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서 표시할 수 있습니다.[footnote]Frances Millard & Marina Popescu, [Preference Voting in Post-communist Europe], 2010, University of Essex, 9쪽[/footnote]

라트비아 투표용지의 모습. 라트비아에서 유권자는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해서 표시해야 한다. 왼쪽처럼 후보자의 이름을 지우면 부정적 선호도를, 후보자의 이름 옆에 더하기 기호(+)를 쓰면 긍정적 선호도를 나타낼 수 있다. (출처: Making Electoral Democracy Work 홈페이지, http://electoraldemocracy.com/)
라트비아 투표용지의 모습. 라트비아에서 유권자는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해서 표시해야 한다. 왼쪽처럼 후보자의 이름을 지우면 부정적 선호도를, 후보자의 이름 옆에 더하기 기호(+)를 쓰면 긍정적 선호도를 나타낼 수 있다. (출처: Making Electoral Democracy Work)

긍정적 선호도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후보자를 나타낸 것이라면, 부정적 선호도는 당선되지 않기를 바라는 후보자를 나타낸 것입니다. 저는 편의상 지금까지 불렀던 대로 선호투표제라고 통칭하겠습니다.

지도에서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색칠된 나라는 선호투표제를 실시한다. (출처: European Parliamentary Research Service, '2014 European elections: national rules')
지도에서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색칠된 나라는 선호투표제를 실시한다. (출처: European Parliamentary Research Service, ‘2014 European elections: national rules’)

유럽의 나라들 외에도 호주는 토마스 힐의 아들 롤랜드 힐 경의 영향으로 일찍이 1840년에 사우스오스트렐리아 주 애들레이드(Adelaide, South Australia)의 공직선거에서 선호 투표제를 실시했습니다. 롤랜드 힐 경은 당시에 사우스오스트렐리아 식민지화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footnote]Clarence Hoag & George Hallett, [Proportional Representation], 1926, The Macmillan Company, 167쪽[/footnote]  현재도 호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선호투표제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버몬트주 벌링턴,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등에서 선호투표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에 선호투표제 도입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한 적도 있습니다.[footnote]Barack Obama, [SB1789], 92nd General Assembly, 2002.2.5., www.ilga.gov[/footnote]

일리노이주 의회 홈페이지 갈무리, http://www.ilga.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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