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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필자는 지난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투표하고 싶었던 유학생(국외 부재자)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결국 투표할 수 없었습니다. 대선과 총선에선 재외국민과 국외 부재자가 투표할 수 있지만, 지방선거에선 선거법상 투표할 수 없으니까요. 필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외국의 선거제도를 살펴보기로 결심합니다. 필자의 체험과 ‘공부’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편집자)

  1. 꼭 투표하고 싶었습니다
  2. 왜 투표용지를 바꿀 수 없을까
  3. “위대한 발견”, 선호투표제의 탄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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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게 시험입니다. 하지만 공부하는 과정에서 시험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험을 통해 부족한 점을 점검하고 앞으로 할 공부 방향과 방법을 개선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학력 수준을 있는 그대로 측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이 생각하는 정답을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학생이 원하면 답안지를 교체해주는 이유입니다.

수능 답안지도 바꿔주는데 왜 투표용지는 못 바꿀까 

실수로 답을 잘못 표시했거나 생각이 바뀌었는데도 답안지를 바꾸지 못하고 제출해야 한다면 해당 시험은 학력 수준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 바꿀 수 없는 답안지가 있습니다. 답을 잘못 표시했더라도 바로잡을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표시를 지울 방법도 없고, 답안지를 바꿔주지도 않습니다.

네, 투표용지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 기표하면 바로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실수로 자신이 반대하는 후보를 찍었다면 무효표를 만드는 정도의 방법이 차선입니다. 여러 장의 투표용지에 기표해야 하는 복잡하고 헷갈리는 지방선거에서도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 한 사람이 7표를 찍어야 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 한 사람이 7표를 찍어야 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절차도 복잡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는 투표절차도 복잡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무렵까지 투표시간은 충분합니다. 사전투표제가 도입되어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너 번쯤 다시 기표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투표를 못 하는 상황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투표용지를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에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지난 19대 총선 지역구 국회의원 개표결과를 보면 당시 24만 6,855표의 무효표가 발생했습니다. 전체 투표수(2,187만530표)의 1.1% 정도에 해당합니다. 평균적으로 한 지역구에서 8만8905명이 투표했고 이 중 1,003명의 표가 무효표가 되었습니다.

이 무효표 중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려고 일부러 무효표를 던진 유권자의 비율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의 1.1%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시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국가 중대사인 선거에서 그깟 종이 몇 장 때문에 1.1%에 해당하는 시민의 의사가 정확하게 선거결과에 나타나지 못한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고 있는 세 나라는 투표용지 교체를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나라는 미국입니다.

1. 미국 – ATM으로 계좌이체하듯 투표하기

미국 선관위(The U.S. Election Assistance Commission)가 공개하고 있는 가이드라인에는 ‘선거 시스템의 형태(Types of Voting System)’에 대한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선거 시스템이 어떤 기능을 갖춰야 하는지 규정해 놓은 부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거 시스템’이란 투표와 개표과정에서 투표용지를 처리하고, 투표결과를 발표하며, 감사에 필요한 정보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계적 혹은 전자적 장비의 총체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미국 선관위는 선거 시스템이 보유해야 할 기능 다섯 가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footnote]미국 선관위(Unites States Election Assistance Commission), ‘2015 자발적 선거시스템 가이드라인’ (Voluntary Voting System Guidelines), Volume1·Version1.1, 6-7쪽[/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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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관위 – ‘2015 자발적 선거시스템 가이드라인’

1)투표가 완료되고 개표되기 전에 공개적이지 않고 독립된 환경에서 유권자가 자신이 어떤 후보자에게 투표 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footnote] permit the voter to verify (in a private and independent manner) the vote selected by the voter on the ballot before the ballot is cast and counted.[/footnote]

2)투표가 완료되고 개표되기 전에 유권자에게 공개적이지 않고 독립된 환경에서 투표용지를 바꾸거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footnote]provide the voter with the opportunity (in a private and independent manner) to change the ballot or correct any error before the ballot is cast and counted.[/footnote]

3)유권자가 하나의 공직에 한 명 이상의 후보자를 선택했다면, 유권자에게 해당 사실과 함께 해당 투표행위가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알려줘야 하며, 투표가 완료되고 개표되기 전에 투표용지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footnote]notify the voter if he or she has selected more than one candidate for a single office, inform the voter of the effect of casting multiple votes for a single office, and provide the voter an opportunity to correct the ballot before it is cast and counted.[/footnote]

4)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다른 유권자처럼 공개적이지 않고 독립된 환경도 제공해야 한다.[footnote]be accessible for individuals with disabilities in a manner that provides the same opportunity for access and participation (including privacy and independence) as for other voters.[/footnote]

5)관련 선거권 법률에 따라 외국어로도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footnote]provide alternative language accessibility pursuant to Section 203 of the Voting Rights Act.[/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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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사용되고 있는 투표기기. DS200(위)은 개표에, Automark(아래)는 장애인 유권자의 기표에 사용된다. (출처: 미니애폴리스 홈페이지, http://vote.minneapolismn.gov)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사용되고 있는 투표기기. DS200(위)은 개표에, Automark(아래)는 장애인 유권자의 기표에 사용된다. (출처: 미니애폴리스 홈페이지)

위 다섯 가지 기준 중에서 첫 번째부터 세 번째에 걸쳐 명시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유권자가 투표를 완료하기 전에 자신이 투표한 내용을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실수 등으로 인해 자신의 뜻과 달리 기표한 투표내용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의 제도는 ATM기기를 사용해 누군가에게 돈을 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최종 거래확인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입력한 계좌번호가 맞는지, 돈을 받을 사람이 내가 돈을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바로잡을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최종 거래확인 버튼을 누르고 나면 돈을 엉뚱한 사람에게 보냈더라도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해당 기능을 보유하지 않은 선거 시스템은 미국 선관위 산하 선거시스템 시험연구원(Voting System Testing Labs)의 인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선관위가 공개하는 정보에 따르면 미국의 모든 주가 선거시스템 연구원의 인증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강제하는 법률이나 제도도 없습니다. 하지만 선거 시스템의 기능을 평가할 제도에 대한 주 차원의 기준이 없는 주는 전체 50개 주 가운데 10개 주 남짓이며, 대다수 주들은 그 수준에 차이는 있지만, 선거시스템 연구원의 인증 기준을 인용해서 선거 시스템을 평가하고 있습니다.[footnote]미국 선관위 인터넷 홈페이지, Voting System Testing & Certification, www.eac.gov [/footnote]

파란 핀으로 표시된 지역은 미국 선관위의 인증을 받은 선거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노란 핀으로 표시된 지역은 미국 선관위의 인증을 받은 선거시스템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갖추고 있다. (출처: 미국 선관위 홈페이지, www.eac.gov)
파란 핀으로 표시된 지역은 미국 선관위의 인증을 받은 선거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노란 핀으로 표시된 지역은 미국 선관위의 인증을 받은 선거시스템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갖추고 있다. (출처: 미국 선관위 홈페이지)

유럽의 선진적 복지제도를 언급하면 으레 나오는 반론처럼, 미국은 그런 장비를 다 갖출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나라니까 이런 제도를 실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지 못하고, 오랫동안 선진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돈이 들어가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토니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선거 선진국 에스토니아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에스토니아의 1인당 GDP는 2만 달러 수준입니다. 체코와 비슷한 수준이고, 2만8천 달러가량 되는 한국보다는 꽤 낮습니다. ‘선진국’하면 떠오르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 서유럽 나라의 1인당 GDP는 4만 달러가 넘으니 에스토니아의 두 배 가량 됩니다. 미국의 1인당 GDP는 에스토니아의 세배에 가까운 5만5천 달러 정도가 됩니다.

이미지12 자료: 세계은행 인터넷 홈페이지 갈무리, 2016.2.23일 현재, www.worldbank.org
세계은행 홈페이지 갈무리, 2016.2.23일 현재.

돈만 많다고 선진국?

하지만 부유하지 않다고 에스토니아를 선진국 대열에서 제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겨레가 2015년 11월 19일 세계경제포럼이 ‘세계 성 격차 지수 2015’ 보고서에서 발표한 내용 중 OECD 가입국들의 순위만 간추려 보도한 내용을 보면, 에스토니아의 양성평등 수준(34개국 중 15위)은 부유한 서방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정치 영향력 부문의 양성평등 순위는 16위로 벨기에, 오스트리아, 캐나다, 호주, 미국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 참여 부문에서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보다 양성평등의 수준이 높습니다.

출처: 프리덤 하우스, ‘Freedom of the Press 2015’
출처: 프리덤 하우스, ‘Freedom of the Press 2015’

프리덤 하우스가 2015년 4월에 발표한 언론 자유도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의 언론 자유도 순위는 14위입니다. 같은 ‘언론자유국’으로 평가받기는 했지만, 독일(22위), 캐나다(22위), 오스트리아(31위), 미국(31위), 프랑스(35위), 영국(38위)보다도 높은 순위입니다. 대한민국(67위)은 ‘부분적 언론자유국’으로 분류됐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한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프리덤 하우스가 2015년 10월에 내놓은 인터넷 자유도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에스토니아는 아이슬란드에 이어 65개국 중 2위입니다. 0점에 가까울수록 인터넷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인데, 에스토니아는 6점을 받았습니다.

반면 선진국 하면 떠오르는 캐나다(16점), 독일(18점), 미국(19점), 프랑스(24점), 영국(24점) 등은 에스토니아보다 몇 배씩 높은(나쁜) 점수를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은 34점으로 에스토니아보다 (주6) 두 배 가량 점수가 높습니다.

출처: 프리덤 하우스, ‘Freedom of the Press 2015’
인터넷 자유도(점수가 낮을수록 자유도는 높음, 출처: 프리덤 하우스, ‘Freedom of the Press 2015’)

1인당 GDP가 에스토니아보다 두세 배씩 높은 나라들의 인터넷 자유도가 에스토니아보다 몇 배나 낮습니다. 1인당 GDP가 높으면 그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여기던 인식에 어긋나는 통계입니다.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낮은 에스토니아가 인터넷 자유도나 언론 자유도는 한국보다 훨씬 높습니다.

부유한 북미와 서유럽의 나라들과 견주어 봐도 앞선 축에 속합니다. 언론 자유도와 인터넷 자유도는 한 나라의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국민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종교 등 개인의 생각을 얼마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지 다양성이 얼마나 보장받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의 연구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각 나라의 민주주의 순위를 보면 에스토니아는 34위를 차지했습니다. 노르웨이(1위), 캐나다(7위), 독일(13위), 프랑스(23위)와 같은 선진국에 비해서도, 21위에 오른 대한민국에 비해서도 낮은 순위입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The Economist, EIU) ‘Democracy Index 2014’ 보고서에서 발췌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The Economist, EIU) ‘Democracy Index 2014’ 보고서에서 발췌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면서 분리 독립한 동유럽 나라들 중에서는 순위가 상당히 높습니다. 몰도바(69위), 조지아(81위), 아르메니아(113위), 벨라루스(125위), 투르크메니스탄(160위) 등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분리 독립한 다른 나라들의 민주주의 수준과 비교해보면 에스토니아는 겨우 26년 만에 놀라운 속도로 민주주의 선진국을 향해 발전하고 있습니다. 2015년 현재 에스토니아의 민주주의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발전 속도만은 칭찬 받을 만 합니다.

투표용지에 관해 이야기하다 말고 에스토니아의 현재 수준을 나타내는 여러 지표를 살펴봤습니다. 작정하고 삼천포로 빠진 이유는, 선진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 일인당 GDP가 5만 달러쯤 되는 서구의 ‘부자나라’ 정도는 돼야 도입해서 운영할 수 있는 값비싼 사치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인당 GDP를 보면 에스토니아는 분명 대한민국보다 부유하지 않습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서구의 부자나라들에 비해서 1/2나 1/3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는 인터넷 자유도 순위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나라들을 제치고 2위에 올랐습니다. 언론자유도도 독일이나 캐나다보다 높은 14위입니다. 양성평등 지수도 OECD 가입 국가들 중에서 중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는 단지 돈이 많다고 선진국이 아니며, 돈이 없다고 선진적 시스템을 도입하고 운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보다 가난한 에스토니아도 하고 있는데 돈도 더 많고 민주주의의 역사도 더 긴 대한민국이 못할 리 없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선거제도 

본론으로 돌아와 에스토니아의 선거제도에 대해 말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제도는 미국의 제도보다 선진적입니다. 미국의 투표제도는 ATM에서 계좌이체를 할 때처럼 최종 투표확인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투표 내용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최종 투표확인 버튼을 누르고 나면 나중에 잘못 투표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더라도 투표 내용을 고치기는 힘듭니다.

이에 반해, 에스토니아에서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한 번 투표행위를 완료하고 난 뒤에도 투표내용을 고칠 기회가 있습니다. 우선 에스토니아의 투표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동영상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YouTube 동영상

인터넷을 통해 투표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보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제한적이나마 다시 투표할 수 기회가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투표는 정해진 투표기간 내라면 횟수의 제한 없이 다시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알아서 제일 마지막에 투표한 표 하나만 개표됩니다.

종이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투표도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기 전이라면 투표용지를 다시 발급받아 투표내용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투표한 뒤에, 투표소에 가서 종이 투표용지를 통해 다시 투표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투표소에서 투표한 표만 개표됩니다.

이런 투표시스템이라면 단순 실수로 잘못 기표했을 경우뿐만 아니라, 투표 기간 내에 지지하고 싶은 후보가 바뀐 경우에도 투표를 다시 해서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으니 선거결과에 유권자의 의사가 더 잘 반영됩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에서는 인터넷 투표는 7일 동안, 투표용지를 통한 투표는 3일 동안 할 수 있습니다. 투표일을 앞두고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어떤 정치세력의 의혹 제기나 주장에 대해서도 차분히 검증해보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돌발 변수에 의해 표심이 심각하게 왜곡 당할 가능성이 작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선거 시스템은 에스토니아 선관위가 공개하고 있는 가이드라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에 쓰여있는 ‘전자투표의 기본원칙’ 여섯 가지 중 마지막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footnote]에스토니아 선관위(Estonian National Electoral Committee), <E-Voting System General Overview>, 7쪽[/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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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선관위- ‘전자투표의 기본원칙’ 여섯 가지 중 마지막 원칙

(6) 유권자는 전자적으로 투표한 자신의 투표를 바꿀 수 있다:
1) 선거일 10일 전부터 4일 전까지의 기간에는 전자 투표를 다시함으로써
2) 선거일 6일 전부터 4일 전까지의 기간에는 투표용지를 사용해 투표함으로써 [footnote]

(6) The voter may change his or her electronically given vote:
1) by voting again electronically from 10th to 4th day before Election Day;
2) by voting with a ballot paper from the 6th to the 4th day before Election Day.

[/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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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에서는 기표하다가 실수를 했거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투표 내용을 고칠 수 없습니다. 2014년 6월 14일에 있었던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투표소를 찾은 시민들을 인터뷰해서 보도한 연합뉴스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 구로구 성공회대 투표소를 찾은 이 모(74) 씨는 본의 아니게 기권표를 던져야 했다. 이 씨는 “(용지와 후보자가) 하도 많아서 얼이 빠졌다”면서 “서울 시장 뽑을 때 한 명만 찍어야 하는데 4명 다 찍어서 물어보니 용지 교체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투표가 1, 2차로 나뉘어 진행되다 보니 1차 투표만 하고 투표소를 나가려는 시민도 종종 눈에 띄었다.

-연합뉴스, ‘서울 일꾼을 내 손으로’ 투표소 찾은 시민들, 2014. 6. 4.  중에서

미국이나 에스토니아였다면 투표 내용을 고칠 기회가 있으니 이 씨도 실수를 바로 잡고 지지하고 싶었던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투표용지 한 장만 바꿔줄 수 있었다면 애써 투표소를 찾은 이 씨는 안타깝게 기권표를 던지고 돌아가지 않아도 됐고,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참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6.4 지방선거 투표일인 4일 오전 서울 사당3동 동작 삼성래미안 아파트 제6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하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760933.html
6.4 지방선거 투표일인 4일 오전 서울 사당3동 동작 삼성래미안 아파트 제6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하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왜 투표용지를 바꿔주지 않을까 

하지만 투표용지를 바꿔주지 않는 대한민국의 선거제도는 순간 실수나 착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유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지역 선관위 관계자는 2015년 11월 26일 투표용지를 바꿔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직선거법 제157조(투표용지수령 및 기표절차) 제5항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5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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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 제157조(투표용지수령 및 기표절차) 제5항

투표용지를 교부받은 후 그 선거인에게 책임이 있는 사유로 훼손 또는 오손된 때에는 다시 이를 교부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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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관위는 단순 실수나 착각으로 유권자가 기표를 잘못한 상황도 ‘선거인에게 책임이 있는 사유로 훼손 또는 오손된 때’로 보고 투표용지를 바꿔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뉴질랜드 선거법(Electoral Act 1993) 16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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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선거법(Electoral Act 1993) 169절

(1)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용지 발행담당자가 실수로 기표를 잘못했다고 납득했을 경우에 유권자는 새로운 투표용지를 발급받을 수 있다. 다만 투표용지의 재발행은 잘못 기표한 투표용지를 투표용지 발행담당자에게 반납한 뒤여야 한다.[footnote](1)Any voter who, nor having deposited his or her ballot paper, in the ballot box, satisfies the issuing officer that the voter has poilt it by inadvertence may be supplied with a fresh ballot paper, but only after the spoilt one has been returned to the issuing officer.[/foot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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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가 실수로 잘못 기표했다면 투표용지를 바꿔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투표용지를 바꿔주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 157조와 정반대입니다.

공직선거법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유권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투표제도를 설계하는 것은 선거 관리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에 대한 유권해석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는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5항에 대해 위와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률을 개정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에서 투표 내용을 고칠 권리를 보장받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선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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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기계 방식도 좋은 투표방식이 아님이 이미 증명되고 있습니다. 해킹에 매우 취약하고 중간에 조작이 오히려 더 용이합니다. 현재 종이투표는 모서리 일련번호 일치로 투표용지의 유효성을 증명하는데 투표용지 교체괴정이 생김으로써 부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투표용지 교체가 가능하려면 투표용지 실명을 통해 중복 용지가 존재하지 않는지 필터하는 방법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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