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 ‘우리나라가 창피하다’고 말하는 일은 흔치 않다.
20세기 절반을 최강대국으로 살아온 나라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미국인들의 성격도 큰 이유를 차지한다. 동아시아나 여타 지역들과는 달리 소위 ‘부끄러움의 문화'(shame culture)가 없거나 아주 약한 나라가 미국이다. 현행법을 어긴 게 아니라면 회사가 세금을 빼돌리기 위해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당당한 나라가 미국이다. 어쨌거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서 창피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다.
부끄러운 미국인들
그런데 공화당 경선을 둘러싸고 미국인에게서 그런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이번에는 ‘최고위 외교관'(top diplomat)인 존 케리 국무장관이 “미국의 선거가 우리나라에 부끄러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제까지 그 정도 위치의 공인이 한 적이 없는 수준으로 막말을 일삼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행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다. 언론 혹은 발언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제리 스프링어 쇼를 만들어낸 나라에서,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미국인들이 창피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백악관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츄리닝을 입는 건 자유인데 츄리닝을 입고 결혼식에 갈 수는 없다’는 태도다. 트럼프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미국인들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그런 태도로 백악관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생기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vs. 그렇기 때문에
궁금한 것은, 그 사람을 결혼식(백악관)에 초대하고 싶은데 하필 ‘츄리닝'(운동복)을 입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츄리닝을 입고 있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시키려는 것인가이다. 즉, 안하무인 태도와 여성비하, 그리고 무엇보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기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태도 ‘때문에’ 인기가 있는 것인가?
트럼프 현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가진 메시지가 (손쉽게 발견되는) 그의 단점들보다 깊다고 본다. 북부 주에서 샌더스와 지지층이 겹치는 사실도 그런 설명을 지지하는 증거로 사용된다. 즉, 츄리닝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
트럼프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가 츄리닝을 입지 않았어도 그만큼 주목을 받았겠느냐고 묻는다. 즉, 그의 기이한 언행이나 인종주의적인 발언이야말로 그의 인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물론 두 견해 중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미국이 아니라 어떤 사회도 그렇게 단순하고 균질한 유권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각 주의 트럼프 지지율과 인종주의적인 인터넷 검색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트럼프 지지자들을 구분해내는 가장 확실한 요소는 바로 인종주의적인 단어를 특정 지역에서 얼마나 많이 검색했느냐는 것이다.
본선 승리 가능성과의 관계
트럼프 지지자의 인종주의적인 태도와 트럼프의 본선 승리 가능성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 어떤 후보가 미시시피와 매사추세츠처럼 성격이 극명하게 다른 두 주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는가?
- (민주당 성향의) 하와이에서 이기면서, (공화당 성향의) 캔자스에서 지는 공화당 후보는 도대체 어떤 후보인가?
매사추세츠를 보자. 트럼프는 여기에서 49%라는 최고 득표율로 승리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매사추세츠의 경선 승리는 본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 주에서 공화당 경선에 참여한 사람은 63만 명이고, 민주당 경선에는 1백2십만 명이 참가했다. 진보적인 민주당 지지의 매사추세츠에서는 당연한 결과다. 그런 참여율을 고려하면 그 주의 경선 전체를 통해 트럼프가 얻어낸 표는 17%에 불과하다.
본선에 진출한다면 트럼프의 예상 가능한 득표율이 바로 그 17%이다.
매사추세츠나 미시간 같은 북부 주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다고 해서 트럼프가 본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승리할 것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가 바로 그 지역 트럼프 지지자의 근원이다.
위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기자는 닉슨의 참모였던 케빈 필립스가 쓴 ‘부상하는 공화당 다수파'(The Emerging Republican Majority)라는 책을 인용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니그로와 다른 소수인종이 민주당을 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매사추세츠 같은) 동북부의 가톨릭 인구들이 민주당을 떠나 공화당으로 왔다.
민주당이 우세한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s; 민주당이 우세한 주)에 사는 공화당 지지자의 성향은 1980년대 미시간에서도 발견된다. 민주당을 지지하던 매콤 카운티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민주당이 소수인종의 권익에 힘을 쓰는 것에 실망해서 공화당 후보인 레이건을 지지했다는 것이다(바로 그 매콤 카운티에서 트럼프는 이번에 48%라는 엄청난 지지율로 승리했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백인 블루칼라와 트럼프 지지자가 북부 주에서 겹치는 현상은 바로 그러한 인종적인 문제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러한 사람들이 트럼프가 북부 주에서 바람을 일으키게 돕고 있다는 것이다.
실종된 키잡이
문제는 파이브서티에이트(FiveThirtyEight)의 설명처럼, 그러한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 공화당 지지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본선에서는 지금 느끼는 것 같은 바람이 일어나기는 힘들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들(민주당 우세 지역의 공화당 지지자)은 과거의 선거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기축세력의 우방이었다. 진보적인 주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서부와 남부의 사회적 보수의 기독교 세력들보다는 더 중도에 가깝고, 덜 종교적이며, 더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남부 기독교인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막아주고, 당이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아준 무게추가 바로 그들이었다.
당이 오른쪽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은 다시 말해 (본선 승리에 필수적인) 중도 표를 가져오게 도와준다는 뜻이며, 결과적으로 공화당 기축 세력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런 역할을 했던 그들이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런 키잡이 역할을 이번 선거에서는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북부, 중서부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크루즈가 일부 주에서 이겼지만, 여전히 트럼프가 가진 힘의 원천은 남부에 있다. 그렇게 남부 세력의 힘을 얻은 후보가 북부의 균형잡이 무게추를 무력화했다는 것은 공화당이 본선 승리를 어렵게 만드는 후보를 뽑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본선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공화당의 기축세력은 크루즈를 중심으로 빠르게 힘을 뭉치고 있다. 이들이 트럼프를 저지할 수 있느냐가 당장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트럼프 지지세력에 대해 쏟아지는 분석 역시 이번 선거의 재미다.
첫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