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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밤, 국정원이 15년째 밀어붙인 테러방지법을 새누리당은 소속 의원 156명의 찬성으로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개혁 대상으로 비판받던 국정원이 오히려 합법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을 조금 더 되돌려 보자. 테러방지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사흘째로 접어들던 지난 2월 25일, 대한변호사협회(회장 하창우, 이하 ‘대한변협’)는 테러방지법에 관한 의견서를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의견서 골자는 이랬다.

“테러방지법은 국가 안보 및 공공 안전은 물론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고 타당한 입법

“테러 위험 인물이 아닌 자에 대해 조사 또는 추적을 할 경우 국무총리인 대책위원회 위원장에게 사전 또는 사후에 보고하도록 하는 등 인권침해의 우려를 해소하는 입법적 통제 장치를 마련했다.”

누구나 테러방지법에 대해 찬성할 수도, 또 반대할 수도 있다. 총선을 대비하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든 역사적인 의의 그 자체에만 주목하든 마찬가지다. 대한변협 의견서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다.”

신훈민시장통에서나 들을 것 같은 날 것의 언어를 토해낸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그 누구도 아닌 변호사들. 가장 먼저 공익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52명의 변호사들이 변협 의견서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발표를 실무에서 준비한 신훈민 변호사(진보넷 상근 활동가, 사진)은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어제 3월 2일에는 대한변협 전·현직 인권위원을 중심으로 1,000명이 넘는 변호사가 연명하여 “국회와 새누리당에 전달한 의견서가 대한변협의 공식 입장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건 개요는 간단하다. 대한변협 ‘일부 집행부’가 독단으로, 어떤 합리적 절차도 밟지 않고 테러방지법이 타당하고, 또 인권보호 측면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의견서를 ‘몰래’ 국회에 전달했다는 것. 신훈민 변호사에게 대한변협 ‘몰래’ 의견서에 관한 이모저모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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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개요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번 사건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한변협이 큰 사고를 쳤다.

–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보나. 

대한변협은 2만여 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모든 변호사들이 가입한 법정 단체다. 테러방지법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이런 중대한 법안에 의견서를 내면서 어떤 합리적인 의견 수렴 절차도 검토도 거치지 않았다.

– 비유하면, 법안을 해당 상임위나 법사위를 거치게 하지 않고, 직권상정한 것과 비슷한 건가. 

직권상정보다 더 바쁘다. 국회는 본회의에서 논의라도 하지 않나. 필리버스터도 법안을 논의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런데 이번 대한변협 의견서 사건은 ‘그냥 달려버린’ 거다. 집행부 몇몇이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다.

– 변호사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대한변협은 2002년과 2003년 테러방지법에 반대 의견을 냈다. 그 시점이 9.11 직후라는 점에서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매우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대 의견을 냈다. 왜 그랬겠는가. 변호사는 본질에서 인권 보호를 업으로 삼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대한변협의 기존 입장을 전면적으로 뒤집었다. 절차를 무시하면서 그렇게 했다. 집행부 일부가 함부로 전체 대한변협이라는 전부의 이름을 ‘참칭’한 것도 큰 문제지만, 의견서 자체로 논리가 너무 허술하다. 변호사가 썼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대한변협

헌법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영장주의를 무력화할 수 있는 규정이 테러방지법에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변협 의견서는 이조차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정치인이 사용할만한 추상적 수사로 얼버무릴 뿐이다. 그야말로 정교한 법리가 필요한 부분인데 아무런 논리가 없다.

정말 뒷목 당기는 사건이다. 진보 대 보수의 논리도 아니다. 영장주의는 헌법상 원칙인데 테러방지법은 이를 무력화하고 있고, 이를 어떤 비판도 없이 용인하는 대한민국 최대 변호사 단체 의견서가 일부 집행부에 의해 발표됐다.

– 대한변협은 그동안에도 국회에 쟁점 법안에 관한 의견을 내왔는데. 

국회에서 법안 검토 의견서를 요청한다. 그러니 의견을 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테러방지법과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 대한변협 전체의 이름을 건 성명을 내면서 변협 내 인권위원회와 법제위원회의 검토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은 변협 일부 집행부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 대한변협 일부 집행부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무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했는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과연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테러방지법에 전폭적으로 동조하는 대한변협 의견서가 나갔다고 했을 때 새누리당에서 혹시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냐고 의심하는 변호사들도 많았을 정도다.

사실을 확인한 뒤에 대한변협에서 낸 게 맞다고 하니 너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혹이 생기지만, 너무 황당해서 그 다른 목적이 뭔지도 모를 지경이다.

– 추정해보면, 일부 집행부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은 있을 수 있지만, 성명서의 논리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수준이라서 집행부의 정치 성향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우습다.

– 법리적 접근을 강조했는데, 의견서에서 가장 큰 논리적 흠결을 하나 더 예시하면. 

테러방지법에는 인권감시관이 테러 활동으로 인한 인권침해를 감시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그 인권감시관이 한 명이다. 즉, 한 명이 국정원 전체를 감시할 수 있다는 논리다. 법리를 떠나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변협 의견서는 인권감시관 한 명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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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은 제7조에 국가테러대책위원회에 인권보호관을 두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대테러 활동으로 인한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대한변협 의견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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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변협 의견서의 영향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테러방지법을 찬성하는 정치권, 그리고 보수 언론에서 이용하기 딱 좋은 재료다.

조선일보- 변협 "테러방지법, 인권대책 갖췄다' (2016년 2월 26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26/2016022600394.html
조선일보- 변협 “테러방지법, 인권대책 갖췄다’ (2016년 2월 26일)

– 그래서 변호사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이번 의견서가 대한변협 전체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전체 회원과 국민에게 밝히라는 것이 변호사들의 ‘중론’이다.

– 중론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대한변협의 전·현직 인권위원들의 주도로 하루 만에 1,000명이 넘는 변호사의 연명을 받았다.

관련 뉴스 검색 화면 (구글)
관련 뉴스 검색 화면 (구글)

–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나.

내가 아는 바로는 이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토록 변호사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번 의견서 파동을 주도한 일부 집행부도 어떤 절차를 통해 발표했는지를 투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앞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까.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감 표명과 재발방지 약속은 했지만, 절차 및 방식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지극히 추상적인 수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확인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의견서를 전달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책임질 사람은 사퇴 등으로 책임을 지고, 변협 내부에서는 실제적인 감시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의견서는 대한변협 전체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대한변협 의견서는 정식 의견서가 아니므로 아직 변협은 테러방지법에 관한 의견서를 내지 않은 셈이다. 법안의 통과 여부와 상관없이 변협의 위상에 맞는 의견서를 내야 한다고 본다.

– 대한변협에서 정식으로 의견서가 나온다면 어떤 내용일 것으로 예상하나. 혹은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변호사의 기본 책무는 인권의 보호다. 선진국이든 그렇지 못한 국가든 모든 국가의 변호사 집단은 테러방지법에 반대 의견을 밝혀왔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 변호사협회도 9.11 이후의 애국자 법에 대해 그랬고, 프랑스 변호사협회장도 그렇게 행동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2015년 11월 파리 테러 직후 프랑스 변호사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는 내용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테러방지법’에) 반대한다.”

Garry Knight, Paris Vigil (2015년 11월 14일) https://flic.kr/p/B2YQqW
Garry Knight, “Paris Vigil” (2015년 11월 14일), CC BY

미국 변호사협회도 미 애국자법(Patriot Act)에 대해 아래 취지의 의견서를 의회에 제출한 바 있다.

‘이 법으로 과도한 권한을 부여받게 될 행정부처가 권한남용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검토해야 하며 헌법 정신을 위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인권의 보루로서 변호사에게 부여된 ‘숙명적인’ 사회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대한변협의 일부 집행부는 그런 변호사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교과서 국정화와 같은 보수 회귀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연관 있다고 보나.

상관이 없다고 본다. 군부 독재시절에도 인권보고서를 발표한 단체가 대한변협이었다.

– 도돌이표 같은 질문인데, 대체 왜 그랬을까?

나도 그것이 알고 싶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쪽팔리다. 주변 변호사들은 처음에는 변협 의견서 자체를 믿지 못했다. 그만큼 황당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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