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영화와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나인 퍼즐’. (⏳4분)
📢 스포일러 경고
이 글은 아주 약한 수준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다만 관점에 따라서는 아주 강력한 스포일러라고 느낄 수 있는 독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나인 퍼즐'(2025)은 표면적으로는 범죄 스릴러처럼 보인다. 살해 사건, 의심받는 인물, 그리고 퍼즐처럼 흩어진 단서들. 그러나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이 작품은 단순히 범인을 찾는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억의 파편화, 제도의 불신, 젠더 서사의 전환, 글로벌 플랫폼이라는 구조를 통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불안을 드러낸다. 특히 배우 지진희가 연기한 윤동훈 경찰서장의 살해 사건은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원점이자, 제도의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다.
윤동훈의 죽음: 부재로 남은 권력
드라마는 윤동훈 경찰서장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시작한다. 지진희의 존재는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죽음으로 남은 권력의 흔적이다. 그는 살아서 제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죽음을 통해 제도의 허망한 얼굴을 드러낸다.
지진희이 연기한 윤동훈 서장의 짧지만 강렬한 등장은 단순한 사건의 기점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곧 기억의 공백을 만들어내고, 피해자와 목격자의 삶을 10년 동안 억압하는 구조로 작용한다. 드라마는 이 부재의 자리를 중심으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진다.

기억의 정치: 개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망각
주인공 윤이나는 삼촌의 살해 사건을 목격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묶여 살아간다. 프로파일러가 된 뒤에도 그녀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퍼즐 조각은 단순한 단서가 아니라, 조각난 기억과 사회적 망각의 상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이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바흐스가 말했듯, 기억은 집단적 틀 속에서 구성된다. 그러나 ‘나인 퍼즐’ 속에서 사회는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히려 피해자의 기억을 홀로 짊어지게 만든다.
이는 용산참사(2009)와 겹친다. 당시 철거민들의 외침은 “살 곳을 달라”였지만, 국가는 그들을 불법 폭력 세력과 결탁한 세입자로 낙인찍었고, 화염 속 희생자들의 기억은 제도 속에서 지워졌다. 남겨진 가족과 유가족은 사회적 낙인과 망각 속에서 고립되었다. ‘나인 퍼즐’에서 이나가 겪는 고립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기억의 지워짐을 드러낸다.



제도의 불신: 경찰서장의 죽음과 국가 폭력
윤동훈의 죽음은 제도의 실패를 압축한다. 경찰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살해당했음에도, 제도는 사건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불신을 키운다.
용산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과잉 진압으로 생명을 앗아갔다. 이후 재판은 피해자의 정의를 복원하기보다는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결국 제도는 보호자가 아니라 가해자였고, 피해자의 기억은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나인 퍼즐’에서 지진희가 맡은 경찰서장의 죽음은, 제도의 불완전성과 불신을 드러내는 강렬한 은유다. 제도가 무너진 자리에 남는 것은 피해자와 목격자의 고립된 기억뿐이다.
젠더 서사의 균열
전통적으로 범죄 드라마에서 여성은 수동적 피해자로 남아왔다. 그러나 ‘나인 퍼즐’은 이 구도를 전복한다. 주인공 윤이나는 시종일관 가해자로 의심받고, 어떻게 보면 피해자인 것 같지만, 그런 위태로운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도 진실을 추적하는 주체다. 그녀는 트라우마 속에 갇히지 않고, 사건의 퍼즐을 능동적으로 해석한다.
윤동훈 경찰서장의 죽음은 이런 젠더적 전환과도 연결된다. 죽은 권력(남성 제도)의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것은 여성의 기억과 목소리다. 드라마는 여성을 주변적 존재로 두지 않고, 서사의 중심에서 제도의 공백을 메우는 주체로 재배치한다.

글로벌 플랫폼과 불안의 번역
‘나인 퍼즐’이 디즈니+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방영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배급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 내부의 균열을 전 세계로 번역한다.
윤동훈의 살해는 한국적 맥락에서 제도의 불신을 드러내지만, 글로벌 시청자에게는 보편적인 문제로 읽힌다. 국가 권력이 무너지고, 피해자의 기억이 사회적 책임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든 공명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국형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불안을 세계적 담론으로 확장하는 플랫폼 텍스트다.

남는 질문: 공권력의 야만과 부재, 한국 사회의 초상
‘나인 퍼즐’의 결말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에드거 앨런 포가 최초의 추리소설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1941)을 쓴 이래로 모든 위대한 추리 서사에는 ‘왜 죽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의 다른 한쪽에 ‘어떻게 죽였는가‘라는 지적 퍼즐을 쌍으로 배치해 왔다. 그것이 추리라는 장르의 불문율이다. 이 드라마엔 그 제목이 심지어 ‘퍼즐’임에도 불구하고 ‘왜’는 있지만 ‘어떻게’는 희미한 골격으로만 제시된다.
그러나 작품이 끝내 붙잡고 있는 질문은 강렬하다.
- 지진희가 상징하는 공적 제도는 왜 죽음으로만 남아 있는가?
- 피해자의 기억은 왜 공동체의 기억으로 전환되지 못하는가?
-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드라마의 차원을 넘어서, 용산참사 이후 한국 사회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나인 퍼즐’은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본질에서는 사회 비평이기도 하다. 지진희가 연기한 경찰서장의 죽음은 제도의 불완전성과 권력의 부재를 상징하며, 주인공 윤이나의 기억은 사회적 망각 속에서 고립된 피해자의 현실을 보여준다. 용산참사에서 드러난 국가 폭력과 제도의 실패가 그러했듯, ‘나인 퍼즐’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라마라는 형식 속에 집약한다. 결국이 드라마가 남긴 퍼즐은 범죄의 해답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순이다.
그리고 그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 맞추는 일은 드라마 속 인물만의 몫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