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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문제 이전에 역사 왜곡: 국민의당 한상진 발언에 부쳐

 “도덕적, 역사적 기준을 떠나 대한민국을 세운 공적.”

국민의당(가칭) 한상진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의 최근(2015년 1월 11일 국립현충원, 14일 4.19 민주묘역 참배) 김대중·김영삼·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에 한 발언이 관심을 끕니다. 역사강사 심용환 님이 한 위원장의 발언 문제를 비판하는 기고를 보내왔습니다. 슬로우뉴스는 다양한 견해와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국민의당 참배 행보

  • 국부 이승만
  • 근대화와 산업화에 헌신한 박정희

국민의당 참배 행보와 발언을 두고 사람들은 정치 문제로 판단합니다. 실제로 김종인, 천정배, 도종환 등 대표적인 정가의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글을 다시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 이전에 역사 왜곡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한상진 위원장의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긋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승만, 박정희 운운하면서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정권의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로서 영광도 누리지만, 그만큼 책임도 감당해야 하니까요.

만약 이번에도 특정한 개인을 탓한다면 국민의당과 새누리당의 태도가 무엇이 다른지 심각하게 혼란스러워질 듯합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져야 하며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감당해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이번 발언 논란은 한상진 개인이 아니라 국민의당 전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안철수 신당 창당에 합류한 김한길의원, 한상진 교수 등이 2016년 1월 8일 서울 마포구 신당창당 준비사무실에서 창당준비점검회의를 열고 인사하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979566.html

안철수 신당 창당에 합류한 김한길의원, 한상진 교수 등이 2016년 1월 8일 서울 마포구 신당창당 준비사무실에서 창당준비점검회의를 열고 인사하는 모습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발언 1.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 땅에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이 성장해 부정선거를 통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한상진, 출처)

거짓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공로가 이승만에게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 이승만이 아니라 독립협회 회원, 제국신문 회원, 배제학당과 협성회 회원으로서 청년 이승만에게 공이 있을 것입니다. 이승만 개인의 노력이 전혀 아닙니다. 차라리 개인의 공을 따진다면 서재필, 윤치호 등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특정 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비록 결말이 비극이었더라도 3년간 대한제국을 희망의 터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민중의 자발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도에 들어오면서 쑨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가 동아시아를 강타했고 신규식 등 상당수의 독립운동가가 이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1915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드디어 ‘황제권에서 민권으로’ 이행했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대한제국의 멸망이 일제 시대로의 이행이 아니라, 황제권이 소멸하면서 민권(民權)으로 권리가 이양되었고 비로소 민국(民國)이 세워질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이 만들어졌고 최고 대표로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뽑히기도 했던 것입니다. 독립협회가 1896년, 최초로 공화정을 주장한 단체가 1907년 신민회였고 3.1 운동이 1919년이니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조선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방황했고 분투했으며, 조선 민중은 깨어났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4.19 혁명 (출처 미상)

4.19 혁명 (출처 미상)

그리고 다시 광복까지 25년의 세월이 걸렸고 수많은 정치적 의지가 결합된 상태에서 1948년 총선거가 열렸고,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졌고, 정부가 구성되지 않았습니까.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승만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서만 정부가 수립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김구와 김규식이 제헌 국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양심적 민족주의 세력과 중간파 세력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던가요? 5.10 총선거 당시 그토록 뜨거웠던 민중의 참여 의지는 이승만 개인에 의해 조성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즉,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성장했지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주어졌거나 세워졌거나 제도화된 것이 아닙니다.

발언 2.

“남북 분단의 척박한 정치풍토에서 동족상잔의 처참한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절대적 빈곤과 공산주의 위협에도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킨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한상진, 출처)

거짓입니다.

첫째, 남북 분단의 척박한 정치풍토를 누가 조성했습니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만식을 감금하면서 시작되었고, 남한에서는 좌익 계열의 박헌영을 제외한다면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적극적이지 않았습니까?

1947년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 사실상 미국이나 소련조차도 분단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던 바로 그때 ‘정읍 발언’ (1946년)1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사람도, 우익 청년단을 격려하며 물질적 지원을 호소하여 신탁통치 문제로 시작된 좌우 갈등에 불을 지르며 백색 테러로 나아갈 길을 열었던 대표자도 이승만이었습니다.

김구가 우익의 단결을 위해 철저하게 2인자 노릇을 할 때 그 기대를 깨고 끝내 모조리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믿었던 사람에게조차 저주스러울 정도의 배신을 했던 사람도, 김규식이 여운형과 함께 좌우 갈등을 해결하고자 미 군정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좌우합작운동에 나섰을 때 적극 지지 한다고 말해놓고 운동의 근간을 흔들었던 사람도 이승만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현실 권력을 쟁탈하고자 척박한 정치풍토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장본인입니다.

이승만 (1956)

이승만 (1956)

둘째, 절대적 빈곤 문제에 대한 책임은 왜 묻지 않습니까?

타이완 교과서를 펼쳐 보십시오. 6.25 전쟁을 통해 장제스 정권이 안정에 들어가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 필리핀은 이미 냉전 시대의 이점을 활용하여 상당히 높은 경제 수준을 구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기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 미국이 세계에 쏟아 부은 수준과 비교해 본다면 인도를 제외하고 대한민국만큼 원조를 많이 받았던 나라는 드뭅니다.

왜 이승만 집권기 당시의 가난과 해결되지 않는 빈곤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까? 경제 개발 계획을 하자고 하니까 스탈린식이라고 반대했고, 온갖 부정부패가 판을 쳤던 것이 당시 경제 상황입니다.

조봉암이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쳤더니 고작 한 소리가 “갈아봤자 더 못산다”였습니다. 이승만의 경제적 실정에 대한 책임을 냉정히 바라보지 않고 이런 식으로 문장을 붙여버리는 것은 학자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에 반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발언은 정치적인 수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책임합니다.

이승만

셋째,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문맥을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유지시켰다는 것만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는 주장인 듯합니다. 그렇다 칩시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제대로 유지했나요? 1948년부터 휴전선에서 남북한의 무력 충돌이 심각했습니다.

1948년에는 남한이 이를 주도했지만 1949년 들면서 북한이 주도하는 모양새로 바뀌었죠. 실제로 북한은 소련, 중국 등의 동의를 얻으면서 전쟁 준비를 했는데 이승만은 미국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북진 통일론을 외쳤습니다.

전쟁과 별도로 정치가 이승만이 보여주었던 행태는 무엇이었습니까. 정치적 파트너였던 한민당을 밀어내고, 자유당을 만들면서 다시 이범석 계열을 무력화시키는 등 같은 진영 내에서조차 이승만은 독재자였습니다.

헌법을 두 번이나 바꾸었고 정치적 라이벌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고, 진보당을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더욱 강화하였고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가 이승만은 끊임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했고,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3.15 부정선거를 통해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1958년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조봉암의 모습

1958년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조봉암의 모습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이승만과 싸웠던 4.19 혁명의 민중입니다. 무엇을 정당하게 평가하자는 말인지요. 왜 명백한 역사적 사실과 인과 관계를 왜곡하려 드는 겁니까.

발언 3.

“도덕적, 역사적 기준을 떠나 대한민국을 세운 공적.” (한상진, 출처)

거짓입니다. 누차 이야기했듯 대한민국은 누가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 왕조는 ‘왕조’이기 때문에 이성계가 세운 것이 맞습니다. 고려 역시, 삼국 역시 ‘왕조’이기 때문에 누가 세웠습니다. 하지만 민국(民國)이 어떻게 누가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여전히 1970년대 독재국가 혹은 20세기 초반 아시아의 혼란상을 극복하고자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했던 바로 그 시절의 정서로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 이승만, 그는 광복한 나라를 '예수회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 이승만, 그는 광복한 나라를 ‘예수회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발언 4.

“직접 헬멧을 쓰고 창원·울산·구미 공단을 도시며 우리나라 근대화·산업화를 몸소 이끄신 분이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끄신 산업성장의 엔진을 다시 한 번 이땅에 가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상진, 출처)

근대화와 산업화를 동의어로 취급하셨더군요. 참 초라한 발상입니다. 사람은 배가 불러야 한다. 배가 부르려면 산업화 해야 한다. 산업화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여유가 생겨서 이것저것 풍요로운 것들을 누리니 그것이 곧 근대화다.

거짓입니다. 세계 어느 역사에 산업화가 근대화를 이끌거나 산업화가 근대화와 동의어가 될 수 있었습니까. 영국은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의 결과로 입헌주의 정치 제도가 완성되었고, 그것이 식민지 경영과 맞물리면서 산업혁명의 성과를 내었습니다.

미국 역시 독립 혁명 이후 산업 혁명이 도래했고, 프랑스의 경우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은 독자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자유 민주주의의 성장은 산업화와 별반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19 혁명 당시 배가 불렀습니까? 6.3 시위가 경제적으로 안정돼서 일어났나요? 6월 항쟁 당시 중산층의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이었을까요?

더구나 근대화와 산업화는 함부로 혼용해선 안 되는 단어입니다. 르네상스를 통해 근대적 인간이 발견되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종교 권력이 붕괴하였고, 절대주의의 역사, 신대륙의 발견, 비스마르크류의 국가 주도 성장 등등 온갖 주제가 뒤엉킨 것이 근대화의 과정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 역시 절대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근대화를 산업화와 등치 시키거나 산업화가 근대화를 낳았다는 식의 주장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부추기고, 보수층에 어필하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겁니까.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 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1.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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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필자. 역사 강사

역사 강사, 대학생 인문학 공동체 '깊은계단' 대표 → 블로그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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