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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소화기 그리고 소라넷

대학에 다닐 때 동기 남자애가 나를 성추행한 일이 있었다.

휴학한 친구가 놀러 왔는데, 원칙상 휴학생을 기숙사에 재울 수가 없어서 동아리방에서 잤던 날이었다. 툭하면 보드게임으로 밤을 새우는 동아리라 매트리스며, 이불이 항상 바닥에 널려 있어서 친구와 나란히 누워 얘기하다 잠이 들었다.

그때 동아리방에는 우리 말고도 종종 동아리방에서 게임을 하며 밤을 새우던 동기 남자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날도 녀석은 출입문 반대편 구석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사진: 권성원 http://shawnsstyle.com/220538619448 (이 이미지는 본 기사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권성원 (이 사진은 본문 내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날, 새벽 즈음 악몽을 꾸고 소스라치며 깼는데 녀석이 내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허둥지둥하길래 “왜?” 하고 물으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컴퓨터 앞에 가서 앉더라. 별생각 없이 돌아눕는데, 반팔티 자락이 가슴 위로 올라가 있고, 청바지 지퍼는 내려가 있었다. 이 변태가 내 동의도 없이 내 속옷 구경을 한 거지.

그 순간에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고 나중에 얘기해야겠다 싶어서 옷을 여미고, 친구를 깨우고, 우리가 썼던 이불도 개켜서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 뒤 동아리방을 나서려는데 이 뻔뻔한 새끼가 “야, 나가기 전에 불 좀 꺼줘!” 라며 문 옆의 스위치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때 알았다.

‘아- 이 새끼.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나가니까 없었던 일인 양 잡아뗄 셈이구나.’

그 순간 분노가 치밀면서 제정신이 들었다.

당장 밖으로 나가 복도 끝에 있던 소화기를 가져와서 그 자식한테 뿌리고, 빈 소화기 통은 녀석이 있던 자리를 조준해서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사태 파악이 안 돼서 당황한 친구 손을 잡고 동아리방을 나왔다.

소화기

학생회관을 나와 기숙사로 걸어가고 있는데, 그제야 그 녀석이 허연 소화기 가루를 온통 뒤집어쓴 꼴로 헐레벌떡 따라 나와선 질질 짜면서 운동장 한가운데서 무릎 꿇고 싹싹 빌더라.

웃기는 게 녀석은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사귄 친구 중 하나였다는 거다. 햇수로 3년째. 꽤 친했다. 다른 동아리도 같이 하는 게 있었고, 1학년 때는 한 학기 내내 금요일마다 다른 친구들까지 같이 무리 지어 나가선 게임방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오기도 했다. 방학 땐 교회에서 어린애들 성경공부반 교사도 했다던가.

하, 그런 녀석이 겨우 이런 범죄 행위로 우정을 내팽개치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말했다.

“나는 니가 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우리 다신 상종 말자. 동아리방은 니가 치워!”

녀석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청소했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녀석은 청소도 안 하고 튀었다고 한다.

그 다음 날엔 동아리방에 소화기를 뿌린 일로 선배들한테 야단을 맞았고,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챈 남자 후배한테는 ‘남자들은 원래 그러니 누나가 이해해요.’ 같은 X소리나 듣고, 곧바로 나한테 사과하긴 했지만, 뭐 그랬다.

https://flic.kr/p/5UGXh3 João Carlos Magagnin, Coco Rocha, CC BY

João Carlos Magagnin, “Coco Rocha”, CC BY

글의 흐름 상 이쯤에서 눈물을 쏟으며 성추행으로 인해 내가 입은 상처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해야겠지만, 사실 그 일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추행 혹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내게 뭐 커다란 상흔 같은 걸 남기진 않았다.

물론 당시엔 상처도 받았고, 분노와 배신감으로 치를 떨기도 했지만, 원래 그런 감정 자체를 길게 가져가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전부터 ‘썸’ 타던 사람이랑 연애하게 되어 바쁘기도 해서, 머릿속에서 녀석의 이마에다 커다랗게 ‘변태, 성추행범, 범죄자’라고 써 붙여 안중 밖으로 밀어내고 나니 금방 분노도 희미해졌다.

조그만 흉터는 있다.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내 뒷담화를 했다는 걸 알았다거나, 내 잘못도 아닌데 어처구니없이 욕을 먹은 일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도 떠올릴 때마다 짜증 나고 그러지 않나. 똥 밟은 기분(정확히는 똥이 굴러와서 내 발밑에 깔린 거지만). 딱 그 정도. 그 일로 트라우마가 생기지도 않았고, 성 정체성이 바뀌지도 않았으며, 남자를 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도 않는다.

João Carlos Magagnin, _____ , CC BY https://flic.kr/p/85Luk8

João Carlos Magagnin, “_____” , CC BY

사실 나에게 이 기억은 오히려 무용담에 가깝다.

용사는 괴물을 무찌르고, 괴물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용사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소화기는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래도 후회되는 건 있다. 그 일을 공론화시켜서 혹시 동아리 내에 나 같은 피해자가 또 있진 않은지 알아보지 않은 것. 왜 성범죄를 안 하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지 않은가.

그때 그 일을 ‘공론화’시키지 않은 건, 녀석을 친구로 생각했던 마음이 조금 남아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런’ 일은 밝혀봐야 흐지부지 묻히는 게 대부분이며,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학습한 탓이 컸을 것이다.

남자가 길을 가던 모르는 여자를 성폭행해도 그 여자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 남자가 매매혼한 여자를 강간하고 죽여도, 살인범의 증언이 근거의 전부인, 그래서 사실 여부조차 이젠 확인할 수 없는 아내의 홀대 탓이라고 기사화되고, 남자가 헤어진 아내·여자친구에게 염산을 붓고, 살해해도 “오죽하면 그랬겠냐”, “그 사람은 오히려 순정파다”라는 댓글이 달리는 나라가 아닌가. 실제로 나중에 눈치를 챈 사람들도, 적어도 겉으로는, 녀석과 별문제 없이 잘만 어울려 다니더라.

하지만 그런 논리로 애써 자신을 변호해봐도, 이후 대학 내에서 쉬쉬하며 떠도는 성추행 사례를 듣게 될 때마다 그때 그놈을 경찰에 넘겼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 대처 사례 하나가 저보다 약한 사람 상대로 찌질한 짓을 하는 찌질한 사람들에게 미약하나마 브레이크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르니까.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and Me, CC BY https://flic.kr/p/6ZaBR2

João Carlos Magagnin, “Triton and Me”, CC BY

얼마 전 트위터에서 우리나라 20세~59세 남성 중 6%가 가입되어 있다는 ‘소라넷’의 캡처 사진을 봤다. 술(혹은 약)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친구의 여자친구를 넷이서 강간했다거나, 성기에 이런 걸 꽂아봤는데 리플로 의견 주면 그것도 넣어보겠다는 식의 경험담 글과 증거 사진의 캡처였다. 라이터, 식칼 손잡이… 그 이후는 안 봤다. 구역질이 나서.

다음 날, 트위터 고발글에 달린 리플을 봤다.

“저 여자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 마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느냐.”

“저거 다 동의한 것일 거다.”

문득 소라넷의 유구한 역사와 녀석이 포르노 사이트의 헤비유저였다는 점, 그리고 그 당시가 디지털카메라가 막 보급되던 시점이라는 걸 고려하면, ‘내 속옷 사진이 저기 올라갔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리 동기뇬이 보드게임하고 놀다 겁 없이 동방에서 잠들었길래 속옷을 찍어봤습니다. 야플 달아주시면 더 접사로 찍어볼게요.’

그리고 그 글에는 이런 리플이 달렸겠지.

‘저 여자가 몰랐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어떻게 자는 사람 모르게 바지 지퍼를 내릴 수 있겠느냐.’

‘실은 동의하고 찍은 사진일걸.’

참, 저열하다. 몰래카메라 반대 시위에 뛰어들어선 “여자들이 안 찍히게 조심할 일이지. 이런 일로 시위를 한다.”고 호통을 쳤다던 오십 대 아저씨만큼이나 저열하다.

회사의 공식 아이디, 행정용 아이디로 수시로 바뀌는 소라넷 주소를 알려주는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의 내면만큼 저열하고, 올라온 컨텐츠 중에 반 이상이 몰카나 강간 영상인데도 소라넷의 텀블러가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현실만큼 저열하다.

찌질한 것들이 찌질하게 노는 건 자유지만,
그 찌질함이 피해자를 낳으면 그 찌질함은 범죄가 된다.
그 범죄 현장을 기록해서 공유하고, 즐기는 건 또 다른 범죄다.

소라넷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여자든, 남자든, 그 사이트의 유저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그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 여성 대다수가 잠재적 피해자라는 점이다. 이것은 더는 찌질한 성범죄자와 운 나쁜 피해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런 현실에서 자신은 그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일 아닐까?

avaaz에서 소라넷 폐쇄 청원을 진행하고 있다.

덧붙여.

당신이 그 사이트 유저라면…

몰카, 아동 포르노 카테고리는 안 보니까 자신은 무관하다고 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이트의 특성상 단순 포르노 컨텐츠 중에도 온전히 동의하지 않은(협박, 약물을 이용한 강간 및 몰래 찍었거나, 혹은 찍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유포에는 동의하지 않은) 범죄의 결과물이 섞여 있을 확률이 높으며, 당신의 사용이 그 사이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으니 결국 당신도 성범죄의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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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필자. 창작자.

삶을 치유하는 노는 행위를 실험하다 어느새 전업 잉여가 된 창작자. 현재 '도요', '호랑' 두 친구와 함께 제작 실험 공간 ‘릴리쿰’을 운영하며 다양한 만들기를 시도하고,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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