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의 구원자
좋은 강의를 한다는 것.
좋은 선생이 된다는 것.
강단에 서는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강의평가, 생존의 문제
그 객관화의 지표가 되는 것이 ‘강의평가’다. 학기 말에 이르러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교수가 강의를 잘했는지를 몇 문항의 객관식과 주관식으로 평가한다. 아래와 같이 점수를 매기고, 이것은 물론 익명으로 이루어진다.
- 2점: 몹시 나쁨
- 4점: 나쁨
- 6점: 보통
- 8점: 좋음
- 10점: 아주 좋음
강사 대부분은 강의평가 점수에 몹시 민감하다.
정교수는 강의 평점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지만, 시간강사는 일정한 점수 이하로 평가받으면 해당 학교에서 다시 강의할 수 없다. 내가 몸담은 학교는 10점 만점에 8점 아래 강의 평점을 받으면 해당 학기에 1회 경고 조치하고, 다시 그 미만 점수를 받으면 퇴출당한다.
결국, ‘자기만족’을 넘어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나만의 각오와 선배의 조언
강의를 시작한 나는 그러한 분위기를 물론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 밝혔듯, 평균 이하의 강의 평점이 나올 경우 강의를 그만두는 것은 물론 아카데미의 모든 삶을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각오했다. 다소 가혹할 수는 있겠으나 ‘강의’와 ‘연구’는 우선 순위 없이 함께 나가야 한다. 어느 한 편을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이 나를, 가족을, 나와 관계 맺을 연구자와 학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강의’를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는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대학국어 강의를 앞서 맡았던 선배들은 내게 종종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고, 나는 내가 마련한 여러 기준에 더해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어느 선배의 조언에 따라 나는 학기 초에 ‘면담’에 대한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모든 학생에게 3월 중으로 가능한 면담 날짜를 협의해서 잡자고 했다. 1학년 학생들이었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분위기였고, 나도 ‘그래야 하는가 보다’ 했다.
선배에 따르면 강의평가 항목에는 ‘면담을 했는가’, ‘면담 가능 시간이 공지되었는가’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학기 초에 모든 학생과 면담을 하지 않으면 해당 항목 점수가 크게 낮게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학국어를 강의하는 선배들은 대부분 학생 면담으로 학기 초에는 정신이 없었다.
나는 30여 명의 학생 모두와 면담 약속을 잡았고, 3주차부터 공강 시간에는 항상 그들과 만났다.
어느새 가장 중요해진 면담
개인 연구실이 없었기에 빈 강의실을 미리 물색해 보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학생들과 만났다. 1차 과제인 자기소개서를 첨삭해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학생들의 글을 보면 그가 어떠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종종 대학 생활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차피 나도 겪은 시행착오였기에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 시간씩 넉넉히 면담 시간을 두었는데, 10분 만에 끝나기도 했고 드물게는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학생과의 면담은 어느덧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있었다. 월급이 더 나오는 일도 아니었건만, 공강 시간에는 항상 그들과 만났다. 한 번은 지도교수와 오후 2시에 약속이 있었는데 학생과의 면담이 길어졌다. 평소 같으면 그 어떤 약속이든 취소하고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도교수께 전화를 드려 약속 시각을 30분가량 늦추고 계속 면담을 진행했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해해 주실 거야, 하고 그저 믿었다. 내가 지금 눈앞의 학생이 두려운 만큼 내 지도교수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해 버렸다.
면담을 마치고 헐레벌떡 뛰어가 지도교수를 뵈었다. 한없이 작은 선생님에서 다시 한없이 작은 학생으로 돌아갔다.
“학생과의 면담이 길어졌는데 도저히 먼저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이 누구보다도 두려웠어요, 선생님.”
지도교수가 그때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내가 지도교수에게 이런 당돌함이나 맹랑함을 보인 적이, 아무리 기억해 봐도, 없다.
제자된 도리, 선생된 도리
특히 지도교수와의 약속은 절대적이다. 내 선배는 약속이 있어서 차를 몰고 서울로 가다가, 서울 톨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있으면 잠깐 와라.”
“선생님, 제가 지금 밥을 먹으러 나왔는데 곧 들어갑니다.”
선배는 톨게이트를 지나 유턴해 다시 엄청난 속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어떤 용건인지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저 선생님께서 보자고 하시는데 제자된 도리로 당연히 가야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일화를 듣고 질려 버렸지만, 동시에 무척 존경스러웠다.
그를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제자된 도리’였다. 단순히 두려웠기 때문이라면 그는 톨게이트를 유턴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도교수보다 두려운 것은 역시, ‘학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자된 도리’이자 ‘선생된 도리’라고, 믿는다.
“도대체 면담은 왜 하는 건가요?”
면담을 거듭하며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불편함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학생이 물었다.
“면담은 대체 왜 하는 건가요?”
그는 시작부터 뭔가 불만에 찬 얼굴이었고 그다지 의욕이 없었다. 나는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스스로 ‘면담’이라는 행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 어떠한 비판 없이 선배의 조언을 수용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싫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학생에게 나와 ‘면담’할 것을 강요했고, 이것은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는 엄연한 폭력이었다.
모두가 면담을 원하고 있을 것이며 ‘시간을 내주는 쪽은 나다’는 식으로 시혜적인 행위로 나 스스로 면담을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영부영 학생을 보내고,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좋은 인문학 수업을 만들어 가자고 다짐해 놓고, 조별과제 때를 비롯해 실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가장 반인문학적 인간은 어쩌면 나(강사) 자신인지도 모른다.
예정된 면담을 4월 초까지 모두 마쳤다. 중단하고 싶었으나 이미 공지한 내용이었고 막바지에 이르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 이후 학기부터는 희망자에 한해 신청을 받았다. 여전히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하는 선배 강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중간고사 이전 한 주를 면담과 자율학습 시간으로 두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기 힘든 시기이기에 차라리 원하는 학생들과 강의실에서 면담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았고, 나 역시 즐겁게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특별하단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즐거운 면담이 몇 있다.
Y 학생은 등산이 취미라고 했는데, 면담을 위해 강의실로 가다가 나는 “그러면 우리 같이 등산이나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가 대학에 오고는 근처에 아는 산이 없어서 항상 아쉽다고 답했고, 나는 자주 가는 동네 뒷산이 있어서 가볍게 말을 꺼냈다. Y는 몹시 기뻐했고, 우리는 함께 왕복 1시간 내외의 평탄한 산길을 걸으며 그의 대학원 진로에 관해 이야기했다.
E 학생은 자신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며 울먹울먹했다. 만날 때부터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장 성실하게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보통은 이럴 때 힘내라는 말을 해주곤 하는데 사실 그건 너무 뻔하고 내게 가장 힘이 되었던 어느 선생님 말씀을 전해줬다.
“내가 고등학교 때였는데 방송국에서도 온 무척 큰 행사가 있었어.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였지. 그런데 어느 젊은 선생님께서 나중에 내게 그러시더라.
“수백 명의 학생이 모여 있는데 이상하게 그중에 너만 눈에 들어오더라. 반짝반짝하고 말이야.”
내가 무언가 눈에 띄는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어.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지. 그런데 나는 그때부터 내가 평범한 한 인간이면서 자아를 가진 무척 특별한 인간이기도 하구나 하는 걸 알았어. E 너에게 이 말을 해주는 건 강의실에서 가장 반짝반짝하는 게 바로 너이기 때문이야. 너는 내가 가장 먼저 이름을 외운 학생이야. 너는 특별하단다.”
공치사가 아니라,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E는 눈이 조금 더 부은 채로 웃으며 돌아갔다. 지금도 가끔 자신의 근황을 전해 오는 감사한 제자다.
한마디의 구원
J는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학생이다. 그다지 긴 시간 면담을 하지도 않았고, 그가 특별한 고민을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더 없니, 하고 묻자 그가 툭 던지듯이 했던 어느 한 마디, 나는 그것을 붙잡고 남은 학기를 버텼고, 지금도 버티고 있다.
“교수님은 무척 행복해 보이세요.”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왜지?”
“강의를 할 때 교수님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분반 친구들과 가끔 교수님의 이야기를 해요.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서 후배들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그런대로 행복한 삶일 것 같다고요.”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강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한 번 도망쳤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J는 내게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J를 보내고 나는 한참을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학회에서 첫 논문을 발표했을 때, 처음 보는 연구자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연구 정말 열심히 하셨네요. 선생님 덕분에 저도 연구의 방향성을 잡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나는 행복했다. 그래서 연구실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어떻게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정말로 행복했다.
나의 구원자
첫 학기 강의평가 점수는 10점 만점에 9.56이 나왔다.
그해 우수강사로 선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집에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이불로 입을 막고 소리를 질렀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계속 강의해도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어떤 근거를 만든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학기를 거듭하며 강의평가도 조금씩 올라서, 지난 학기에는 9.76을 받았다.
하지만 강단에서 비로소 어떤 여유를 조금 가지게 된 것은, 학생이 여전히 나의 지도교수이며,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지금의 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언제나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한 인간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계속)
존경합니다.
이 글의 중심 내용은 아니지만 …
제자된 도리라는 부분이 상당히 불편하네요…
이러한 선배의 모습을 ‘존경’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 분도 나중에 제자에게 동일한 수준의 ‘충성’을 자기도 모르게 강요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과연 “학교에 있으면 잠깐 와라”라는 말에
학교에 있지도 않으면서
어떤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곧이곧대로 달려가는 것이
정말로 마땅한 제자된 도리 중 하나인지요.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학계에서의 높은 상징자본으로 인한 상징폭력이 아니라,
단순히 거역하면 안되는 ‘주인’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답습하는,
한국 학계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요.
이것이 존경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진다면,
한국 학계의 연고주의, 베타성/폐쇄성, 비평 부재의 해결은 요원하군요…
저도그렇게생각합니다. 강남대인분사건이나 서울대 음대 교수사건 등등 여타 사건들을 봐도 우리나라학계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사람은 평등하고 이건 당연한 것인데 그런 관념이 없는 강사,교수들이 많습니다. 이상하게 학생들에게 쓸데없이 바라는 게 많아요. 권위를 남용하는 게 옳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고쳐야합니다. 그래서인지 각종 성희롱 성추행도 많고(묻혀지는게 대부분) 그래서 서울대음대교수가 몇년동안이나 자기이삿짐 나르는데 남학생들을 협박해서 동원하기도 했었죠.이밖에도 더있는데 기억이안나네요. 이건 큰사건들이고, 이렇게 학생들 위에 군림하고싶어하는 강사,교수들때문에 일상에서 생기는 자잘한 문제들은 더 많습니다.
글쓴이입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위의 내용을 쓰면서 ‘제자된 도리’라는 것이 어떻게 비추어질까 조금 불편했는데, 역시 제가 설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타인을 설득할 수는 없네요.
제가 그 선배에 대한 존경을 보낸 것은, 그가 맹목적 두려움이 아닌 ‘도리’라는 자발적 덕목으로 그 행위를 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시스템에 함몰된 인간으로서 자기 위안이나 변명의 도구로 ‘도리’를 끌고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역시 그의 성찰의 한 부분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기화 하고 치환해 행동한다는 점이, 저는 존경스러웠습니다. 만약 그가 ‘불이익이 무서워서 갔어’라든지 ‘더러워서 갔지 뭐’라고 대답했다면, 저는 그에게 무척 실망하거나 크게 한 번 웃고 말았을 거예요.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고, 가슴 아픈 에피소드입니다. 미담이 되어서도 안 되죠. 여기에 제자된 도리라는 표현을 쓰고, 그에 대한 부연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제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네요. 부끄럽습니다. 나중에 글을 외부에 내어 보일 일이 있게 된다면, 해당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에게 존경을 보냈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 충분한 부연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계속 노동할 수 있을지는 잘 상상이 안 갑니다. ‘정규직 교수’가 된다는 목표나 꿈은 이미 버리고, 그저 주어진 연구와 강의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항상 저 자신을 경계해 나가면서, 지금 쓰는 이 글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가겠습니다.
309동1201호 드림.
이 글을 쓰는 교수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 … 아..수준높다 ㅋㅋ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