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2026 신년기획: 한국 정치경제의 전환기,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과 한계. 이재명 정부의 선택은? (최영기/전 한국노동연구원장) (⌚6분)
2026년을 맞은 한국의 정치경제 상황은 심각한 위기 국면이며, 역사적 분기점을 지나고 있다는 데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금 여러 겹의 ‘깔딱 고개’를 넘고 있는 중이다. 2025년에 정치와 외교안보 측면에서 큰 고비를 넘겼다면, 올해는 전면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성장 원년’으로 삼겠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으로 보인다. 정치 상황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며, 대통령의 언행과 인사는 통합을 지향하고 있으나, 여야 간의 정치적 대치는 오히려 격화하고 있다.

복합 위기와 역사적 분기점
산업화 이후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적 ‘깔딱 고개’는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외환위기이다. 그런데 지금은 1987년의 정치 위기와 1997년의 경제 위기에 더해, 디지털 전환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구조적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다중 위기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당면한 한국 경제의 현실은 0~1%대의 성장률이라는 성장의 위기뿐 아니라,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한 사회 위기의 심화라는 이중 과제에 짓눌려 있다. 불평등과 양극화, 그리고 노동시장의 과도한 격차는 결코 새로운 문제가 아니며,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젠더, 저출산, 우울과 자살, 정치 양극화 등 다른 사회 문제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은행과 KDI(한국개발연구원)는 지난해 성장 전망치를 잇달아 하향 조정하였고, 정부도 추경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결과는 겨우 1% 성장에 턱걸이하는 수준일 뿐이다. 두 기관이 공통적으로 지적해온 문제점은 단기적 경기 침체보다 잠재성장률의 구조적 하락이며, 이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장기 저성장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경고다. 이를 피하려면 노동개혁을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국은행, ‘일본경제로부터 되새겨볼 교훈’, 2025.6; KDI, ‘한국경제 생산성 제고를 위한 개혁방안’, 2024.12)

이 같은 진단은 2010년대 이후 새 정부 출범 시마다 반복되어 왔으며, 지난 정부 출범 당시에도 한국경제학회를 비롯한 4대 학회가 공동으로 개혁안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전달한 바 있다.
한국은 여러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는 듯하지만,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외환위기 등 주요 위기를 맞을 때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왔다. 일방적 승리를 통해 판을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수차례 정치·경제적 위기를 대화와 타협으로 극복하며 더 큰 도약의 기회로 삼았던 경험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복합 위기는 불가피한 전환 과정이며,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위험한 시기이다. 이 전환의 계곡을 잘 통과한다면, 제국주의를 거치지 않고 G7 수준의 강대국 반열에 오른 최초의 국가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곧 한국형 선진국 모델의 탄생을 의미한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전환기 위기 관리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국민적 합의 형성의 리더십이 위기 극복의 성패를 좌우하며, 정권의 운명도 결정한다고 하겠다.
사회적 대화 정책의 현주소
이재명 정부의 사회적 대화 정책은 선거 공약이나 국정 과제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2026년 대통령 신년사에서도 대도약을 위한 대전환을 강조했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민적 합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지난해 몇 차례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노동 유연성과 대타협을 언급했으나, 별다른 후속 조처는 없었다. 다만,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의 고용노동부 장관 임명, 갈등 조정 경험이 풍부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발탁, 그리고 간헐적으로 사회적 대화의 복원을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완전체’ 경사노위(대통령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위기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재명 정부가 경사노위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명확한 구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하기에는 아까운 자산이기도 하다.
경사노위는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형 사회적 대화는 유럽의 ‘합의주의(Corporatism)’나 일본의 ‘협의(coordination)’ 모델과 달리, 정권의 성격과 과제에 따라 다양하게 진화해왔다.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되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노총만이 노동계를 대표하는 ‘반쪽짜리 사회적 대화’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1998년 대타협의 유산과 이재명 정부의 과제
한국형 사회적 대화의 정체성과 최대 성과는 1998년의 노사정 대타협과 1999년의 법제화에 있다. 명실상부한 노사정 대타협과 국민적 합의, 이를 통한 위기 극복의 경험은 경사노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이재명 정부도 당면한 전환기 위기에서 어느 시점에선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처럼 대타협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올해는 대전환과 대도약을 위한 개혁 드라이브가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갈등을 줄이기 위해 대타협을 통한 개혁 패키지 도출은 하나의 현실적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진보 정권들이 사회적 대타협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이재명 정부의 국정 목표와 운영 방식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당면한 개혁 과제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모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무현·문재인 정부의 실패 경험도 대타협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아직 개혁 아젠다가 구체화되지 않았고, 노사정 간의 신뢰 또한 부족한 상황에서, 현실주의자인 이재명 대통령이 쉽게 대타협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물론 어느 시점에서는 이 계산이 바뀔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전환의 계곡은, 전인미답의 미로이자 선도국가로 가는 최전선의 장벽이기도 하다. AI 3대 강국 목표, 산업구조 및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격변 등은 모두 노동시장에 큰 변화를 초래할 것이며,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제도와 관행이 변화의 압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기업 활동과 노동생활에 대격변이 예고된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 테이블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러한 전환기에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감대 형성과 공동 대응이 당연하지만, 노사정 간의 신뢰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특히 민주노총이 포함된 ‘완전체’ 사회적 대화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는 구조개혁을 추진하려는 목표는 상충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에 대한 불신은 1998년 대타협의 후유증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대화 참여가 곧 투쟁을 포기하고 타협 노선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정파 간 갈등의 촉매제가 되면서 조직이 분열된 사례도 여러 번있었다. 이로 인해 정부가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는 어떤 개혁 논의도 완전체 사회적 대화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과거의 우회로와 새로운 선택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현·문재인 정부는 여러 우회로를 시도했다. 2005년과 2018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공식적인 참여는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대표자회의나 한국노총과의 연대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근로시간 단축, 노동조합법 개정, 비정규직 입법 등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이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1998년 대타협에 참여했던 가장 큰 유인책은 단결권 보장과 합법화였다. 반면, 한국노총의 주요 유인은 정책 협의에서의 주도권과 간헐적인 인사·예산상의 인센티브였다. 그러나 이 과정을 비도덕적인 담합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판단이다.
역설적이게도, ‘반쪽 사회적 대화’의 생명력은 폭넓은 공론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생략하고 정부 주도로 개혁을 시도했던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비정규직법 개정과 2022년 주52시간제 개편은 모두 실패했으며, 이후 개혁 동력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유럽이나 일본의 사회적 대화가 비공식 협의 중심이라면, 한국은 공론화를 통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노사정 대표들의 타협 시도라는 독특한 패턴을 따른다. 이는 대표성 논란과 리더십 결핍을 보완하는 한국형 처방이며, 전문가 집단의 공익 역할도 협상 조정자이자 촉진자로서 중요하다.

이재명 정부의 ‘가장 안전한’ 선택, 경사노위 복원과 구조개혁
정부는 현재 완전체 사회적 대화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노동부 장관 주재의 노정 대화 채널, 국회의장 주도의 사회적 대화 테이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노총과의 신뢰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가 현재의 정책적 이슈, 즉 구조개혁과 직접 연결되긴 어렵다. 그런 목적이라면 기존 경사노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년 기자회견이나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발표를 전후한 시점에는, 노동시장 구조개혁과 사회적 대화 정책 방향을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AI 충격, 미국의 통상 압박, 중국의 산업 도전 등은 좋은 일자리를 위협하며, 노동시장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노사정 대화와 공감대 형성이 필수다.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첫째, 완전체 경사노위 복원과 대화·타협을 통한 구조개혁 추진이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둘째, 사회적 대화와 구조개혁을 분리하여 이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셋째는 1998년 방식의 전면적 대타협을 시도하는 길이다. 이는 대담한 노동시장 거버넌스 개혁과 명분 있는 인센티브 설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의 국정 과제와 대내외 여건을 고려할 때, 현실화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