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게는 비자가 필요 없다.”
로버트 데소비츠가 [말라리아의 씨앗](정준호 역, 후마니타스 펴냄, 2014)에서 한 말이다. 유행성 질환에 국경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적 환상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한곳에서 발병한 감염성 질환은 언제든 세계로 퍼져갈 수 있다. 인구 이동 규모와 빈도가 잦아진 현대 사회에서는 그만큼 감염성 질환 이동의 규모와 빈도도 잦아진다.
2014년 서아프리카를 강타한 에볼라는 감염성 질환 따위는 거의 통제했다고 생각한 세계화 사회에 던진 거대한 충격이었다.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은 에볼라 대응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2015년 5월 메르스라는 이름조차 낯선 질병이 한국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커뮤니케이션 실패한 한국의 메르스 대처
최초 확진 환자를 진단하는 과정부터 초기 대응, 이후 관리 부분까지 수많은 허점이 드러났다.
- 극단적으로 낮은 공공의료 부문
- 닥터 쇼핑, 간병 문화 같은 기형적인 의료구조
- 정부의 위기 상황 대처에 대한 거버넌스
- 정부와 대중 간의 불신과 이를 다루는 방식 등등
이들 문제에 대해선 이미 충분히 다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는 다루지 않겠다. 문제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전염병 대응뿐 아니라 모든 위기관리의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실망스러웠다. 정보 유통 관리도 미흡했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응도 일치하지 않았으며, 공개와 비공개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하다 마지못해 불완전한 정보를 내보이며 신뢰의 추락을 불렀다.
특히 발병 확인 직후 보건복지부에서 내놓은 예방수칙 홍보자료와 그에 따른 ‘드립의 향연’은 커뮤니케이션의 난맥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건복지부가 카드 형식으로 배포한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신고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면 예방에 집중하라.
낙타와의 밀접한 접촉을 피하고,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 또는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 섭취를 피하라.
https://twitter.com/nakanopunk/status/606716172298391552
보건복지부의 황당한 메르스 예방 지침에 사람들은 ‘오늘 낙타 타고 출근하지 않기를 잘했다’, ‘이제 낙타 말고 기린 타세요’ 등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한국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을 내보내며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데 실패한 것이다. 물론 이런 신뢰 붕괴는 메르스 사태에서만 유별난 건 아니었다.
https://twitter.com/Elfybarbie/status/606055117725376512
2014년 세월호 사태부터 정부는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허점을 보였다. 이 때문에 국내 사태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국 정부에서는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국민과 커뮤니케이션 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 유학 중에 직접 지켜봤던 2009년 신종플루(2009 H1N1 인플루엔자 판데믹) 사태였다.
2009년 영국의 ‘H1N1 판데믹’ 사태 대처
스페인 독감과 같은 종류인 H1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멕시코에서 시작한 유행이 한 달 만에 전 세계적 유행으로 번져나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물론 이후 유행이 종료된 시점에서 H1N1은 생각보다 심각한 유행이 아니었으며, 지나친 대응이 아니었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국내외 위기 상황에서 영국의 대처, 특히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흥미로웠다.
2009년 영국 상황을 되돌아보자.
2009 H1N1 유행 종료까지의 감염자는 낮게는 1천만 명에서 많게는 2억 명으로 추산되며, 확진 사망자는 14,286명이었다. 영국만 해도 전체 확진 사례는 37만 건, 사망자는 457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H1N1 판데믹(pandemic; 범유행, 전염병이나 감염병의 전 지구적인 유행을 의미)은 타임지를 비롯한 각종 유력 언론 1면을 장식했다.
영국의 초기 대응 시간표를 잠시 살펴보자.
- 4월 27일: 멕시코를 다녀온 여행객에서 H1N1 감염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당시에는 영국 내 감염이 아니었으며 해외여행자 대상 발병이었다.
- 4월 29일: 멕시코에서 돌아온 3명의 여행객에서 추가로 H1N1 감염이 확진되었으며, 이 중 12세 아이가 있었다.
- 이 때문에 29일 당일 아이가 다니던 학교가 휴교조치 되었으며, 교내 인원 전체에 대해 검사 및 진료와 타미플루 투약이 이루어졌다.
- 4월 30일: 정부 측 H1N1 핫라인이 개설되어 정보 전달을 시작했다.
- 5월 1일: 영국 내 감염이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 5월 2일: 확진환자의 접촉점을 중심으로 추가 휴교조치가 있었다.
- 5월 17일: 확진 환자가 100명을 넘어섰으며
- 6월 초: 확진 환자 1,000여 명 돌파,
- 7월 16일: 누적 확진 사례가 85,000건이었다.
전 세계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포감에 휩싸일만한 상황이었으나, 당시 영국 분위기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럴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와 커뮤니케이션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4월 29일, 영국에서 최초 확진 사례가 발견된지 이틀째, 그리고 휴교령이 내려진 첫째 날 국회 국정연설에서 당시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현재 신종플루에 감염된 두 분은 회복 중이며, 세 명의 추가 확진이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 명은 12세 소녀 토베이, 두 명의 성인 중 한 명은 버밍햄, 나머지 한 명은 런던에 있으며 모두 멕시코에 방문했습니다. 세 명 모두 가벼운 증상만을 보이며, 모두 치료에 잘 반응하고 있습니다. 타미플루를 이용한 치료는 지금까지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토베이(12세 소녀)가 다녔던 학교는 휴교했으며, 교내에 있던 사람 모두에게 타미플루가 처방될 예정입니다.
현재 저희는 질병 전파를 막는 데 필요한 준비와 예방책을 취하고 있으며, 제가 분명히 확인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현재 공항 검역을 강화했으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멕시코 여행을 자제할 것을 권장했으며, 계속해서 현재 취하고 있는 조치를 재검토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동시에 항바이러스제의 재고량을 3,500만 명분에서 5,000만 명분으로 확대할 것이며, 다음 주 화요일까지 국가 내의 모든 사람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할 것이며, 모든 가정이 안내책자를 받아보게 될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영국을 판데믹에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는 국가로 표현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세계적인 유행에 있어 사람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대해 정부는 어떻게 조처했으며 앞으로 할 것인지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확인한 정보임을 분명히 하여 정부가 상황을 판단하고 있음을 전달하고 있는 동시에, 타미플루 등 적절한 대처방안의 명확한 수량을 언급했다. 현재 재고 상황과 앞으로 추가 확보 분량과 세계보건기구(WHO)의 의견을 언급하며 충분한 예방조치가 있었음을 명확히 전달했다.
물론 같은 시간 보건부 장관은 TV, 라디오, 신문 등 가능한 모든 채널에 출연하며 인터뷰와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관련 안내 책자였다. 총리 연설에도 등장하는 안내책자 배포는 5월 1일부터 시작되어 ‘모든 집(door to door)’에 전달되었다.
영국, 정확한 대응지침 책자로 배포
열 쪽짜리 책자(Important Information about Swine Flu)에는 간단한 정보가 들어있다.
- 신종플루 유행 관련 홈페이지와 전화번호
- 신종플루(당시 영국에서는 swine flu로 표기했다)는 무엇이고 어떻게 전파되는가
- 정부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 백신은 있는가
- 개인이 자신을 보호할 방법은 무엇인가
- 마스크를 써야 하는가
- 내가 지역사회를 도울 방법은 무엇인가
- 멕시코 방문 이후 독감 등의 증상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 독감의 증상은 무엇인가 등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안내책자에서는 관련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가능하면 직접 병원을 방문하는 것을 자제할 것을 권고한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병원을 중심으로 한 급격한 지역사회 감염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처를 한 것이다.
물론 의료서비스에 대한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좁고, 중앙집중형의 공공의료를 택하고 있는 영국의 특수성도 이런 조치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빠른 대응들은 2002년부터 꾸준히 만들어 개정해온 감염병 및 판데믹 대응 지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은 계속된 인플루엔자 대유행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인플루엔자 판데믹 대응 지침과 감염병 관리 지침을 만들어왔다.
영국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특징
질병 유행 이전 단계부터 유행이 휩쓸고 간 이후의 대응과 조치들을 다양하게 담고 있지만 그중에서 특히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서 눈여겨 볼만한 부분들이 있다.
1.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
첫 번째는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부분이다. 영국에서는 판데믹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 확진 환자가 영국에서 발생한 시점에 위기 대응팀과 과학 자문 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리고 초기 우선순위 및 정책 방향은 이 위원회를 통해 결정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아래와 같은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무리한 결과를 도출하지 않도록 한다.
대유행일수록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메르스의 경우 2012년 처음 나타난 질병으로 전파 경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유행의 범위가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가 지나친 조처를 하는 것은 아닌가’ 등 현재 가진 정보로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판단을 강요하는 순간 그릇된 결정을 하기 쉽다는 우려에서다.
그뿐 아니라 유행 상황에서 각각의 단계별로 중앙정부 및 의회, 보건부, 질병관리본부(영국은 Health Protection Agency), 지방 정부 등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의사결정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서로 다른 정보를 전달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도 명시되어 있다. 대체로 지나치게 많거나 적은 정보량과 불확실한 연락 채널 때문에 정보의 불균형이 일어나기 쉬운 초기 위기 대응 상황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2. 전염병 유행 이후 대비
특히 판데믹 대응지침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유행 자체, 혹은 사전 대응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행 이후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유행이 마무리된 이후, 즉 ‘회복기’에 대한 이야기다. 의료진의 번 아웃(Burn Out; 직업적 열정을 다 소진한 상태)이나 지역사회의 피해는 막심하다. 상황이 심각한 경우 에볼라처럼 수많은 의료진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의료 서비스의 초점이 현재의 유행병에 맞춰지기 때문에 덜 급한 환자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고, 유행이 잠잠해지더라도 의료 서비스 수요와 공급에 가해지는 병목현상은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역사회 역시 가까운 사람들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격리조치로 인해 중소자영업자들에게 가해지는 경제적 압박이나 낙인효과 등으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가 누적한다.
영국 정부의 지침은 의료진의 피해와 지역사회의 사회경제적인 피해를 이를 어떻게 완화하고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조치를 먼저 마련할 필요가 있음을 적고 있다.
3. 대응 방침 개선 위한 사후 평가
세 번째로 눈여겨볼 부분은 사후 평가에 대한 부분이다. 기록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옛 제국들이 그렇듯, 영국도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막대한 양의 문서를 남긴다. 특히 독립적인 사후 평가를 통해 제언을 얻고, 이 제언을 대응 지침 리뷰와 개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잘 작동하는 프로토콜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2009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183페이지에 달하는 2009년 인플루엔자 판데믹 백서는 영국 내 판데믹의 흐름과 정부의 대처를 날카롭게 평가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부분만 살펴보면 영국의 대처는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개선사항이 있었다.
- 명확한 단어 선택: 홍보 및 보도자료에서 가능한 모호한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다. 예를 들어 중증(severe) 같은 단어는 의료진이 아닌 일반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본인의 증상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파악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에 따르기 때문이다.
- 채널의 다양화: 빠르게 진화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따라 SNS와 팟캐스트 등의 채널로 다양화하는 방식, 그리고 언론을 통한 잘못된 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 보도자료 배포 등이 제안사항으로 들어 있었다.
한국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2009년 영국 사례를 보며 생각할 점이 많다.
영국은 2002년 판데믹 위험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고조되던 과정에서 계속해서 대응 지침을 개발해 왔다.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는 총리와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빠르고 적극적이며 투명한 정보 공개를 실행했다.
책자를 통한 가정 단위의 적극적인 정보전달은 스마트폰 등을 이용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있는 지금에도 효과적인 정책이었다. 사람들에게 정부가 개인 단위로 직접적인 접촉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황을 관리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미리 작성된 지침을 통해 구체적인 대응책을 시행하고 그에 따른 명확한 역할과 책임 분담이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의 사례를 비교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후 분석, 그리고 문서화는 계속해서 이런 대응책들이 개선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의 초동조처는 아쉬움이 남지만, 성공적으로 대처했다는 평가했다. 하지만 영국 사례를 보면 유행병에 ‘잘 대처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규 감염 사례를 ‘0’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전에 질병의 유입을 예방하고 발생 이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확실한 대응책과 구조를 만들어내고, 이를 평가할 수 있는 분석과 기록을 남기는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과연 한국은 메르스를 이런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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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영국정부가 잘 대처했는데 왜 한달만에 1000명이 확진되고 두달만에 8만5천명이 확진되었나요?
제가 요즘 염려되는 부분은 공기전파가 안되는 메르스도 이렇게 난리인데, 다음번엔 공기전파가 되는 코로나바이러스 변종이 올때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미국 보건감염국장인가 보도에서 “유의할 점은 최근 10년이내 코로나바이러스가 (사스, 메르스) 두번이나 창궐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앞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유의하여 대비해야 한다” 였습니다.
정부가 잘 대처해도 두달만에 8만5천명이 확진될 수 있다는게 … 충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