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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3.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배우다

‘글쓰기’를 가르치겠다고 대학 강단에 섰는데, 나는 무척 복잡한 심경이었다.

타인에게 어떠한 방식의 ‘쓰기’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생김새와 성격이 다른 것처럼 저마다의 글쓰기 역시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느 모범 답안을 정해두고 획일화된 ‘좋은 글’ 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한 사람이 일평생 체화해 온 체계를 억지로 바꾸는 작업이다. 그러면 글쓰기는 어렵고, 지루하고, 고된 행위가 될 것이다.

모든 학생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나는 강단에 서 있지만,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제도권의 양식에 맞춰 글을 써 온 사람일 뿐이다. 강의 3년 차가 된 지금 돌이켜 보면, 나보다 나은 글쓰기를 하는 학생들이 매 학기 있다. 그들은 나에게 영감을 주거나, 놀라움, 혹은 패배감까지 선사하곤 한다.

알바는 닥치는대로 했다. (출처: Erich Stüssi, BY SA)  https://flic.kr/p/Cvsam
Erich Stüssi, BY SA

첫 주차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에 돌아와, 내가 해야 할 일을 두 가지로 좁혔다.

첫째, 충실한 제도권 글쓰기 

역설적으로, 충실한 제도권 글쓰기를 가르치고자 했다. 학생들은 신문, 잡지, 댓글, 웹툰 등의 매체와 텍스트를 통해 이미 ‘시대의 글쓰기’에 노출돼 왔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단어, 문장, 문단 구성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작문법을 학습해 온 것이다.

그것의 실체를 명확히 하고,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대학국어] 강의가 필요하다. 전통과 서구의 글쓰기가 헤게모니 경쟁을 하며 근대 시기에 어떠한 작문법이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무엇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지, 그러한 글쓰기의 원리에 대해 공유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면 제도권의 글쓰기 양식이 그 연장선에 있음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한글 추상

나는 학부 시절 리포트 작성 양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첫 과제 제출을 두고 표지를 만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간단한 문제로 동기들끼리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3학년 2학기 전공수업에 이르러서야 외부 강사 한 분이 왜 리포트 양식을 제각각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가르쳐 주었다. 학교에서 협약을 맺은 논문 DB를 이용해 참고문헌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대학원생이 되어서야 알았다. 무척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다. 내 제자들에게 그런 시행착오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둘째, 인문학을 사유하는 방법 

흑백이나 삼단논법의 사유를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문제를 다루고,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자신’과 ‘사회’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중간고사 이후에는 자유 주제의 조별 발표를 진행하며 토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성장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고,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도 아직 인문학이 무엇인지 쉽게 정의할 수 없기에 ‘수업을 한다’기보다는 ‘수업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강단에 섰다.

조 나누기 

2주차 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생들에게 조별과제를 위해 자율적으로 조를 구성할 것을 공지했다.

“5분 정도 시간을 줄 테니 5명이 한 조를 만들어 나에게 말해 주세요.”

기다렸다. 30여 명이 6개의 조를 짜면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3분 정도가 지나는 동안 완성된 조는 거의 없었고, 쭈뼛쭈뼛, 멀뚱멀뚱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단일 분반이어서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 구성을 독려하고 조금 더 시간을 주었다.

시계 시간

내 학부생 시절에도 조별 과제는 늘 있었고, 대부분 교수자들은 자율적으로 조를 구성하게 했다. 학기 초마다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마지못해 따르고 있다는 위화감이 들어서 곤혹스럽던 차에, 반장이 손을 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수님, 조를 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친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어느 친구는 분명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그런 친구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교수님께서 조를 지정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반장의 말이 끝나자 몇몇 학생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지금은 3년 차 강사가 되었지만, 그때만큼 강단에서 스스로 부끄러웠던 경험이 아직 없다. 인문학을 사유하는 글쓰기를 가르치겠다는 강의실 안에서, 오히려 가장 인문학과 거리가 먼 인간이 바로 나였다.

나도 복학 첫 학기 전공 수업에서 조를 짜라는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초라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차라리 무작위으로 조를 지정해 주지’ 하는 원망을 하던 도중 “거기 학생은 친구가 없나요?” 하고 나를 확인 사살하던 교수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 역할을 내가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답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 실수를 여러분이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인문학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더욱 좋은 선생님입니다. 다음 주에 제가 조를 지정해 공지해 주겠고, 다음 학기 여러분의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3년 전 일이지만, 그날 반장이 조심스레 손을 들던 모습이, 내가 안고 있던 부끄러움이, 그 분위기와 질감이,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학생들은 갑자기 박수를 쳤고, 몇몇은 환호성을 질렀다. 반장이 “고맙습니다.” 하고 활짝 웃자 모두 “고맙습니다.” 하고 웃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침 수업 시간이 끝나 “다음 주에 봅시다.” 하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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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 

아직 인문학이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좋다는 강좌를 들어 보아도 저마다의 인문학이 다르다는 사실만 확인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인문학이 무엇인지 물으면 내 첫 제자들과의 일화를 들려줄 것이다. 내가 언젠가 마지막으로 강단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날의 일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나의 인문학을 대신할 것이다. 굳이 어려운 철학책을 애써 들추어 보거나, 하버드 교수의 강의록을 기웃거릴 필요 없이, 인문학은 언제나 내 주변의 평범한 집단 지성 안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

강단에 선 모든 교수자가, 그리고 학생이 기억해야 할 어느 단어가 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교수자와 학생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추동하는 관계다. 서로가 그것을 굳게 믿고 있다면 그 강의실은 어느 명문대보다도 더 가치 있는 성찰이 피어나는 공간이 될 것이다.

학생은 내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아는 것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나는 강단에 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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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 “라는 글귀 마음속에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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