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풍자는 프랑스 특유의 전통이다. 이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혁명세력들은 당시 권력자들을 그림을 통해 희화화했다. 이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거의 춘화에 가까운 형식으로 묘사했다.
프랑스 풍자 저널리즘의 전통
이러한 풍자는 19세기 신문이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특히 1830년과 1835년 사이, 검열이 없었던 시절, 만평을 통한 정치 풍자는 더욱 빛을 발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풍자지는 ‘라 캬리캬튀르'(La Caricature, 캐리커처)였다. 샤를 필리퐁에 의해 1830년 창간된 이 잡지는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필립을 기괴한 모습으로 묘사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예컨대 필리퐁은 루이 필립이 4단계에 걸쳐 서양 배로 변화하는 모습을 묘사했고, 이 잡지의 대표적인 풍자만화가였던 오노레 도미에는 루이 필립을 ‘가르강튀아’의 이미지를 빌려 묘사하기도 했다.
16세기 풍자문학의 대가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속 주인공인 ‘가르강튀아’는 봉건세력과 가톨릭 교회를 풍자하기 위해 창조해낸 인물로 어마어마한 거인이자 대식가로 묘사되어 있다. 바로 이런 탐욕스런 가르강튀아로 국왕을 묘사하면서 지배계급의 부패와 착취를 풍자한 도미에의 만평은 지금 보아도 그 신랄함이 극에 달한다.
이처럼 권위와 권력에 대한 만화를 통한 풍자는 현실적으로는 맞서기 어려운 대상을 향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의 방식이었다. 또한,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에게도 쉽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풍자 만평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풍자의 전통, 현대에 이어지다
이처럼 정치적 혹은 종교적 권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전통은 현대에 이어졌다. 이번 테러로 인해 샤를리 엡도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현재 프랑스의 대표적인 풍자주간지는 1915년에 창간된 캬나르 앙셰네(Le Canard Enchaîné)라 할 수 있다.
샤를리 엡도처럼 좌파 무정부주의적 성향에 가까웠던 캬나르 앙셰네는 정치인, 자본가, 성직자 등 권력층의 추문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매체였고, 검열과 전쟁에 반대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조금씩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서 캬나르 양셰네는 40만 부 가량 발행되는 대중지로, 광고 수익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언론사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프랑스 풍자 저널리즘 계승한 샤를리 엡도
더 거침없고 공격적인 풍자로 자신들의 유머코드를 이해하는 소수를 위한 언론에 가까웠던 샤를리 엡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샤를리 엡도의 테러 이후, 수많은 프랑스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가 공격당했다고 외치며 거리로 나선 이유, 샤를리 엡도가 지속해서 부패한 정치권력을, 이슬람을 비롯한 모든 종교의 성역화를 비판한 것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 풍자 저널리즘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프랑스인의 풍자에 대한 감수성은 다른 서구인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비판 대상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프랑스의 풍자 저널리즘은 도미에가 루이 필립을 풍자했던 시절부터 표현의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가 표현의 자유의 상징처럼 확산했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무슬림(이슬람교도)은 이슬람은 폭력의 종교가 아닌 평화의 종교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무슬림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복잡한 감정에 시달린다.
프랑스인으로서 테러의 희생자라는 인식과 무슬림으로서의 죄책감이 그것이다. 이들에게는 프랑스 내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렵지만, 공동체 내에서의 소외 역시 두려울 수밖에 없다. SNS에서 이들을 중심으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는 문구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테러 자체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샤를리의 무함마드 만평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샤를리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샤를리는 아니다’라는 슬로건들도 확산하고 있다.
‘나는 샤를리다’에 대한 불만… 다양한 변주들
르몽드는 ‘나는 샤를리다’ 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축약적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명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이러한 반발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 공영방송(France 2)과의 인터뷰에서 한 이맘(이슬람 성직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샤를리다’가 테러에 반대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샤를리의 무함마드 희화화에 동조하는 것이라면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당국이 ‘나는 샤를리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프랑스인을 ‘샤를리’ 아니면 ‘테러리스트’로 양분한다고 비판한다.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샤를리’는 아닌 이들의 목소리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추방 위기의 불법 체류자들의 편에서 연대의 의지를 보여주던 고등학생들을 폭력으로 저지하던 위정자들이 테러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말하고 프랑스 시민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에 반대한다.
많은 종교인들 역시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샤를리가 이슬람을 조롱했다는 의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세속주의’(정교분리 원칙)의 원칙만큼 종교의 자유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슬림도 유태인도 그들의 문화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다양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며, 무슬림을 비롯한 모든 프랑스인의 평등한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슬림, “나는 샤를리다. 그리고 나는 무함마드다”
반면 ‘나는 샤를리다’라고 외치는 젊은 무슬림들도 있다.
한 이맘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그림이나 영화 등을 통해 무함마드를 표현했다고 해서 그의 성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무슬림은 좀 더 문명화된 방식으로 이러한 행위에 대처해야 한다’. 라는 내용이 담긴 동영상을 배포하기도 했다. 실제로 코란은 선지자의 재현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
또한, 알제리의 유명 블로거로 동성애와 같은 소외된 계층, 풍자에 대한 권리, 무신론자들의 권리 등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아누아르 하마니는 “나는 샤를리다. 그리고 나는 무함마드다” 라고 주장한다.
그는 무함마드는 다른 종교나 다른 사고를 수용하는 존재였기에 자신에 대한 만평을 만약 그가 보았더라도 불쾌해 하기 보다는 오히려 즐겼을 거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캐리커처는 웃고 즐기기 위한 예술 작품이니까.
샤를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샤를리를 비판할 자유 역시 보장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샤를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샤를리의 만평이 명분을 제공했으니 표현의 자유를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접하기 힘들다.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이슬람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는 이들마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남용은 법적으로 제한된다
많은 이들은 이번 테러를 통해 표현의 자유가 모든 경우에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얼핏 들으면 마치 프랑스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표현의 자유가 법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1789년 8월 프랑스 혁명 이후 제헌 국민회의에 의해 채택된 프랑스 인권 선언(1793)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 다만, 법에 따라 규정된 경우에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는 행위는 법으로 제한되고, 특히 인종에 대한 증오와 차별 선동,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 외국인 혐오주의적 표현 등은 엄격히 금지된다.
또한, 1999년 유럽인권재판소 판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호의적이거나, 무해 혹은 무관심하다고 여겨지는 정보와 사상뿐 아니라, 불쾌하거나 충격적이거나 불안을 조성하는 정보와 사상에 대하여도 효력이 있다: 다원주의, 관용, 열린 정신 없이 민주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경신, “표현의 자유는 법 개념이지 도덕 개념 아니다”
박경신 교수는 “표현의 자유는 법 개념이지 도덕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 개인에게 무엇을 강제할 수 있는가를 정하는 기준이지, 개인이나 공동체가 취한 행동이 선하거나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거슬리고 불쾌한 표현이라고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샤를리가 만평을 게재할 표현의 자유는, 자신들의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는 무슬림들을 위해서라도 보호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저변엔 종교적 성역을 지키려는 자들이 종교가 더 인간 중심이 되길 바라는 자들에게 가한 응징이 있었을 뿐이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체로 이번 테러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 번 제한하기 시작하면 표현의 자유는 점점 더 축소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자기 검열’ 현상
그러나 테러 이후 무슬림과 연관된 내용을 다루는 영화나 예술작품들의 공개를 꺼리는 ‘자기 검열’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령 말리의 북부 지역 탱뷕투에서 벌어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고발한 ‘탱뷕투'(Timbuktu)라는 영화는 무슬림들에게 민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벨기에에서 상영이 취소되었다.
이슬람과 카톨릭의 만남을 다룬 영화, ‘라포트르'(L’Apôtre, 사도) 역시 테러리스트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상영이 취소되었다. 68혁명의 주동자였던 다니엘 콘 벤디트의 말처럼 이번 테러는 모든 권위와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자유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샤를리가 ‘일베’? 프랑스 풍자 저널리즘 이해 부족
샤를리 엡도 테러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어떤 이들은 샤를리 엡도의 무함마드 만평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슬람 문명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모든 종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에 적대적이었던 샤를리 엡도를 ‘일베’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체로 타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세속주의 원칙이 타 문화를 무시했다는 비판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도식적이다. 이들의 주장은 프랑스 풍자 저널리즘에 관한 역사적인 이해를 결여한 것으로 보인다.
샤를리 테러 표현의 자유 논쟁이 불편한 이유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건 어쩌면 끊임없는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지속한 샤를리 엡도의 무함마드 만평이 이슬람에 대한 단순한 조롱이라기보다는 위협 세력을 향한 ‘그래도 우린 쫄지 않아’라는 메시지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과연 우리 사회가 프랑스가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를 문제 삼을 만큼 충분히 이 자유를 만끽하는 사회인가라는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프랑스에서 샤를리 엡도 테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 논란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종북몰이가 판치고, 국가보안법이 상존해 있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연좌제’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지금 당장 우리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샤를리 테러와 표현의 자유 논쟁은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하다.
만일 샤를리 엡도 한국판이 있었다면, 아마도 ‘종북’ 풍자하면서 김정은 돼지와 키스하는 이석기를 그렸을 것 같군요. 유대인 까는 풍자 짜르고, 만만한 무슬림만 건드리는 게 샤를리 엡도니 말이죠…
한국은 오히려 점차 역행하는 느낌이 강한데.. 프랑스의 자유혁명이 부럽다면 약간 사대주의인가^^; 샤를리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상황 자체가 부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