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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는 언제까지 과학저널의 호구가 되어야 하나

과학자가 보통 생산해내는 프로덕트라는 것은 결국 논문이다. 과학자들은 기껏 힘들여서 연구를 진행해서 논문을 쓰고, (대개 자기 연구비로) 영어 교정도 보내기도 하고, 과학자를 때려치우면 무슨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할 만큼 멋지게 그림도 만들어서 논문을 저널에 부친다. 그러면 그걸 받은 저널은 어떻게 하나.

여러분하고 비슷한 동료 과학자들한테 ‘나는(저널)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전문가인 너님이 한번 좀 읽고서 평가해 주삼.’하고 토스한다. 그걸 받은 동료 과학자들은 논문이 뭐가 좋네, 안 좋네, 자기네들끼리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시간 내서 이걸 고쳐라’, ‘저걸 고쳐라’, ‘이런 실험 더 해보지?’ 하면서 코멘트를 해준다. 물론 돈도 한 푼 못 받고.

과학자, 그대의 이름은…… 호구

그런 개선작업을 거쳐서 과학자 동료들이 ‘이거 논문 될 거 같음’이라고 판단한 원고를 저널에서는 그냥 건성으로 슥슥 포맷만 맞추고, 가끔 그림의 레이아웃 정도나 바꾼 다음, ‘너 게재하려면 얼마 내는지는 알아보고 오셨지? 참, 너 컬러 그림 많더라? 너님 요금 추가인 건 알지?’ 하고 청구서를 보낸다.

그러면 과학자라는 족속들은 “존나좋군!”하고 그 돈을 덜컥 낸다. (뭐 그 돈만 냅니까? ‘오오~ 액셉트(accept)! 오늘은 내가 쏜다!’ 하면서 뭔가 저녁이라든지 술이라든지 쏘기도 하죠.)

존나좋군?

내 논문이 액셉트 됐다고?

게재료라는 것은 저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충 퉁쳐서 우리 돈으로 백만 원 이하로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요즘은 오픈 액세스 저널들은 더 비싸기도 하고.

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대개의 저널에 논문을 내기 전에는 “저작권 이전 서류”에 사인해서 “불초 소생, 출판사로 저작권을 넘기겠습니다! 네! 전부 드…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약을 해 줘야 한다. 여기서 “돈을 받고 저작권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면서 저작권’도’ 넘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안 그러면 여기서 한치도 앞으로 못 나아간다.

"게재료 내놔" / 드…드리겠습니다. 나는야 배드애스 N모 잡지 편집장 (원작: 김성모의 늑대파)

“게재료 내놔” / 드…드리겠습니다. 나는야 배드애스 N모 잡지 편집장 (원작: 김성모의 늑대파)

논문의 법적 명칭이 뭐라고?

그렇게 해서 나온 논문은 법적으로 뭘까?

광고

광고의 정의가 뭡니까. 뭔가를 알리기 위해서 자기 돈 내고 매체에 싣는 거 아님? 님은 님 돈을 내고 매체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알리기 위해 ‘뭔가’를 게재하셨죠? 그럼 그게 광고지 뭐…

증거를 보여준다.

논문은 광고다

위의 그림 보이지? JBC의 논문에 1990년대까지 나오던 이야기인데, 이렇게 쓰여 있다.

“이것은 게재료를 내고 개재된 글이며 따라서 법적으로 광고임”

우리가 무슨 내용을 넣을지 다 기획취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붙이고, 시시콜콜한 편집도 다 하고, 게재료까지 내고, 저작권까지 이전시켜주시는 광고를 낸다는데 우리의 위대한 저널들께서는 번번이 이런 말을 하면서 퇴짜를 놓는다.

“유(you)의 평타치는 쏘우-쏘우한 매뉴스크립은 우리의 럭셔리하고 트렌디한 저널에 어피어(appear)하기에는 임팩트가 리를빗 위크(little bit weak)하다고나 할까염? 모어 스페시픽(more specific)한 필드의 스페시픽 저널로 고우~”

광고를 돈 들고 와서 내주겠다는데 왜 이리 콧대는 높은지… 그래도 꾸역꾸역 내보겠다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제발 제 광고 좀 위대한 귀 저널에 내게 해주세요~” 하면서 또 내고 또 떨어지고…

내가 낸 광고(논문)를 내가 돈 내고 봐야 하는 현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게재가 승인된 광고… 아니 논문들은 아무나 읽을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본 광고를 보려면 프라이빗 액세스(private access)가 필요하다. (근데 왜 기사는 공짜로 보여주는데!) 아니면 본인이 사이트 라이센스를 가진 기관에 있든지. 만약 특정한 논문 딱 하나가 필요할 뿐이라서 그걸 잠시만 읽고 싶다면? 오, 히어 호구 컴!

논문을 보려면 유료 결제가 필요합니다.

고갱님, 32달러 되겠습니다.

“내가 이 논문 저자인데 좀 안돼?”

“저… 고갱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하시고, 일단 결제를 하시지 말입니다.”

뭐 온라인 저널이 보편화한 지금은 의미를 잃었지만, 이전에는 리프린트(reprint)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 논문이 어찌저찌 해서 출판되면 ‘덕분에 논문 하나 나갔습니다!’ 하면서 돌리곤 했었다. 그럼 그건 공짠가? 노노. 그것도 다 돈이지… 저널에 실린 내 기사만 딸랑 나와 있는 것을 주려면 이걸 또 돈 주고 사야 해!

잡지에 기사를 쓰거나 단행본을 내면 저자 증정본으로 몇 권씩 주던 기억이 있는데, 이 바닥의 저널엔 그런 거 없어요, 내 참… 하긴 어쩌다 N모 출판사의 새끼 저널에 논문을 낸 적이 있었는데 해당 저널은 논문이 실린 호를 하나 보내줬다. ‘과학계의 스크루지이자 최고 존엄’인 N모의 은혜에 감읍해서 눈물이 더 질질 나더라…

여기까지 읽은 타 업계 분들이 보면 “혹시 연구에 소요하는 경비를 저널이 댄 건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마치 잡지사에서 경비를 모두 지원하고 프리랜서가 기획취재를 했다고 하면 그 기사에 대한 저작권을 잡지사에서 가지는 것처럼. 근데 그것도 아냐. 당연한 것이지만 대개 저널에 실리는 내용을 만드는 데 든 비용은(때로는 수십, 수백만, 수천만 달러가 될 수도 있는 그 비용은) 정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기타 연구지원 기관에서 경비를 댄다. 그런데도 왜 우리 과학자들은 이 내용을 저널에 “드…드리겠습니다” 하고 바치는데?

옛날엔 그랬다고 치자

물론 옛날, 인터넷이 없던 시절, 즉 연구정보가 잡지 형태로 유통되고, 그것들을 도서관에서 구독하던 시절은 이런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옛날, 아래 사진의 올드비 분들이 활동하실 때는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공간이 학회, 학술저널 딱 두 개 정도였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끼리는 편지를 하든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사적 교류이니 생략하고.

5차 솔베이 세계 물리학 회의 1927년

5차 솔베이 세계 물리학 회의 1927년

이때는 손으로 쓴 육필원고(혹은 타자기로 직접 타이핑한 원고)를 정리해서 책 형태로 출판하여 배포해야 했으므로 당연히 비용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대중적이지 않고, 발행 부수도 적은 학술 저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구자가 자가출판을 하는 형식으로 게재료를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연구자의 숫자도 적고, 따라서 논문을 내봐야 그 사람이 그 사람. 그러니 자가출판이지. (누군가에게는 동인지라는 단어가 떠오를지도…) 결국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과학의 결과가 유통되는 주 매체는 학술저널이 되었다.

오늘날의 과학자, 유통채널에게 농락당하는 생산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할 때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품을 유통하여 소비자의 손에 들려주는 과정 역시 극히 중요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인류가 몰랐던 자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이라는 산업에서 제일 중요한 산물인 논문이라는 ‘제품’을 어떤 유통경로로 전달하여 소비자(과학의 일차 소비자는 대개 동료 과학자)에게 전달하느냐는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 가령 농산물의 유통 과정이 영 뷁스러워서 소비자에게 신선한 농산물이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연구 결과를 ‘상품’으로 유통하는 주 경로인 학술저널에 대해서 과학자는 ‘유통채널에 농락당하는 생산자’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뭘까?

사실상 현대의 과학저널 체계는 사실 저 위의 정모 사진을 찍은 올드비 분들이 활동하실 때와 별반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된다. 물론 책이라는 물리적인 매체를 통하던 게 이제 ‘온라인화’되었고, 도서관에서 저널을 복사해 오는 것이 아니라 pdf로 내려받는다는 차이는 있지만, 저널로 ‘제품화’되는 과정 자체는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변했는데도) 옛날의 저널과 지금의 저널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과학저널, 21세기의 비디오 가게

즉, 저 올드비 양반들이 활동하시던 때는 대개 1인, 많아야 2인 정도의 저자가 논문을 손(혹은 타자기)으로 쓰고, 이 원고가 책으로 출판되던 시기였다. 지금과 같이 전 세계적인 저널이 있었다기보다는 독일 사람은 그냥 독일 저널에 논문을 내고, 미쿡인은 미쿡 저널에 논문을 내고 하던 시기라고나 할까. (실제로 그 당시의 저널에는 해외저널 번역 기사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연구를 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저렇게 학회 때 모이면 사진 한 장에 웬만한 분야의 인물은 다 등장할 수 있던 시기다. 논문 내던 사람이면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거 알던 시기.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일단 자연과학 연구의 경우 1~2인의 저자로 논문을 내는 사례 자체가 리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편이다.

흔한 과학 논문 저자 목록의 극히 일부

흔한 과학 논문 저자 목록의 극히 일부

아박사 님

아박사 님

그리고 연구자의 수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고, 그러므로 제한된 리소스(연구비,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IT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자기 PC에서 저널에 실리는 것과 별반 다를 수 없는 거의 완전한 논문 배포본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이전 아박사 님이 논문 쓰던 시기와 별반 차이 없는 스타일로 우리의 상품을 유통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추가로 발생하곤 한다.

첫째, 경쟁은 치열하고, 지식의 유통속도는 빨라지는데, 정작 논문에 실린 것은 최소 몇 달, 혹은 몇 년 전의 이야기가 된다.

논문의 원고가 작성된 이후에 최종적으로 ‘출시’가 되기까지의 갭은 최소 몇 달부터 심할 때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특히 자연(네이처) → 자연 동생 → 쁘나스(PNAS) → 각종 저널 오브 어쩌구 저쩌구 → 쁠로스원(PLOS ONE) → 국내학회학술지 등등의 계층을 거쳐 가면서 ‘너님, 리젝(reject)~’ 원투 스트레이트를 처맞는 경우에는 더더욱 길어진다.

둘째, 정보의 비대칭 현상이 심각해진다.

논문 리뷰 등을 많이 하는 소위 대가 양반들은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경쟁자들이 ‘나 뭐 하고 있어~’를 다 알아서 보고해준다. 심지어 직접 리뷰를 안 해도 여기저기 심어놓은 아랫것들이 다 보고해주지. 그러면 대가 양반은 ‘실험실 포닥들 다 모여봐!’해서 한국의 누군가가 한 결과와 비슷한 결과를 한 달 안에 스윽 내놓는다. 그리고 한국의 누군가에게는 빡센 요구를 몇 개 던져서 발을 묶은 다음, 자신은 결과를 ‘짠~’내고 백투백! 가령 왜 몇십 년 동안 안 풀리던 단백질 구조들이 한번 풀릴 때는 서너 개의 랩에서 한꺼번에 나올까?

셋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해당 저널의 독점권이 돼버린다.

한 10년 전의 엠바고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연히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결과는 저자, 몇몇 저널 에디터, 리뷰어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된다.

이런 정보 독점과 연구자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는 것이 융합되어 남이 이미 다 해놓고 논문 출판 과정에 들어가 있는 일을 룰루랄라 지금 시작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가령 어제 세팅한 크리스탈 드랍에 멋진 크리스탈이 나와서 엑스레이 쏴 보니까 1.5옹스트롬으로 회절! ‘오오~ 나도 자연(네이처) 찍는 거임?’ 하고 신나서 저녁에 실험실원들한테 거하게 쐈는데 다음날 실험실 출근해서 숙취를 참으면서 펍메드(PubMed) 찾아보니 ‘그 단백질 구조가 이미 자연(네이처)에 아티클로 나왔어~’ 하는 안습한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는 거다.

넷째, 참신한 논문을 싣기 위해 저널들이 무리수를 둔다.

저널이 많아지고 논문이 많아지다 보니까 독자들도 이걸 다 찾아 읽을 수 없다. 소위 럭셔리한 저널들에 실리는 것들만 찾아읽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그런데 럭셔리 저널이란 게 그냥 유지되나? 그게 유지되려면 어디 블로그에서 ‘논읽남'(논문 읽어주는 남자)하는 한국의 어떤 잉여도 알아들을 만큼 참신하고 브레이크쓰루~한 토픽을 발굴해야지.

가령 비소가 많은 동네에 사는 미생물은 DNA에 인 대신 비소가 들어있다거나… 아니면 pH를 촉촉하게 약산성으로 만들어주면 줄기세포가 마구 돋는다거나… 그렇게도 도도하던 저널들이 어째 이런 주장을 하는 논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리뷰가 널럴해진다! 리뷰어들이 극딜을 하는데도 막 실어준다고! (편집자 주: 이 사례들은 모두 유명 저널에 실렸지만 결국 거짓으로 판명된 연구들입니다.)

비디오 가게 대신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는 안 될까?

이제 과학정보를 유통하는 방법이 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SNS는 뒀다가 뭐하나. SNS에는 ‘허니버터칩 먹었음’, ‘우리 아기가 잘 커요’하는 사진만 올리는 데 써야 하나?

피겨 1번 데이터 나오면 바로 사진 올리고… “님 웨스턴 잡밴드 쩌네염.”, “쥐가 왜 이리 빌빌해?!”, “님 파리는 걍 조루얔ㅋㅋㅋ” 이런 악플도 실시간으로 달아가면서 과학을 하면 안 될까?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일단 원고가 어느 정도 쓰이면 올리고 SNS식으로 좋아요, 싫어요, 리플 수, 리트윗 횟수, 리뷰(라고 쓰고 악플이라고 읽는다)가 올라간 횟수 등으로 대중에게 노출하는 시스템 같은 거 없을까?

사회의 상황이 변함에 따라 제품의 유통 경로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동네마다 비디오 가게가 있어서 VHS 테이프를 빌려다가 영화를 봤다. 하지만 지금 그 비디오가게는 다 어디 갔나.

상업적인 출판사에서 나온 저널들은 마치 지금 이 시점의 비디오 가게와 비슷한 상황 아닐까? 굳이 비유하자면 비디오 가게에서 돈 내면 영화파일을 USB에 카피해 주는 그런 뻘쭘한 상황?

2줄로 요약한다.

  • 지금 저널 시스템은 과학정보 유통 시스템으로 넘 낡았으니 여기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 그래서 과학자들이 호구 잡히지 않고 과학정보를 보다 신속, 정확, 민주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근데 우린 아무 일도 안 하잖아. 우린 아마 안 될거야……가 아니고 한번 생각을 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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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 필자, 과학자

소싯적 꿈은 평범한 봉급생활자였으나 지금은 지구정복을 획책하는 Mad Scientist.

작성 기사 수 :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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