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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하는 업무 중 상당 부분은 전달자 역할이다. 기업들이 내는 보도자료를 ‘새롭게 갈무리한 뒤’ 독자들에게 전달해주고,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땐 ‘전문가 의견’을 전달한다. 요즘은 ‘네티즌 반응’이란 명분으로 네티즌들의 각종 글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비욘드 뉴스기자들은 원래 전달자 역할을 했을까? 뉴스 역사를 뒤적여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기 미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 쓴 기사들은 대부분 논평(comment)이었다. 그것도 강한 자기주장을 담은. 미셸 스티븐스의 [비욘드 뉴스](2014)에 나오는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

프랭클린은 손에 수첩을 들고 지역 모임에 나타나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는 방식의 신문 작업을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진 않았다. 18세기 미국에선 그런 작업을 기자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반으로 오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흔히 얘기하는 객관주의 보도 관행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쯤 되면 이런 경향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난다. 역시 [비욘드 뉴스]에서 인용해보면 이렇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사실(fact)이 점점 더 저널리즘을 지배하게 됐다. 1851년에 영국 언론을 관찰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영국 사람들 대다수는 토론보다는 정보를 더 애호했다. 그들은 사실 너머에 있는 세계에 대한 빛나는 추론보다는 사실, 혹은 그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더 좋아했다.” 1894년 ‘타임스’의 한 런던 통신원은 “전신은 사실을 위한 것이다. 비평과 정치적 논평은 우편으로 올 수 있다.”는 지시를 받았다. 미국 저널리스트들은 사실에 대해 더 많이 열광했으며, “비평과 정치적 논평”의 중요성을 줄이는 데 훨씬 더 열정적이었다.

저런 현상보다 더 중요한 건 ‘왜?’라는 질문이다. 여러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 나오는 얘기대로 전신의 등장과 함께 ‘속보’가 가능해진 부분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판매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고려됐을 테고.

그리고 대중 지식사회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기자가 모든 것을 리드하는 선구적 지식인 역할을 하기 힘들어졌다는 부분도 변수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한국에서도 근대화 초기 지식인들은 대부분 기자 노릇을 했다.)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가운데). 미국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프랭클린은 한 때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란 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인쇄공으로 일하고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가운데). 미국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프랭클린은 한때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란 신문을 운영하기도 했다. (사진: 퍼블릭 도메인)

유통망 민주화 시대… 변신 압박받는 기자들

하지만 난 이 문제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보도 관행 변화는 정보 유통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얘기다. 무슨 의미인가? 대중 매체의 등장은 대중 지식 사회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지식이 세분화되고 지식인의 층위가 두터워지면서 기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얘기다.

이전 시대처럼 ‘지식의 깊이’로 대중을 압도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졌다는 것. 대신 기자들은 방대한 유통망을 등에 업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유통망이 한정돼 있던 시절엔 이게 지식의 깊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니 전문가들은 ‘어쩔 수 없이’ 기자들의 펜 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통찰력 있는 지식을 가진 전문가보다 ‘지식 유통망’을 장악한 기자들이 훨씬 더 무서운 존재였다.

이런 시대엔 기자들이 굳이 전문 지식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대중들이 제대로 접하기 힘든 전문가들의 ‘분석’과 ‘해석’을 제때 제때 전달해주는 것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he said / she said 저널리즘’ 역시 그 시대 상황에선 가장 선진적인 정보 유통 시스템일 수도 있단 얘기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인터넷과 모바일, 특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 ‘기자들의 대중지식 유통망 독점’ 시대는 끝장이 나버렸다. 기자들을 통해서만 발언했던 전문가들이 이젠 직접 발언하기 시작했다.

박사 논문 쓰면서 한때 파워 블로거로 활동했던 최병성 목사를 인터뷰한 적 있다. 그때 그분이 직접 블로그에 ‘쓰레기 시멘트’ 관련 글들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기자들에게 설명을 해줬더니,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광고주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제대로 기사가 나오지 않더라는 것. 그러던 차에 아예 직접 블로그에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쓰기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최병성 목사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그 누가 쓴 기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최근 들어 ‘객관적 중립보도’나 ‘전문가 인용’에 의존하는 보도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건 이런 시대 상황 변화 때문이다. 유통망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대중화되면서 앵무새처럼 전문가 멘트 옮기는 보도만으론 경쟁력을 갖기 힘든 상황이 돼 버렸다.

직접 경험해 본 ‘전문가 코스프레’

여기서 잠시 내 얘길 해 보자. 2년 전 삼성과 애플의 1차 특허 소송이 막 시작될 무렵 우연이 소송 기사를 쓰게 됐다. 처음엔 그냥 외신 인용 보도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살짝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몇 날 며칠 시간을 낸 뒤 마음먹고 ‘원본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법원 판결문이 꽤 지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번 읽고 나니 살짝 노하우가 생겼다. 그러면서 외신들의 보도 역시 허점이 적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이거 블루오션이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때부턴 복잡한 원본 자료들이 쏟아져나올 때면 살짝 흥분되기 시작했다. 다른 기자들이 큰 관심 안 기울이는 부분이니, 느긋하게 시간 잡고 읽은 뒤 나름대로 정리만 해도 꽤 괜찮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했더니, 어느새 특허 관련 얘기가 나오면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에 근접한 수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2차 특허 소송이 끝났을 땐 외신 기자들과 대결한다는 심정으로 ‘주관적인 평가’를 담은 기사를 썼다. 아래 링크한 기사가 바로 그때 쓴 거다. 이 기사를 쓴 뒤 꽤 많은 칭찬 메일을 받았다.

애플과 삼성의 특허 공방
ⓒ아이뉴스24

저 당시 내가 특허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은 건 이유가 있다. 앵무새처럼 외신 인용 보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였다. 대부분의 기사가 간단한 팩트를 전해준 뒤 변리사 멘트를 채워넣는데, 전문가 멘트라는 게 대부분 기자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저럴 것 있을까? 차라리 내가 공부 좀 해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내가 전문가 노릇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해보니, 할 만했다. 그쪽에 관심 두는 기자들이 없었던 탓에 노력에 비해선 꽤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망중립성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올 초 미국 항소법원이 FCC의 2010년 오픈인터넷규칙에 대해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했다. 그때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쩌면 또 다른 블루오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얄팍한 생각. 그래서 날 잡아서 마음먹고 항소법원 판결문을 읽어봤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특허 소송 판결문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그런 다음엔 전문가 멘트 생략하고 아예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한번 해 봤다. 전통적인 기사 요건이란 잣대로 접근할 경우엔 문제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적어도 한 가지 확신을 하고 있었다. 형식적 객관주의의 틀은 벗었지만, 적어도 내용 면에선 ‘객관주의 틀’을 고수한 기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

망이 중립적이지 않고, 서비스마다 차별적이라면, 이용자는 콘텐츠마다 별도 부가되는 요금제를 만날지도 모른다.
망이 중립적이지 않고, 서비스마다 차별적이라면, 이용자는 콘텐츠마다 별도 부가되는 요금제를 만날지도 모른다.

망중립성 기사를 쓸 땐 법원 판결문과 함께 관련 서적들을 몇 권 독파했다. 읽다 보니 망중립성의 근본 철학인 ‘커먼 캐리어'(common carrier)란 게 꽤 깊은 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뿌리를 잡고 보니, 현재 공방을 벌이는 논쟁들이 좀 더 쉽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거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때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후배 기자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he said / she said 저널리즘’ 극복해야

자, 글을 맺자. 20세기 저널리즘에선 기자들은 굳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땐 전문가의 얘기를 잘 정리해서 전달해주는 것만으로도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었다. 이젠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앵무새처럼 옮기는 것만으론 ‘기자란 직업’의 존재 가치를 부각하기 힘든 시대가 됐다. 이젠 기자들에겐 팩트 수집보다는 분석과 논평이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특종 무의미론’은 절대 아니다. 특종. 당연히 기자의 생명이다. 하지만 몇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특종으로 기자의 사명을 다 했다고 하는 건,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예전 우리가 대학 다닐 땐 서술형 시험을 볼 때 외워서 써야 하는 게 많았다. 그땐 지식을 외우는 것도 경쟁력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떨까? 이젠 외우는 건 더는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스마트폰 뒤지면 금방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건 무수히 많은 정보 속에서 맥락을 찾아내고, 그 정보의 의미를 분석해내는 게 더 중요한 경쟁력인 시대가 됐다.

이런 시대 변화는 저널리즘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러니 이제 기자들도 전문가의 치마폭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전문가를 만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전문가들 역시 경쟁자란 생각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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