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이 작은 편이다.
몸이 작은 남자
그래서 나는 가끔 여성용 바지를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어깨 사이즈에 맞추면 그럭저럭 중간 사이즈의 셔츠를 입는 덴 무리가 없는데, 유독 허리가 가늘어 바지를 살 땐 매장에서 옷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 직업적으로 정장을 입을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바지를 사면 늘 면바지나 청바지 정도인데, 매장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의 경우 내 허리 사이즈를 들으면 질투(라고 믿고 싶다)하듯 나를 한 차례 흘겨보곤 한다.
근년에 들어 남자의 날씬함도 썩 유행을 탄 덕에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딱히 나아진 것은 아니다. 나처럼 자라다 만 호빗의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상할 정도로 긴 기장은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나라에 저렇게 다리가 긴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발볼 넓은 여자
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의 일이지만, 여성화의 경우는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발볼이 넓은 여성들에게 선택권이 별로 없는 것이다. 볼이 넓은 발을 가진 여성들은 보통 자기 치수보다 큰 구두를 사곤 하는데, 이 경우 앞이 비게 된다.
신발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한다지만 대개 굽이 있는 여성화에서 앞이 비면 걸을 때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여성화는 발볼 8cm에서 10cm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데, 발볼이 조금 넓은 축에 속하는 여성들은 발을 디뎠을 때 12cm 정도까지 퍼지는 것은 기본이다.
여성화를 신어도 불편함이 없을 소위 ‘칼발’인 내가(내 발볼은 8.9cm이다) 신어도 꽉 들어차는데 발볼이 넓은 여성들은 오죽하겠는가. 구두를 자주 신는 여성들의 발 양쪽 끝에 생긴 불룩한 굳은살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정확한 통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식의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불편은 감수해야만 하는 걸까?
어쩌면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약간의 불편함 정도를 감수하고 상품에 적당히 적응하며 살아가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우리는 그런 불편함을 지속해서 감수해야만 하는가? 아주 상식적인 차원에서부터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소비자다. 내가 땀흘려 번 돈으로 내 몸에 맞는 것을 사 입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나오는 물품들은 반드시 나의 편익에 맞춰 나오지는 않는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에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요에 맞춰 물품이 나온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규격화된 채로만 나와도 과연 괜찮은 것인가? 조금은 더 세분화한 상품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인가?
잠시 캐나다에 머무르던 시절 나는 백화점에서 바지를 두 벌 산 일이 있었다. 오래된 얘기지만 내가 허리 사이즈를 말하자 기장을 알려달라고 점원이 요구해왔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쇼핑을 무척 좋아하다 보니 나는 매장별로 돌아다니며 입어보곤 하는데, 기장을 묻지 않았던 매장은 두세 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여성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볼 넓은 여자도 몸이 작은 남자도 많다!
발볼이 넓은 여성들만큼이나 나처럼 덜 자란 사람들도 우리나라엔 상당수다. 게다가 아무리 체형이 서구화된다고 유행가 읊조리듯 하더라도 우리의 하체 길이는 여전히 각양각색이다. 나처럼 전체적으로 짧은 이들 말고 하체가 짧은 이들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다리가 길고 훤칠한 것은 매우 보기 좋은 모양새이긴 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만이 사는 사회는 아니잖은가?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그것도 ‘충분히 합의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상품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소비자의 몫이지, 상품을 공급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헌데도 시장에 나와 있는 물품들은 소비자들을 향해 자신들이 갖춘 아름다움의 기준을 요구한다. 그것을 올바로 자기 몸에 맞추기 위해 소비자들은 추가적인 소비를 해야만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효율성’을 위한 ‘규격’에 억압당한 몸
여기엔 물론 미에 대한 규격화와 강요라는 측면만 있지는 않다. 경제적 효율성 다시 말해 이윤을 추구하는 공급자 입장의 논리도 작용한다. 더 다양한 상품을 소수로 생산하는 것은 분명 적은 종류의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것보다는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종류의 효율성이 어디에서 자주 나오던 말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의 산업사회에 대한 역사교과서의 설명에서다. 우리는 근대시대에 살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논리적 비약이거나 거친 뒤섞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효율성의 추구 속에서 잊히거나 묵살되는 것은, 이 글의 소재에 한하여 말하자면 넓은 발볼과 (나 같은) 호빗들의 몸이다. 숫자로만 보면 소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규격화된 상품에 의해 주변화된다. 상품이 인간의 몸 중 어떤 몸을 가시화할 것인지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셈이다.
물론 나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나의 작은 몸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 혹은 발볼이 넓은 여성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상품이 그 자체로 담지한 시각성이든 준거틀이든 그 무엇이든, 사람이란 것이 그리 만만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수상할 정도로 긴 바지나 볼 좁은 여성화처럼 개인의 몸에 대한 인식틀이 담긴 상품이 넘쳐나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수요에 따른 생산 코스트 때문이다
바지 기장은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것이 쉽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