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나는 국내 한 언론사 대표이사의 비서다.

나는 언론사 대표('보스'. Boss)의 비서다. (사진: NS Newsflash, CC BY)
나는 언론사 대표(‘보스’. Boss)를 보좌하는 비서다. (사진: NS Newsflash, CC BY)

언론사 대표 비서가 하는 일

언론사 대표이사의 비서가 하는 일은 가지가지다.

  1. 사장 일정을 챙긴다.
  2. 결재 문서가 사장에게 들어가기 전에 확인하고 짤막하게 요약해 올린다.
  3. 각종 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기록한다.
  4. 사장 지시사항을 정리해 해당 부서에 요청하고, 중간중간 점검하며 보고한다.
  5. 사장 이름으로 나가는 연설문, 인사말씀을 작성한다.
  6. 사내외 정보와 여론을 확인해 보고한다.
  7. 회사를 담당하는 출입 기자와 정보원 등을 응대한다.
스위스 군용칼 맥가이버 칼
나는 참 다양한 일을 한다. (사진: AJC1, CC BY NC SA)

가장 낯선 일, 연설문 쓰기

이 중에서 가장 낯선 일이 연설문 쓰기였다. 사장이 취임한 이후 통계를 내보면 대략 3일에 하나꼴로 연설문을 썼다. 그중에 유일하게 퇴짜를 맞은 글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공을 들인 글이다. 세월호 참사 후 기업인과 함께하는 조찬 행사에서 할 연설문이었다.

말풍선
가장 낯선 일은 연설문 쓰기. 나는 3일에 한 번 꼴로 참 다양한 소재와 청중을 상대로 하는 연설문을 썼다. (사진: Marc Wathieu, CC BY NC ND)

‘우리가 언제까지 세월호를 프론트에 올려야 하나?’

아침마다 하는 회의 중에 조심스레 이야기가 나왔다. 세월호는 국민적 트라우마다. 한때 SNS 이용자의 프로필 사진이 전부 노란 리본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조금씩 얼굴로 채워지고 있지만, 아직도 다수는 누군가 건드리면 툭 하고 터져버릴 듯 통탄에 잠겨 있다. 누구라도 이제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하자고 하면 배신자처럼 여겨진다. 타사도 계속 올리고 있다.

하지만 한없이 감정에 빠져 있는 것 역시 희생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슬픔에 빠진 서로를 보듬고 추스려 삶에 복귀하도록 해야 한다. 비슷한 사고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많은 것을 손봐야 한다. 독하고, 집요하게. 그럼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어떻게 감정에서 이성으로 방향을 전환할까.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비탈리 카네프스키, 1989)의 한 장면
논의를 곱씹었다. 연설문에 이 고민을 담고 싶었다. 생각을 다지고 자료를 찾았다. 어떻게 말문을 열까 고민하다가 한 해외 신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자료에만 남아 잠들어 있던 연설문의 일부를 옮긴다.

퇴짜 맞은 연설문: 세월호와 트라이베카 영화제

그제 트라이베카 영화제가 폐막했습니다. 아실테지만, 트라이베카는 뉴욕 맨해트 남쪽에 위치한 부촌입니다. 911테러가 발생한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불과 몇 블록 거리에 있습니다. 주변으로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911 테러 이후 온 미국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슬픔에 잠겨 몇 달째 삶으로 복귀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뉴욕 사람들은 외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경기도 침체했습니다.

그때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제작자인 제인 로젠탈이 함께 트라이베카 영화제를 조직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래서 사람들의 찾기를 꺼려 발걸음이 드물어진 곳에서 영화제를 열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에 복귀하도록 돕고,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하며,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의 힘을 경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올해로 열세 회째를 맞은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국제 영화제로 자리 잡아 온 뉴욕이 기다리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OOOO 역시 언론사로 또 콘텐츠 공급자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뉴스는 비극을 소비합니다. 하지만 OOOO는 거기에 머무르는 매체가 아닙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함께해주신 분들께도 OOOO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또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다면 저희가 그 과정에 어떤 공동의 노력을 할 수 있을는지 지혜를 여쭙고 싶습니다.

– ‘퇴짜 맞은 연설문’ 중에서

트라이베카 영화제
왼쪽에 트라이베카 영화제를 알리는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911 테러의 슬픔을 딛고, 지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2002년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 제작자 제인 로젠탈 등이 시작한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국제 영화제로 성장했다. (사진: larryosan, CC BY NC SA)

“사장이 되세요”

애정을 담아 쓴 글이 되돌아와 개인적으로는 참 아까웠다. 상황으로 봐도 적절한 메시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되돌아온 것도 이해가 간다.

강원국 선생이 쓴 [대통령의 글쓰기]를 읽었다. 연설문을 쓸 때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파악해 대통령의 말처럼 쓴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이 글은 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었다. 이전의 연설문은 평소 사장의 발언을 중심으로 썼다. 누가 봐도 사장의 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글은 누가 봐도 사장의 글은 아니다.

강원국 선생께 정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글일 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사장이 되세요.”

그럴 리도 없고 원치도 않으니 이렇게 슬로우뉴스에서 살리는 걸로.

관련 글

첫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