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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7일, 10년 이상 빚을 갚지 못했던 사람들 117명한테 일제히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또 다른 빚 독촉 편지였을까요? 아뇨. 기이하게도 편지의 내용은 그 반대였습니다.

귀하의 채무 중 원금 100만 원에 해당하는 채권을 사단법인 희망살림이 2014년 4월 10일부로 매입했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위 채권에 대해 어떠한 청구권도 행사하지 않고 즉시 파기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빚을 대신 없애줬다는 얘기였죠. 편지에는 ‘채권추심이나 유사한 채권자 연락을 받았다면 연락해달라’는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빚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상담과 교육을 제공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희망살림을 비롯해 사회적기업 에듀머니, 녹색소비자연대, 민생연대 등 금융소비자네트워크 회원들이 없애준 부채의 원금은 무려 4억 6천7백여만 원!

놀랍게도 빚을 없애는 데 들어간 돈은 고작 1천3백여만 원이었습니다. 원금의 ​2.8%도 안 되는 돈으로 10년 묵은 빚을 없애준 것이지요.

귀하의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채권의 가격은 헐값이 되지만, 땡처리되지 않는 채무자의 빚

​금융소비자네트워크 회원들은 먼저 회원들과 주변 기부자들이 모을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모았습니다. 지난 4월 3일엔 서울 신촌에서 빚 탕감 프로젝트 기금 모금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일반시민 140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지요.

그리고 4월 14일, 금융감독기관과 금융회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 여의도에 갔습니다. 거기서 회원들은 10년 이상 빚을 갚지 못했던 소액 채무자 117명의 부실채권을 불태워 없앴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99%를 위한 99%에 의한 구제.
빚 제로로 다시 살자.

어떻게 원금의 2.8%밖에 안 되는 돈으로 전체 빚을 탕감할 수 있는 걸까요? 경제교육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제윤경 대표는 “최근 인터넷에서 재테크 방법으로 소개되어 인기를 끈 부실채권, 일명 NPL(Non-performing Loan) 투자와 같은 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금융회사는 3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을 손실로 처리해 버리거나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 버립니다. 이것을 헐값에 매입한 대부업체는 채무자에게 원금은 물론이거니와 연체이자와 법정비용까지 청구합니다. 회수에 실패한 채권은 다시 또 다른 대부업체에 팔리고, 채권의 가격은 점점 내려갑니다. 빚이 ‘땡처리’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연체기간에 따라 100만 원짜리 채권이 3% 전후 즉 3만 원에 팔리기도 합니다.

손실 처리된 채권으로 3백억 원 이상 돈 버는 은행들

그러나 채무자가 갚아야 할 돈은 ‘땡처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간이 길어질수록 연체이자가 불어나면서 갚아야 할 돈의 규모는 점점 커집니다. 제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극단적으로는 1백만 원 원금의 채권으로 1천만 원 이상도 받아낼 권리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연체자들은 공식적인 주소지와 근무지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여러 채권자로부터 끝도 없는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부실채권 거래시장의 이러한 원리를 사용해 큰돈 버는 큰 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은행입니다. 채무를 제공한 은행들이 세운 유암코(UAMCO) 같은 부실채권 투자전문회사들이죠. 유암코는 지난해 부실채권으로 1천5십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습니다. (유암코는 신한, 국민, 하나, 기업, 우리, 농협은행이 모여 설립한 회사입니다)

유암코 소개

채무자가 자신의 빚을 3만 원에 사서 탕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지금의 금융시장에선 일어날 수 없습니다. 4년 전에 진 빚으로 채권 추심을 당하다 개인회생을 신청했던 한 채무자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지만, 부채 증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실채권이 된 그의 채권이 여러 번 거래된 탓에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죠.

7억 원 모아 155억 원 빚 없앤 미국 ‘롤링 주빌리’처럼

채무자가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 잘못 측정하더라도 채권자들은 돈을 잃지 않고 채무자들만 죽도록 빚에 시달리는 현상은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시민단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롤링 주빌리(Rolling Jubilee)’라 불리는 빚 탕감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롤링 주빌리

이 운동으로 2012년 11월 기준 미국 시민들은 677,552달러를 모아 원금 14,734,569달러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태웠습니다. 우리 돈으로 치면 7억 원으로 155억 원의 빚을 없앤 것이죠. 2,693명이 갚지 못하고 연체했던 빚이었습니다.

‘주빌리’란 일정 기간마다 죄 즉 빚을 탕감해주던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희년’이라고 하지요. 구약성서 레위기에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는 구절과 함께 등장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롤링 주빌리 홈페이지를 보면 빚 탕감에 쓸 돈으로 다시 701,317달러를 모았다고 합니다.

생활비 때문에 빚이 늘어나는 저소득층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생활비 때문에 신용카드나 빚을 쓰고 소득이 적어 그 빚을 갚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습니다. 저소득층은 소득 대비 과도한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 2014년 2월 보고서(경제주평: 가계부채의 특징과 시사점)에 따르면, 2012~2013년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대출잔액 비율은 276%에서 414.8%로 급상승했습니다. 부채가 증가하는 요인에 대해 저소득층은 절반 이상인 52.1%가 생활비 때문이라고 응답했습니다.

반면 고소득층의 거의 절반(48.7%)은 부동산 구입과 사업자금 마련 등 투자 때문에 부채가 는다고 합니다. 이 연구원은 저소득층 20%가 채무 상환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분석했습니다.

소득계층별 미래 부채 증가 요인
저소득층은 생활비 때문에, 고소득층은 부동산 구입 때문에 부채가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출처: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

청년기에 진 빚으로 10년 이상 쫓기는 젊은 세대

더 가슴이 먹먹한 건, 청년층의 장기연체입니다. 금융소비자네트워크가 불태운 부실채권 중 77%의 채무자 나이대가 30~40대였습니다. 채권 중 81%는 10년 이상 연체된 장기채권이었고, 평균 금액은 4백만 원이었습니다. 채무자들이 20~30대 청년기에 진 몇백만 원 빚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추심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각된 부실채권의 주인 중엔 1983년생도 있었습니다. 20세에 진 신용카드 빚 1백만 원을 10년이 넘도록 갚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동안 그는 무수한 채권 추심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1만 3천 원 기부로 1천만 원 빚을 없애주자

금융소비자네트워크의 빚 탕감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1만 3천 원을 기부하면 1천만 원, 3만 9천 원을 기부하면 3천만 원 상당의 빚을 없앨 수 있습니다. 희망살림은 3천만 원을 모으면 3,500~4,000명의 장기채무자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부실채권 소각 퍼포먼스
한국의 빚 탕감 운동에도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가면. 가톨릭교도였던 가이는 종교를 탄압하는 제임스 1세와 대신들에 대한 화약 폭발 음모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했지요. ‘주빌리’라는 기독교의 전통을 되살리고 있는 상징이 종교 탄압에 저항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사진 출처: 빚탕감 프로젝트! 후원 펀딩)

이 기사를 쓰자, 일부 독자들이 ‘빚 탕감을 해주면 누가 빚을 갚으려 하겠느냐’,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면 어찌하느냐’는 댓글을 붙이셨습니다. 누구나 떠올릴 만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장점은 부실채권 거래시장의 특성상 도덕적 해이가 원천 봉쇄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대신 빚 갚아주면 도덕적 해이가 생긴다는 건 오해

우선, 빌린 돈 즉 채권이 부실채권이 되려면 이미 10년 이상 채권 추심에서 시달려야 합니다. 돈이 있는데도 탕감받자고 10년 이상 채권 추심에 시달릴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정말 대단한 자학적 인내심의 보유자일 것입니다.

또, 익명의 채권이 무더기로 거래되는 부실채권시장의 원리상, 주인을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채권을 구매한 후에라야 그 채권의 채무자 이름과 주소 등 인적 사항을 할 수 있습니다. 없앨 채권의 주인이 누구인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자신의 부실채권을 자신이 구매해서 소각시키는 건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지경으로 낮죠. 만약 자기 것 없애려 빚 탕감 운동에 기부를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다른 수많은 사람을 자신보다 먼저 구제하게 될 겁니다.

​모금처인 희망살림 카페에도 비슷한 문의가 많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사이트에 이런 공지를 띄우셨네요.

[box type=”note”]
1. [빚탕감 프로젝트 후원펀딩]은 일반 시민들이 채무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점을 이해하고 십시일반 후원 모금을 통해 채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취지의 프로젝트로 채무가 있는 특정인이 후원을 한다고 해서 해당 본인의 채무를 탕감받을 수 있는 형태의 프로젝트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부실채권 시장에서 특정인의 채무만을 선택적으로 매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본 프로젝트를 통해서 매입할 채권 또한 저희 희망살림에서 매입한 이후에야 누구의 채무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채무 관련 상담은 에듀머니/희망살림(070-8785-6127) 이외에도 특성화 된 분야 상담이 가능한 기관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해당 기관으로 전화를 하시면 좀 더 자세한 상담이 가능합니다.

서울 거주 시민_ 서울시 복지재단 02-1644-0120
법 관련 내용_법률구조공단 국번없이 132, 02)532-0132
파산/면책 관련 내용_민생연대 02)867-8020[/box]

부채 탕감 운동은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참여하기 클릭.

[box type=”info” head=”Tip! 가계부채 1,220조 시대 금융소비자 행동수칙”]

채권엔 소멸시효가 있습니다. 일반채권은 10년, 이자는 3년, 음식점 외상은 1년, 그리고 금융채권은 5년입니다. 그런데 채무자들은 시효가 지났는지 알기 어려워요. 소멸시효 계산법이 복잡해서 채권자들만 알 수 있거든요.

경제교육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김준하 팀장의 말입니다.

그는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에 대해선 한 푼도 갚을 의무가 없지만, 만약 자신의 채권이 소멸된 지 모르고 1만 원이라도 갚으면 그때부터 채권은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채권자는 소멸채권 여부를 알려주지 않은 채 채무자가 ‘1만 원’만 갚게 하거나 담보를 제공하게 만들면 채권의 시효를 쉽게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채무자가 뒤늦게 ‘소멸시효를 알지 못한 채 갚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해도 구제될 길은 없습니다. 이미 시효는 살아났기 때문이지요.

가계부채 1,220조 원 시대, 금융소비자들에게 필요한 행동수칙은 뭘까요.

에듀머니의 제윤경 대표, 박종호 본부장과 김지희 희망살림 사무국장, 백주선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정리해봤습니다.

장기 연체 채무에 대해 추심 받을 때엔 전문가 상담을 요청하라

채권 시효를 채무자가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추심업체에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청한 후 전문가 상담을 신청하는 게 좋다.

상담제공처는 희망살림, 민생연대, 서울시 금융복지상담센터.

신용카드 리볼빙은 대출이다

신용카드로 소비하다 자신의 소득 이상 쓰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때 리볼빙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신용카드 구매가 대출 즉 빚으로 이어진다.

월급 노예 벗어나려면 신용카드부터 없애라

‘월급 노예’란 말이 있다. 월급날 통장잔액 대부분이 신용카드 결제금으로 빠져나가 다음 달 월급날까지 적자로 살아가는 직장인을 뜻한다. 신용카드사의 신용 과잉 공급은 금융소비자들을 일상적인 빚의 노예로 만든다.

현금 흐름 때문에 당장 신용카드에서 벗어나게 어렵다면 6개월 등 목표기간을 정해 차츰 사용규모를 줄여 빠져나오는 방법이 있다. 반드시 매달 사용액을 줄이는 게 포인트.

투자상품, 장기상품 충동 가입은 금물

은행에 예금하러 갔다가 직원 권유로 펀드에 가입하게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건 두부 사러 대형마트에 갔다가 판촉 이벤트에 홀려 스팸 한 박스를 사오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다.

자신이 먹는 식품의 원산지와 성분을 따져보듯 투자상품도 꼼꼼하게 정보를 얻은 후 선택해야 한다.

잘 모르는 상품엔 투자하지 말라

’7년 연속 당기순이익 흑자’를 냈다며 후순위채권을 판매했던 삼화저축은행은 2011년 파산했다. 같은 해 동양증권은 투자 부적격 상태의 모기업 회사채를 판매해 투자자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금융은 의료 분야와 마찬가지로 공급자와 수요자 간 정보 비대칭이 크다. 일반 상품과 달리 A/S도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품은 아예 사지 않아야 한다.

노후상품 가입 전에 국민연금 예상수령액부터 파악하자

국민연금관리공단은 매년 국민연금 가입자들에게 예상연금 수령액을 알리고 있지만 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

노후를 위해 무언가 준비가 필요하다면 기존에 준비되어 있는 부분부터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자. 그래야 금융사의 과도한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100세 만기 보험 상품? 저축이 안전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해서 보험의 만기까지 길어질 필요는 없다. 일반 보험의 보장 금액은 물가 상승에 따라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십년 후엔 건강보험 제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즉 미래에 돈이 많이 드는 질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암이나 심근경색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보험만으로는 미래 의료비를 모두 충당할 수 없다. 건강보험 제도를 함께 개선하면서 저축을 늘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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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 이로운닷넷에도 실렸습니다. 글의 표제와 본문은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따라 일부 수정, 보충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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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댓글

  1. 슬로우뉴스는 구글의 애드센스(자동 문맥광고)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광고들은 확인 후 그때 그때 필터링하는데요,

    이봉석 님의 의견을 수용해 “소비자 대출” 카테고리의 광고를 통으로 차단했습니다. 의견 고맙습니다.

    (참고로 적용에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채무자가 돈 갚을 능력을 잘못 측정하더라도 채무자들은 돈을 잃지 않고 채권자들만 죽도록 빚에 시달리는 현상”
    채무자와 채권자 자리가 바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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