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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메가프로젝트와 쪽방촌 사이, 돌변하는 국가의 두 얼굴. 왜 가난한 이들의 삶은 늘 나중이어야 하는가? (이재임 /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7분)

한국 사회가 ‘K자형 성장’에 빠졌다고 한다. 알파벳 K자가 위 아래로 갈라지듯 경제가 성장해도 모두 함께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삶은 위로 올라가고 어떤 사람의 삶은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성장’이다. 수도권에 집중된 성장을 지역으로 넓히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로봇이나 자율주행차처럼 물리적 환경에서 작동하는 인공지능)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과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3대 메가프로젝트’다. 여기에는 익숙한 믿음이 깔려 있다. 기업이 투자하면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경제가 살아나며 세금도 더 걷힌다는 믿음이다. 경제의 덩치를 키우면 불평등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메가프로젝트가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사업이 성공한 뒤에나 알 수 있을까? 아니다. 공장을 짓기도 전에 이미 누가 무엇을 얻을지 갈리기 시작한다. 누구의 필요를 위해 돈과 전기, 물과 땅을 쓰는지, 개발로 생긴 이익은 어디로 가는지, 그 과정에서 생긴 비용은 누가 감당하는지 따져보자.

청와대.

국가의 두 얼굴, 산업엔 ‘투자’ vs. 사람엔 ‘비용’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 기업의 돈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필요한 전력과 물을 공급하고, 도로와 철도를 놓고, 부지를 마련한다.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고 법과 제도도 손본다.

그런데 반빈곤운동을 하다 보면 사뭇 다른 얼굴의 국가를 만난다. 생계급여를 올리자고 하면 재정 부담부터 걱정한다. 공공임대주택과 공공병원을 늘리자고 하면 비용과 효율성을 따진다. 복지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소득과 재산을 샅샅이 따지고, 가족에게 도움받을 수 있는지 여부도 묻는다. 가족이 있으면 국가의 책임을 뒤로 미루는 ‘부양의무자 기준'(부모나 자녀 등 가족이 있으면 그 가족의 소득·재산까지 따져 수급 자격을 제한하는 제도)까지 두고 있다.

최근의 ‘복지 사각지대’ 대책에서도 이런 모습은 반복된다. 국회는 위기가구를 더 잘 찾아낸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동의 없이 금융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사회보장급여법(사회보장급여의 이용·제공 및 수급자 발굴에 관한 법률)과 국민기초생활 보장법 개정을 추진했다. 가난한 사람을 더 많이 찾아내고, 그들의 소득과 재산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기초생활보장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낮추는 일은 더디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실제 생활이 어려워도 낡은 자동차나 빠듯한 재산기준 때문에 탈락하는 선정기준을 손보고, 보장 수준을 현실화하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빈곤한 사람을 더 많이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사각지대를 없앨 수 없다. 찾아낸 사람이 실제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제도의 문턱 자체를 낮추는 일이 함께 가야 한다.

반대로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땅도, 전기도, 물도, 교통망도 필요하다면 마련한다. 아직 오지 않은 성장에 사회의 자원을 먼저 내어준다. 이 차이를 단순히 ‘기업에는 많이 쓰고 복지에는 적게 쓴다’는 이야기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산업을 키우는 데 쓰는 돈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된다.

그런데 사람이 안전한 집에서 살고, 아프면 치료받고, 충분한 생계비를 보장받는 데 쓰는 돈은 금세 부담스러운 ‘비용’이 된다. 불평등은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마지막 순간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회의 자원을 먼저 쓸 것인지 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기업이 필요하다고 하면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 만큼 움직이는 국가가, 이미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공공임대주택과 공공병원, 대중교통과 돌봄을 늘리자는 요구 앞에서는 왜 그토록 재정과 효율성을 따지는지 묻고 싶다.

게티이미지.

자산과 재난 앞의 불평등

메가프로젝트는 이미 불평등한 사회 위에서 시작된다. 한국에서 자산은 고르게 나뉘어 있지 않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순자산 지니계수는 0.625였다. 지니계수는 자산이 얼마나 고르게 나뉘어 있는지, 혹은 한쪽에 몰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0에 가까울수록 고르게 나뉘어 있고, 1에 가까울수록 한쪽에 몰려 있다. 순자산 상위 10%가 전체 순자산의 46.1%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의 순자산을 모두 합쳐도 9.1%에 그쳤다.

이 상태에서 거대한 개발사업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보자. 국가가 산업단지를 지정한다. 전기와 물을 끌어오고 도로와 철도를 놓는다. 기업과 사람이 몰려오고 새 주거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그러면 주변 땅과 집의 가격도 들썩인다.

그런데 ‘땅값이 오른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같은 소식이 아니다. 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산이 불어나는 ‘호재’지만, 집이 없는 사람은 다시 부동산 중개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감당할 수 있는 월셋집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가가 투자해서 만든 가치가 누구의 것이 되는지 따져야 하는 이유다.

메가프로젝트에는 돈과 땅만 필요한 게 아니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전기와 물이 필요하고, 이를 공급할 발전시설과 송전망도 더 지어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불평등이 생긴다. 개발의 환경적 비용과 기후위기의 피해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폭염이라도 에어컨을 충분히 틀 수 있는 집과 창문 하나 없는 쪽방의 여름은 다르다. 같은 폭우도 반지하에서는 전혀 다른 위험이 된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와 하루 종일 야외에서 장사하는 노점상에게 폭염과 한파는 곧장 생존의 문제가 된다. 이들은 반도체 공장을 몇 개 지을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늘릴지, 발전소와 송전망을 어디에 놓을지 결정한 적이 없다. 그런데 성장의 비용은 재난이라는 모습으로 먼저 찾아온다.

메가프로젝트의 장밋빛 전망이 빗나갔을 때는 어떨까. 지금의 계획은 AI와 반도체 산업이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기대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전망이 틀려도 이미 지은 데이터센터와 발전시설, 송전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용한 땅과 물도 되돌릴 수 없다. 산업의 거품이 꺼져도 그동안 쏟아부은 사회적·생태적 자원의 비용은 남는다.

그래서 메가프로젝트의 불평등은 단순히 ‘기업이 돈을 많이 번다’는 데 있지 않다. 성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과, 그 성장의 위험을 떠안는 사람이 다르다는 데 불평등의 핵심이 있다.

게티이미지.

아직도 낙수를 기다리라고?

지난 9월1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지표는 개선된다는데 내 삶은 왜 바뀌지 않는가, ‘아니, 왜 더 나빠지는가’라는 물음에 더 적극적으로 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회복과 성장만큼 민생 개선에 더 집중”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앞으로 “회복과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되, 성장의 기회와 과실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경제의 성장과 사람들의 삶이 저절로 함께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제시된 답은 여전히 성장과 그 ‘과실’의 분배에 무게가 실려 있다. 문제는 성장한 뒤 무엇을 나눌 것인가에만 있지 않다. 앞서 살펴봤듯 메가프로젝트에서는 성장이 시작되기도 전에 돈과 땅, 전기와 물을 누구에게 먼저 내어줄지가 결정된다.

물론 이런 반론이 남는다. 일단 기업과 지역을 성장시키고, 나중에 그 과실을 잘 나누면 되지 않느냐고. 이른바 ‘낙수효과'(경제 상위 계층이나 대기업이 성장하면 그 혜택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려 저소득층까지 이어진다는 이론)다. 이미 오래 들어온 약속이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한다고 가난한 사람의 삶이 저절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실질 최저임금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복지 기준도 실제 소득의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복지제도의 중요한 선정 기준인 ‘기준 중위소득'(정부가 기초생활보장 등 복지 수급 자격을 정할 때 쓰는, 국민 가구소득의 중간값)과 실제 중위소득의 격차는 2018년 12%에서 2026년 29%까지 벌어졌다.

사회의 부가 커지는 것과 내 몫이 커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성장의 과실을 모두가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을 성장시키고 누구의 필요에 사회의 자원을 먼저 쓸 것인지까지 물어야 한다.

동자동 쪽방 주민들과 2026홈리스주거팀이 동자동쪽방 공공주택사업을 촉구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는 시민이 쓴 1,250통의 편지를 전달하는 기자회견을 지난 5월 6일,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개최했다. 빈곤사회연대.

왜 동자동 쪽방촌 주민의 삶은 늘 ‘나중’이어야 하나

그런데 우리의 삶은 왜 늘 ‘나중’이어야 할까. 그 순서는 누가 정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서울역 인근 동자동 쪽방촌에서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싸움을 떠올리게 된다. 동자동은 서울 한복판의 이른바 ‘금싸라기 땅’이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이곳에 쪽방 주민이 계속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민들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수년째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민간개발을 요구하는 토지·건물 소유주들의 반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비슷한 질문과 끊임없이 마주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굳이 비싼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메가프로젝트와 전혀 다른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두 사안 모두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정된 땅과 자원을, 누구의 필요를 기준으로 먼저 배분할 것인가. 이 질문에는 도시의 좋은 위치와 편리한 교통, 잘 갖춰진 생활 인프라는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도시가 충분히 성장하고 개발이익을 낸 다음, 남는 땅과 예산으로 해결해도 되는 일처럼 밀려난다.

동자동사랑방, 서울역 동자동 쪽방촌 주민공동체.

하지만 쪽방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성장한 뒤 남는 몫을 조금 더 달라는 것이 아니다. 이들도 이미 이 도시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평생을 일하고, 동네를 쓸고, 이웃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렇다면 도시의 미래를 정할 때 이들의 삶과 필요도 처음부터 그 결정 안에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역시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

메가프로젝트에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무엇에 돈을 쓸 것인가. 누구를 위해 도시를 만들 것인가. 누구의 땅과 물과 전력을 사용할 것인가. 좋은 집과 병원, 교통과 돌봄을 어디에 만들 것인가. 성장한 뒤 과실을 어떻게 나눌지만 물어서는 부족하다. 애초에 무엇을 성장시킬 것인가. 누구의 필요를 위해 사회의 자원을 쓸 것인가. 그 자원을 소진하는 데 따른 부담과 피해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정은 누가 할 것인가.

공공임대주택과 충분한 생계비, 공공의료와 돌봄은 경제가 충분히 성장한 뒤 얻는 덤이 아니다. 안전한 집에서 살고, 아프면 치료받고, 필요한 돌봄을 받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삶의 선택지를 빼앗기지 않는 것. 그것 역시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이고 풍요다.

메가프로젝트는 역설적으로 국가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돈을 모으고, 땅을 마련하고, 전기와 물을 끌어오고, 법과 제도까지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힘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더 성장한 다음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필요한 삶에 사회의 힘을 쓰자. 무엇을 만들고 어디에 자원을 쓸지 결정하는 출발점에 우리의 삶과 필요와 목소리를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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