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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김영삼을 IMF의 원흉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만든 사건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자고 나면 길거리에 나앉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수많은 기업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발생했다. 말 그대로 범국가 차원의 환란이었다.

특히 요즘 한창 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세대인 30대에서 40대 초반에 걸친 세대는 IMF로 인해 암울한 학창시절을 보낸 기억이 무척 많이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김영삼은 어떤 존재일까? 묻고 따지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대차게 나라를 말아먹은 무능한 대통령에 불과하다.

그런 김영삼을 보고 ‘민주화의 거목’이네, ‘반독재 투쟁가’네 하는 소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짐작이 간다. 그들에게는 이 사회 전체를 말아먹은 주제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민주화 운동이 어쩌고 독재가 어쩌고 하는 나사빠진 꼰대들의 헛소리로 다가올 뿐이다.

나 또한 세상이 변했음을 인식하고 있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전 대통령 김영삼의 사망은 그저 흘러간 역사 속의 인물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려주는 그저 그런 뉴스에 불과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영삼

유신 시대의 김영삼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투쟁력을 보유한 파괴적인 정치인이었다. 장택상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김영삼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 거제군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당시 만 26세. 이 최연소 당선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무리하게 사사오입 개헌을 하면서 정권연장을 기도하자 김영삼은 당당하게 10여 명의 동료의원 무리를 이끌고 자유당을 박차고 나와 민주당에 입당한다. 사실 이때의 분위기는 노무현의 나홀로 3당합당 반대를 외치는 기개 넘치는 모습의 원조격이다. 그는 4대 국회의원 선거 낙방 후 조병옥의 대선을 지원한다.

그리고 4·19 직후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바로 뒤이어 터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반정부 투쟁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박정희의 군정 연장 발표에 항의하면서 지속적인 군정(혹은 민주공화당) 참여 요구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군정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 수감되기도 한다.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개헌 문제로 투쟁하던 중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김영삼이 괴한 두세 명에게 습격을 당하게 된다. 차의 앞을 가로막고 차를 세운 뒤 김영삼이 타고 있던 쪽 문을 열려고 시도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 실패하자 뭔가를 꺼내 차창에 던진다. 다행히 급출발해서 현장을 탈출했지만, 뒤에 보니 차의 표면을 부식시키고 아스팔트를 부식시킬 정도로 강한 질산액[footnote]초산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아세트산(초산)하고는 다른 질산이었던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footnote]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이게 그 유명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다. 만약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면, 앞으로 얘기할 김영삼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향신문 1969년 6월 21일 자 기사 "김영삼 의원 차에 초산 뿌려"
경향신문 1969년 6월 21일 자 기사 “김영삼 의원 차에 초산 뿌려”

당시에는 이랬다.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주목받는 현역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백색테러의 대상이 되는 그런 시대가 바로 박정희 정권의 시대였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테러사건에 대해 즉각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사사건건 박정희의 행보를 걸고 넘어지던 김영삼 입장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사주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김영삼의 위력은 그런 살벌한 테러를 당한 바로 다음 날 발휘가 된다. 바로 국회에 가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민족반역자이고, 이 사건은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라는 내용의 연설을 한다.

김영삼의 위력은 1971년에 더욱 빛을 발한다. 김대중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경선에 참여하여 1차 경선에서 최다득표를 하지만 과반 달성에 실패해서 결선투표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김대중에게 밀리게 된다. 1차에서 3등을 한 이철승이 김대중에게 붙은 것.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뒤로 물러나면서 삐지기[footnote]빠지기의 오타가 아니다.[/footnote] 마련이지만 김영삼은 오히려 더욱 활발한 활동으로 김대중의 선거를 돕게 된다.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매일경제 1972년 11월 18일 자 1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매일경제 1972년 11월 18일 자 1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부정선거로 김대중은 근소한 차이로 패배. 당연히 다음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기수로 나서게 될 예정이었으나 박정희는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는 유신체제를 선포해 버린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해외로 망명하게 되지만 김영삼은 오히려 국내 투쟁을 선도하게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규탄한 사람도 김영삼 본인이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유신 통치의 압박으로 야당 내 변절자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고 이들은 이철승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보통 이들을 “사쿠라”라고 부르고 김영삼은 강경파의 리더로 자리 잡게 된다. 요즘은 잘 안 쓰이는 말이지만 “사쿠라”의 원조는 이때의 이철승 일당을 의미한다.

김영삼은 한때 박정희와 단독 회담을 통해 화해의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온건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려다가 박정희의 긴급조치로 구속당하는 ‘뒤통수 맞기’도 시전하게 된다. 이후 급선회하며 초강경 일변도의 투쟁을 지속하게 된다. 박정희의 배신자로서의 면모도 여러 차례 확인시켜 준 사람이 김영삼이며 배신당하고도 바보같이 허허거리지 않겠다는 강렬한 면모를 보여준 사람도 바로 김영삼이다.

김영삼이 보여준 유신 막바지 승부는 바로 “YH 사건”. 생존권 보장을 위해 투쟁하던 YH 노조원들에게 신민당 당사를 통째로 내어주고 이를 진압하러 온 경찰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로 인해 김영삼은 가택에 연금된다. 이미 박정희 정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김영삼은 이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가 빌미가 되어 국회에서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제명당한다.

[box type=”info”]김영삼의 강한 투쟁력을 보여주는 당시 기사를 하나 소개한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11일 새벽 경찰의 마포 신민당사 난입사건을 “눈물도 피도 흐르지 않는 단말마의 최후의 발악”이라면서 “이 지구 위의 역사상 어느 정권도 하지 않았던 천인공노할 사실”이라고 주장. 김 총재는 이날 새벽 3시 반 경찰차에 의해 상도동 자택으로 옮겨진 뒤 오전 8시에 특별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20세기에 이 같은 폭도정치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않는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말하고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폭력”이라면서 “이번 사태로 아침을 알리는 새벽이 분명히 다가온 것을 믿자”고 강조.

김 총재는 내주 중으로 예정된 여야중진회담 개최 여부를 묻자 “회담은 무슨 회담이냐”고 반문. 그는 YH무역회사 여공 1명이 동맥을 끊고 자살한 데 대해 “정치 차원을 넘어 살인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저들이 결국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면서 연행해 간 여공들의 취업조건을 수락하여 온전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 김 총재는 회견이 끝난 뒤 경찰에 맞아 얼굴 형태가 이지러질 정도의 중상을 입은 박권흠 대변인이 입원하고 있는 메디칼센터로 가 위로.

– 동아일보 – “민주주의 존재치 않는다는 걸 분명히 보여준 것” (1979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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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명을 두고 차지철은 강경한 태도를, 김재규는 그래도 현직 야당총재를 제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즉, 야당총재까지 권력을 동원해 의원직 제명을 해 버릴 정도로 막 나가는 권력에 대한 김재규의 회의감을 불러일으켰으리라는 유추를 충분히 가능케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후, 신민당은 국회의원 전원의 의원직 사퇴라는 기염을 토하게 되고,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며 결국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을 이끌어낸다.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첨부하자면, 박정희의 암살은 사실상 김영삼의 투쟁이 이끌어낸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김영삼은 이렇게 박정희 군사독재, 유신정권과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는 비록 박정희의 암살로 결판나게 되었지만, 김영삼의 반독재 투쟁의 성공이었다고 평가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장준하와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며, 김영삼에게 사상 최강의 반독재 투쟁가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결론이다. 닭의 ㅁ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 그리고 “이 암흑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박정희 정권은 머지않아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쓰러질 것이다.”라는 김영삼의 주장[footnote]YH 사건 당시 김영삼의 연설 중에 한 말이다.[/footnote]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적어도 내게 남겨진 유신 시대의 김영삼의 모습은 감히 그 어떤 정치인도 넘지 못할 진정한 투사의 모습이었으며 후일 하나회 척결, 금융 실명제 등의 정책적 업적과, 3당합당이나 IMF 초래 등의 과오, 아들 관리 실패, 그리고 사상 최고로 멍청한 대통령이라는 유머러스한 비난 등을 모두 섞어 평가해 봐도 절대 빛이 바래지 않을만한 멋진 정치인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시대는 그에게 분명히 큰 빚을 졌다.

박근혜

그러나 세월은 흘러갔고, 세상은 또다시 변화하고 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미래지향적인 변화가 아니라 퇴행이라는 점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김영삼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 물리친 대상인 그 군부독재자의 딸과 그녀를 둘러싼 무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은 2015년 이후의 한국사회의 미래를 1972년 유신의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국민을 IS라는 세계사적 테러집단에 비교하질 않나, 조선일보까지 나서서 지나치게 자주 국회를 비난한다고 우려를 표할 정도로 유권자들의 대리인 국회를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하하질 않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일삼고 있는 박근혜 정권은 이미 40년의 세월을 뒤로 건너 뛰어 유신 시절의 박정희의 망령을 오늘날 이 땅에 다시 불러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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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저널 알라스테어 게일 서울 지국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놀라워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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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못한 것이, 유신 시절의 박정희는 수많은 우리 선배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초라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급속도로 성장시키는 역할이라도 했지만, 박근혜는 그나마도 못하고 있다. 선대가 일구었던 경제 성장의 과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전방위적으로 경제지표들을 퇴행하게 하는 중이다. 정치적으로 독재정권으로 퇴행하고 있으면 그나마 경제라도 발전시킬 일이지, 경제까지 같이 퇴행하게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 와중에 모든 언론은 장악되어 저항의 메시지는 사회적으로 퍼져나가지도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확보했던 집회 및 결사의 자유는 물대포와 복면금지법이라는 기괴한 신무기 앞에 힘을 못 쓰고 주저앉는 중이다. 교육은 교육대로, 국방은 국방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거의 모든 사회 각 분야들에서 동시다발적인 퇴행 현상이 관측되고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국격은 바닥에 떨어져 국제적인 놀림감이 되어가는 중이다. 분노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먼저 느껴지는 이 정권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불의를 보고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대들어 싸우던 젊은 김영삼, 40대 기수 김영삼의 ‘불굴의 기백’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기백에는 자신이 싸워 쓰러트린 전직 독재자의 딸 박근혜에게 비록 천박하지만 통쾌한 언어인 “칠푼이”라는 호칭을 주저하지 않고 선사하는 호방함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호방함이 아니라 노망일 수도 있겠지만 뭐, 별로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역사의 평가

모든 사람에게는 공과 과오가 동시에 존재한다. 역사는 언제나 양팔 저울로 평가를 해야 한다. 김영삼 역시 그 저울 위에 올릴 양쪽의 추가 모두 존재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3당합당은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치욕스러운 과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동서로 양분해 버린 변절의 기억을 지울 방법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학생과 시민들의 피로 쟁취한 87년의 역사적 전기를 “양 김의 분열”이라는, 권력욕에 함몰된 치졸한 옹고집으로 무산시켜 버린 죄는 자뭇 크다. 양 김의 분열이 없었더라면 3당합당이라는 희대의 변절극이 발생할 지형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양김의 분열은 훨씬 더 무거운 추로 작용할 것이다.

거기에 서두에 언급한 고통스러운 IMF의 추억은 김영삼의 공과가 올라갈 저울을 한쪽으로 확 기울게 만들만한 사건임은 틀림없다. 그 결과 김영삼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나 또한 그에게 결코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존경 어린 호칭을 붙여주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싸움꾼이었고 투쟁가였다. 서슬 퍼런 폭력정권의 테러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당사를 진압하러 찾아온 경찰서장의 뺨을 후려갈기며 호통을 칠 배포가 있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를 향해, 너는 죽어도 곱게 못 죽을 거라고 악담을 날릴 악과 깡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YH 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는 김영삼의 모습 (©보도사진연감)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불러온 YH 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끌려 나오는 김영삼의 모습 (©보도사진연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오는 시대”는 어느덧 흘러가 역사가 되어 버렸고, 이제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새벽이 오는 시대”가 되어 버렸는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치인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 수가 있겠는가. 몰상식과 비논리로 무장한 독재자의 딸 앞에서 “당신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정치인 김영삼에 대한 역사의 평가, 그 무게를 달아줄 저울은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반독재 투쟁가 김영삼의 기백”이 아닐까?

모든 언론이 김영삼의 장례를 맞이하여 그를 겨우 “민주화의 거목”이라는 말랑말랑한 호칭으로 칭송하고 있는 이때 굳이 되풀이해서 그를 박정희 정권을 쓰러트린 “반독재 투쟁가 김영삼”이라는 거친 호칭으로 불러주고 싶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당신 아버지를 쓰러트린 김영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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