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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광주에서는

2026년 5월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새기겠다고 약속했다. 1980년 그날 광주에 들어온 탱크와 총칼이 무엇이었는지, 그 앞에서 쓰러진 시민들이 누구였는지를 이제 국가가 헌법의 자리에서 기억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헌법 전문은 한 나라가 자신을 어떤 역사 위에 세웠는지를 밝히는 자리다. 거기에 5·18을 새긴다는 것은, 그 학살을 더는 한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뿌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유족들이 오래 기다려온 말이었다.

바로 그날, 한 기업은 그 5·18을 농담으로 만들었다. 스타벅스를 운영하는 SCK컴퍼니가 ‘탱크데이’라는 이름을 내건 텀블러 행사를 벌인 것이다. 광주에 탱크가 들어온 그날에, 하필 그 탱크를 판촉 문구로 가져다 썼다. 우리에게 익숙한 초록색 인어 간판 뒤에 있는 이 회사는 미국 본사가 지분을 모두 거둬간 뒤 신세계그룹 계열사가 된 법인이다. 같은 날 한쪽에서는 그 탱크의 의미를 헌법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한 잔의 커피를 파는 농담으로 끌어내렸다. 한 사회가 같은 시간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지는 장면이었다.

이것이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일이었다면, 어느 부서의 어이없는 판단 착오로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정황은 그렇지 않았다. 올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그날 이 회사는 ‘미니 탱크 텀블러’를 내놓았다. 당시에는 탱크와 세월호를 잇는 고리가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갔지만, 5·18 탱크데이가 터지고 나서야 그 행사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거슬러 올라가면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던 날에 맞춰 배를 침몰시키는 신화 속 존재의 이름을 딴 머그를 내놓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우연이라 하기엔 같은 날짜에 같은 종류의 일이 너무 여러 번 겹쳤다. 대통령이 이 행태를 두고 “상습적”, “패륜”이라는 강한 말을 쓴 것도 그래서였다. 이것이 어디서 비롯된 일인지는 뒤에서 따로 짚겠다.

조롱은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다.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봉하마을에서다. 17주기 추도식이 열린 그날, 일간베스트를 상징하는 손가락 표시를 한 무리가 추모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조롱하듯 사진을 찍었다고 노무현재단 측이 밝혔다.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 바로 그 추모를 비웃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이 일들을 한 회사의 마케팅 사고나 철없는 몇몇의 객기로 치부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나는 이 며칠이 한국 사회의 오래된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본다. 누가 무엇을 조롱했고, 그 조롱이 어디서 흘러나왔으며, 어째서 조롱한 쪽이 도리어 피해자를 자처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혐오에 무엇으로 맞설 것인가.

마침 대통령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꺼내며 시민들에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것은 사이트를 닫겠다는 단정이 아니라 함께 답을 찾아보자는 물음이었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답하는 한 연구자의 응답이다. 위의 질문들을 차례로 따라가며, 끝에서 나의 답을 내놓으려 한다.

조롱은 무엇을 겨누는가

먼저 이 조롱이 정확히 무엇을 겨누는지부터 봐야 한다. 표적이 된 이름들을 흩어진 채로 두면 그저 잇따른 해프닝으로 보이지만,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분명한 공통점이 드러난다.

5·18, 박종철, 노무현. 이 세 이름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모두 국가가 한 시민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기억이라는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는 국가가 시민을 향해 군대와 탱크를 보냈다. 1987년에는 스물한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죽었고, 권력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그 죽음을 덮으려 했다. 2009년에는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의 압박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셋 모두, 국가의 힘이 한 사람의 생명 앞에서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의 기록이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죽음들을 함께 슬퍼하고 반성해야 할 일로 세워왔다. 광주에 국립묘지를 만들고, 박종철의 죽음을 6월 항쟁의 불씨로 기록하고, 봉하에 노무현의 묘역을 세웠다.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이 죽음들 앞에서는 함께 고개를 숙이자는 것. 그것이 민주화 이후 우리가 어렵게 합의해온 최소한의 윤리였다.

조롱은 바로 그 약속을 겨눈다. 슬픔과 반성의 대상이던 죽음을 끌어내려 한낱 농담거리로 만든다.

이것이 왜 단순한 무례나 짓궂은 농담과 다른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비웃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우리가 함께 슬퍼할 가치가 있는 존재의 명단에서 지워버리는 일이다. 어떤 죽음은 애도받을 자격이 있고 어떤 죽음은 비웃어도 좋다고, 조롱하는 사람이 그 경계를 제멋대로 다시 긋는 것이다. 농담은 함께 웃기 위한 것이지만, 이 조롱은 누군가를 함께 웃을 수 없는 자리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이 조롱은 죽은 이만을 겨누지 않는다. 그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곧 광주의 유족과 시민, 박종철의 동료들, 노무현을 따랐던 이들을 함께 겨눈다. 추도식 현장까지 찾아가 비웃는 사진을 찍는 행위가 단적으로 그렇다. 죽은 이는 더 모욕당할 수 없지만, 그를 추모하러 모인 산 사람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모욕당한다.

그래서 이 조롱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저속한 농담 한 번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가 누구의 고통을 기억하기로 했는가라는 합의 자체를 흔든다. 뒤에서 보겠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별것 아닌 일로, 예민한 사람들의 과민반응으로 축소하려 들 것이다. 그 축소가 왜 틀렸는지를 여기서 먼저 분명히 해둔다.

인터넷 한구석의 일이 아니다

흔히 일베식 조롱이라고 하면 인터넷 한구석의 익명 청년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것은 그 조롱이 인터넷 바깥으로, 그것도 사회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다는 사실이다.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먼저 봉하마을이다. 익명의 게시판에 머물던 조롱이 추도식 현장까지 직접 찾아왔다. 더는 숨어서 하지 않는다. 묘역 앞에서 손가락 표시를 하고 사진을 찍어 다시 게시판에 올린다. 조롱의 무대가 화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것은 스타벅스다. 앞서 보았듯 이 행사는 직원 한 명의 실수로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신호들이 그렇다. 행사 이름은 ‘탱크데이’였고, 광고 문구는 “책상에 탁”이었다. 탱크는 광주에 들어온 계엄군의 장갑차이자 전두환의 별명이고, “책상에 탁”은 박종철을 고문으로 죽여 놓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둘러댄 그 악명 높은 거짓말이다. 5·18과 박종철이라는 두 개의 국가폭력이 텀블러 한 장의 판촉 포스터에 나란히 박혔다. 한 5·18 연구자는 이를 두고 회사 안의 누군가가 철저히 준비한 상징 행위, 곧 자기들끼리 알아보고 비웃기 위한 신호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물론 우연이라 할 수도 있다. “탱크는 그냥 큰 용기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라는 항변이 실제로 나왔다. 물장사하는 집에서 탱크라고 하면 액체 담는 용기를 뜻하지, 그걸 왜 문제 삼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두 가지를 가린다. 첫째, 하필 그날이 5월 18일이었다. 큰 용기를 알리는 행사를 굳이 광주에 탱크가 들어온 그 날짜에 맞춰 열 이유는 없다. 둘째, ‘탱크’ 하나라면 우연이라 우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포스터에 박종철을 가리키는 “책상에 탁”이 함께 있었다. 서로 무관한 두 개의 국가폭력 코드가 한 장에 동시에 들어갈 확률이 우연일 수는 없다. 하나는 미끄러짐일지 몰라도, 둘이 겹치면 의도다. 액체 용기라는 해명은 이 두 번째 코드 앞에서 무너진다.

이런 문구들이 기획과 디자인, 법무와 홍보를 거치는 동안 아무도 걸러내지 못했거나, 걸러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18과 박종철을 농담으로 만드는 감각이, 이미 그 회사의 일상 언어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의 문화를 통과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는 허공에서 생기지 않는다. 스타벅스를 운영하는 SCK컴퍼니는 신세계그룹의 계열사이고, 그 그룹을 이끄는 정용진 회장이 어떤 신호를 보내온 사람인지를 보면 이 문화의 내력이 드러난다. 그는 2022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멸공”을 거듭 올렸다. 그 표현이 폭력 선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게시물이 삭제될 정도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가 이끄는 이마트는 노조 설립을 막으려 직원을 사찰한 혐의로 그가 피의자로 조사받은 적이 있고, 전태일 평전을 읽는 직원을 문제 삼고 직원의 애인이 민주노총에 다닌다는 것까지 보고하게 했다는 전력이 드러나기도 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적대하고, 반공의 언어를 진영의 깃발로 삼아온 오너. 그가 던지는 신호가 무엇인지 그 조직이 모를 리 없다. 5·18과 박종철을 비웃는 코드가 회사의 마케팅을 통과한 것은, 이 모든 것과 따로 떨어진 우연이 아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키득거리던 혐오의 코드가, 오너의 인식과 기업문화를 자양분 삼아 한 재벌 계열사의 정식 마케팅이 되어 전국 매장 앞에 내걸린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커지자 회사가 내놓은 해명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정용진 회장이 사과하고 대표와 임원이 물러난 뒤, 안에서는 이것이 일부 실무진의 실수였고 그것을 윗선이 거르지 못했을 뿐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누가 기획했는지를 두고 손가락질이 오갔고, 그 화살은 유독 말단의 한 여성 실무자를 향했다. 책임을 가장 아래로, 가장 약한 자리로 떠미는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다섯 단계에 이르는 결재선을 자부하던 거대 기업에서 5·18과 박종철을 동시에 가리키는 문구가 줄줄이 통과되었다면, 그것은 한 실무자의 실수로 설명될 일이 아니다. 거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 바로 그 감각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타벅스 한 회사만의 일도, 올해 처음 벌어진 일도 아니다. 7년 전인 2019년,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양말 광고에 “책상을 탁 쳤더니 억 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번 스타벅스가 쓴 바로 그 박종철 조롱 코드다. 더 눈여겨볼 것은 그해에 같은 일이 줄지어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 직전 한 방송사의 뉴스 콘텐츠가,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이, 모두 “탁 치니 억” 식의 표현으로 박종철의 죽음을 가볍게 다루었다가 사과했다. 같은 코드가 한 해에 여러 기업과 방송을 거쳐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7년이 지나 스타벅스가 다시 같은 코드를 꺼냈다. 인터넷 한구석의 은어가 기업의 언어로 새어 나오는 일이, 한 번의 사고가 아니라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흐름이라는 뜻이다.

다만 모든 기업이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다. 무신사의 경우, 사과에 그치지 않고 임직원 역사 교육을 진행했고 대표가 7년 동안 박종철기념사업회 회원으로 조용히 활동을 이어왔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것과 그 뒤에 어떻게 책임지는가는 다른 문제다. 책임을 말단에 떠넘기는 길과, 잘못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오래 책임지는 길. 같은 조롱 앞에서도 갈라지는 이 두 갈래가, 결국 한 기업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세 번째, 제1야당이다. 스타벅스가 비판받자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줄지어 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향한 곳은 5·18을 조롱한 기업이 아니었다. 그 조롱을 문제 삼는 쪽이었다.

김민전 의원은 “물장사하는 집에서 ‘탱크’라고 하면 당연히 액체 담는 용기를 의미하지, 전국에 물탱크 있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 물탱크 있는 집도 다 수사하나”라며 조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나경원 의원은 정부의 대응을 두고 “이재명 정권의 스타벅스 죽이기, 마녀사냥이 선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거대한 국가 권력이 민간 기업의 마케팅 실수를 빌미로 무자비한 집단 린치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장동혁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정부의 비판을 이재명 대통령이 주도하는 “국가폭력”이라고 규정하며 “5·18이 국민을 겁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수정 당협위원장은 거리 유세 현장에서 “스타벅스 가서 인증샷 찍어 올리세요”라며 이용을 독려했다. 한기호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스타벅스는 앞으로 보수,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애국민들의 아지트가 되겠다”고 적었다.

다섯 사람의 말투는 제각각이다. 조롱을 부인하는 사람, 비판을 폭력이라 뒤집는 사람, 적극적으로 불매에 맞불을 놓는 사람. 그러나 향하는 방향은 하나다. 모두 5·18을 조롱한 쪽이 아니라 그 조롱을 문제 삼는 쪽을 겨눈다. 그리고 이것이 비례대표 의원부터 당대표까지, 제1야당의 위아래를 관통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이번 일은 속 좁은 몇몇의 돌출이 아니다. 인터넷 한구석의 익명에 머물지 않고, 대기업의 마케팅과 제1야당의 공식 언어로 버젓이 나왔다. 혐오가 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한가운데서, 누구의 제지도 없이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한다

이제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말을 하나로 묶어 읽어보자. 거기에는 단순한 옹호를 넘어선 기묘한 뒤집기가 있다.

진짜 폭력이 무엇이었는지부터 되짚어야 한다. 1980년 광주에 들어온 것은 진짜 탱크였다. 1987년 박종철을 죽인 것은 진짜 고문이었다.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국가권력의 수사였다. 그 기억을 농담으로 만든 것이 탱크데이였고 봉하의 조롱이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그 조롱을 막으려는 시도를 “집단 린치”라 부르고, 더 나아가 “국가폭력”이라 부른다. 장동혁 대표의 말이 그렇다. 진짜 탱크와 고문은 마케팅 실수로 가벼워지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도리어 폭력으로 둔갑한다. 1980년 광주에 탱크를 들여보낸 것이야말로 국가폭력이었는데, 그 기억을 조롱한 일을 문제 삼는 쪽이 거꾸로 “국가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된다. 누가 때렸고 누가 맞았는지가 통째로 뒤바뀐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자리에 올라선다. 5·18을 조롱한 쪽이 졸지에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고, 그 조롱에 분노한 쪽이 “린치를 가하는 폭력 집단”이 된다. 광주의 진짜 피해자들은 이 뒤집기 속에서 두 번 지워진다. 한 번은 조롱으로, 또 한 번은 그 조롱을 감싸는 “피해자 서사”로.

이준석 의원의 화법이 이 뒤집기의 가장 매끄러운 형태다. 그는 대통령을 향해 “거울 속의 일베”라고 했다. 혐오를 규제하려는 쪽이야말로 일베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웃는 쪽과 그 비웃음을 멈추려는 쪽을 같은 것으로 묶어버리면,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가 사라진다. 한쪽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조롱했고, 다른 쪽은 그 조롱을 멈추려 했다는 차이 말이다.

힘을 가진 쪽이 약한 피해자인 척하는 것. 이것이 이 모든 반응을 관통하는 수법이다. 제1야당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자본이, 자신들이야말로 검열과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약자라고 호소한다.

대통령이 연 물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뒤집기는 왜 이렇게 잘 통할까. “표현의 자유”라는 한마디가 어째서 국가폭력에 대한 조롱마저 감싸는 데 그토록 효과적일까.

5월 24일, 대통령은 이 조롱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발언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사이트를 닫겠다”는 단정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먼저 두 입장이 맞선다는 것부터 인정했다. 이런 조롱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처벌을 포함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함께 있다고. 그러고는 “엄격한 조건 아래” 조롱·혐오 표현에 대한 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 그것을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사이트의 폐쇄와 과징금 같은 조치를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공론화와 실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국무회의에 검토를 지시하겠다는 말과 함께, 시민들을 향해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곧 대통령이 꺼낸 것은 폐쇄 명령이 아니라 하나의 물음이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정면으로 손대지 못한 문제, 곧 혐오를 어디까지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공론의 한복판으로 끌어낸 것이다.

그 문제의식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혐오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 국가폭력의 기억을 조롱하는 일을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옳다.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강행하지 않고 공론에 부친 신중함도 옳다. 다만 그 공론이 어디로 흐르느냐가 문제다. 만약 논의가 “사이트를 닫느냐 마느냐”라는 좁은 물음에 갇히면, 그 순간 앞서 본 그 뒤집기의 덫에 걸려든다. 폐쇄라는 카드가 식탁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비웃던 자들은 자신을 탄압받는 쪽으로 포장할 빌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대통령이 연 이 공론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사이트를 닫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이 뒤집힌 세계를 바로잡을 더 나은 길은 무엇인가. 나는 그 길이 있다고 본다.

왜 폐쇄와 처벌은 빗나가는가

사실 혐오와 조롱을 법으로 직접 처벌하려는 시도는 이미 한 번 있었다. 2021년 만들어진 5·18 역사왜곡 처벌법이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누른다는 비판에 밀려, 처벌 대상을 “허위사실 유포”로 좁혔다. 그러자 봉하의 조롱이나 탱크데이처럼 참인지 거짓인지 따지기 애매한 비웃음은 법망을 빠져나갔다. 법이 시행된 뒤로 고발은 여러 건 있었지만 실제 처벌로 이어진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처벌 범위를 넓히면 될까. 여기서 진짜 어려움이 나온다. 조롱, 비방, 깎아내림 같은 말을 형사처벌의 잣대로 삼는 일은 법으로 다루기가 대단히 까다롭다. 그물코를 넓히면 적용이 모호해져 엉뚱한 사람까지 걸리거나 권력이 입맛대로 휘두를 위험이 커지고, 표적이 된 사람들은 표현을 슬쩍 비틀어 또 빠져나간다. 좁히면 무력하고 넓히면 위험하다. 이 딜레마가 혐오 규제의 오래된 난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조롱과 비방을 통째로 처벌하던 법의 기억이 있다.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는 헌법을 부정하거나 비방하는 말 자체를 가두었다. 그런 법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절이 법으로 다스려지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목적이 옳으면 그런 형식도 정당해지는가. 혐오가 밉다고 해서, 무엇이 혐오인지를 국가가 정하고 그것을 말한 입을 처벌하는 길로 가도 좋은가.

사이트 폐쇄도 마찬가지다. 일베 한 곳을 닫아도 그런 식의 조롱은 이미 다른 커뮤니티와 오프라인으로 번져 있다. 한 곳을 표적 삼는 것 자체가 빗나간 조준이다. 실제로 폐쇄가 거론되자 정작 그 커뮤니티 안에서 “차라리 폐쇄해서 여기저기 퍼뜨리는 게 낫다”, “반발심만 자극해 젊은 남성이 더 우경화될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게다가 국가가 특정 사이트를 지목해 닫는 순간, 앞서 본 그 뒤집기에 더없이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다. “거봐라, 결국 입막음 아니냐”는 항변이 힘을 얻고, 비웃던 자들은 도리어 탄압받는 순교자가 된다.

혐오는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다

폐쇄도 처벌도 빗나가는 더 깊은 까닭이 있다. 혐오는 틀린 정보가 아니다. 틀린 정보라면 바로잡으면 그만이다. 잘못된 통계를 보여주고 사실을 정정하면 생각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혐오의 바탕에 있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분노와 억울함과 피해의식이라는 감정이다. 감정은 사실관계를 정정한다고 가라앉지 않는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박종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무리 정확히 설명해도, 그것을 비웃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감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또 가르치려 든다”는 반발만 키우기도 한다.

나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극우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과 억울함과 분노 같은 감정을 정치적 자원으로 삼아, 누구를 공격하고 누구를 지워야 하는지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라고. 핵심은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바로잡는 팩트체크도, 사이트를 닫는 폐쇄도 그 감정의 뿌리에는 닿지 못한다.

게다가 이 감정은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그것은 돈이 된다. 온라인 플랫폼은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를 위로 올린다. 그런데 차분한 설명보다 분노를 자극하는 조롱이 더 많은 클릭을 부르고, 더 많은 클릭은 더 많은 광고 수익이 된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시 더 자극적인 혐오 콘텐츠로 돌아간다. 분노가 조회수가 되고, 조회수가 수익이 되고, 수익이 다시 분노를 키우는 회로다. 이 안에서 혐오는 한 사람의 비뚤어진 마음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팔리고 퍼지는 상품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회로가 누군가의 음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많은 후원금을 노리는 유튜버, 광고가 잘 붙는 콘텐츠를 찾는 광고주, 지지자를 결집하려는 정치 세력, 체류 시간을 늘리려는 플랫폼 기업. 이들은 저마다 다른 이익을 좇지만, 그 이익들이 향하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하나로 모인다. 더 자극적인 분노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뒤에서 조종하지 않아도 혐오는 저절로 증폭된다. 바로 이것이 사이트 하나를 닫는다고 회로가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음모라면 주모자를 처벌하면 끝나지만, 이렇게 여러 이익이 한 방향으로 맞물린 구조에서는 한 채널을 막아도 곧 다른 채널이 그 자리를 채운다. 혐오는 특정한 한 곳이 아니라 이 구조 전체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감정이 인터넷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구석의 일이다. 문제는 정치가 거기에 올라타는 순간이다. 그때 혐오는 사회 전체로 번진다. 혐오가 퍼진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봐도, 가장 위험했던 것은 정치가 혐오에 가담한 순간이었다. 앞서 본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반응이 바로 그 가담이다. 인터넷의 조롱을 정당의 언어로, 선거의 구호로 끌어올리는 것. 거꾸로 말하면, 정치가 혐오에 올라타는 것만 막아도 그 불길은 한결 잦아든다.

한국은 지금 혐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대안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봐야 한다. 놀랍게도 한국은 혐오를 제대로 세지도, 다루지도 못하고 있다.

법학 연구자 장진영의 분석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한국에 혐오범죄를 규정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법이 없으니 경찰 통계에도 검찰 자료에도 ‘혐오범죄’라는 항목이 없다. 그래서 그는 법원 판결문 열람 서비스에서 ‘혐오’와 ‘증오’를 키워드로 검색해, 법원이 범행 동기를 혐오로 인정한 사건들을 직접 추려내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2013년부터 2021년까지 9년치를 훑어 모은 혐오범죄 사건은 스무 건 남짓에 불과했다. 혐오가 이토록 들끓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세는 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스무 건 안에서도 드러나는 것이 있다. 피해 대상으로 보면 여성을 겨냥한 사건이 절반을 넘어 가장 많았다. 그런데 가장 흔한 그 여성 대상 범죄가, 처벌은 가장 가벼웠다. 여성을 겨냥한 사건의 평균 벌금이 다른 대상 사건의 8분의 1 수준에 그쳤다. 너무 흔해서 도리어 사법부조차 그것을 특별히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분석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같은 대상에게 같은 내용의 범죄를 저질러도 그 동기가 혐오였을 때와 아닐 때 법원의 처리가 갈린다는 점이었다. 혐오라는 동기는 분명 죄를 무겁게 만드는 요소인데, 그것을 일관되게 담아낼 잣대가 없다.

더 결정적인 것은 양형기준이다. 현재 우리 양형기준에서 ‘혐오’를 가중처벌 사유로 명시한 범죄는 모욕죄 하나뿐이다. 나머지 범죄에는 ‘증오’라는 말만 들어가 있고 ‘혐오’는 빠져 있다. 혐오 동기로 저지른 범죄를 더 무겁게 다룰 근거 자체가 제도 안에 거의 없는 셈이다.

법학자 홍성수의 진단은 이 공백을 더 넓게 짚는다. 한국에는 차별금지법도 없고, 증오범죄를 따로 처벌하는 법도 없으며, 혐오표현을 다루는 단일한 법도 없다. 대신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방송법, 정보통신망법 같은 여러 법에 관련 조항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혐오표현을 형사처벌하는 유럽도 아니고, 표현은 놔두되 차별과 증오범죄를 규제하는 미국도 아닌, 어중간하게 비어 있는 상태다.

요컨대 우리는 혐오를 막을 집을 짓지 않은 채, 비가 샐 때마다 양동이 몇 개를 여기저기 받쳐둔 형국이다. 대통령이 사이트 폐쇄를 꺼낸 것도 이 빈집 앞에서 나온 다급함일 것이다. 그러나 답은 양동이를 하나 더 놓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무엇을 할 것인가

혐오를 ‘표현’으로 보고 직접 처벌하려는 길이 막힌다면, 그것을 ‘차별’이라는 행위로 보고 다루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니라 여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할 때 열린다. 혐오가 사회의 한복판을 통과해 나온 문제라면, 그 한복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각자 응답해야 한다.

가장 먼저, 지금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규제 당국이다. 이들의 처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한쪽에는 혐오를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있고, 다른 쪽에는 사이트 폐쇄가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있다. 2015년 대법원은 사이트를 닫을지 판단할 때 그 사이트의 개설 목적을 비롯한 여러 요소를 따져야 한다고 보았는데, 일베 같은 곳은 게시물의 상당수를 불법 정보로 규정하기도, 혐오 유포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폐쇄를 강행한들 이 기준에 어긋나면 법원에서 취소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정부에서도 일베 폐쇄가 공론에 올랐다가 바로 이 법적 장벽에 막혀 무산된 적이 있다. 폐쇄를 밀어붙이면 위헌 시비에 걸려 실패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시를 외면한 모양이 된다. 당국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발점은 물음을 바꾸는 것이다. 당국이 “사이트를 닫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매달리면 답이 없다. 대통령이 실제로 말한 것은 폐쇄 명령이 아니라 “공론화와 실제 검토”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국이 답해야 할 물음은 “어떻게 닫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 공론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다. 폐쇄가 어렵다는 사실도, “못 한다”는 회피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분석으로 보고되어야 한다. 사이트 하나를 닫아도 조롱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이고, 오히려 그들에게 탄압받는 순교자라는 후광만 입힌다는 것. 이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목적을 더 잘 이루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하는 일이다.

그 다른 길은 당국이 자기 권한 안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로 채워진다. 사이트를 통째로 닫는 대신 개별 혐오 게시물에 대한 심의를 정교하게 다듬는 일, 플랫폼 사업자에게 혐오표현 자율규제 기준을 마련하도록 권고하고 그 이행을 점검하는 일, 방송과 통신 영역의 혐오표현 가이드라인을 정비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같은 더 큰 논의로 나아갈 공론의 장을 어떻게 열 것인지를 설계해 보고하는 일이다. 불가능한 과업을 떠안는 대신, 손에 잡히는 조치부터 쌓고 더 큰 입법으로 가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다음은 법무부와 양형위원회다. 이들에게는 입법을 기다리지 않고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앞서 보았듯 우리 양형기준에서 ‘혐오’를 가중처벌 사유로 명시한 범죄는 모욕죄 하나뿐이고, 나머지 범죄에는 그 말이 빠져 있다. 같은 폭행이라도 상대가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골라 저지른 것이라면 그 죄질은 분명히 다른데, 지금 제도는 그 차이를 거의 담아내지 못한다. 혐오를 동기로 한 범죄를 더 무겁게 다룰 근거를 양형기준에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일은, 국회의 입법을 기다리지 않고도 양형위원회가 손댈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혐오범죄를 따로 세기 시작해야 한다. 지금은 혐오를 규정하는 법이 없어 경찰에도 검찰에도 ‘혐오범죄’라는 항목 자체가 없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일어나는지, 어떤 집단을 향하는지, 어떻게 처벌되는지를 국가가 알지 못한다. 한 연구자가 판결문을 일일이 뒤져 겨우 윤곽을 그려야 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어지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통계의 빈칸이 그동안 무대책의 알리바이가 되어온 것이다. 혐오범죄를 범주로 세우고 집계를 시작하는 것, 그 단순해 보이는 일이 모든 대책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국회다. 여기서 가장 오래 미뤄둔 과제를 마주해야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2007년 처음 발의된 뒤 20년 가까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법이다. 혐오에 분노하는 목소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높아지지만, 정작 그 혐오를 막을 토대가 될 이 법은 번번이 미뤄졌다. 혐오를 처벌하는 법은 표현의 자유와 부딪혀 논란이 크지만, 차별을 금지하는 이 기본법은 그보다 훨씬 단단하고 넓은 토대다. 사이트 폐쇄법 같은 위헌 시비 큰 입법에 매달리기보다, 바로 이 토대부터 놓는 것이 순서에 맞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장 흔한 오해를 풀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차별금지법을 누군가를 잡아 가두는 처벌법으로 여긴다. 반대하는 쪽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공격하는 것도 이 오해를 파고든 것이다. 그러나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혐오 발언을 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법이 아니다. 차별을 당한 사람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법이다. 일자리에서, 학교에서,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그가 속한 집단을 이유로 부당하게 밀려나지 않도록 막고, 밀려난 사람이 도움을 받을 길을 여는 법이다. 처벌이 아니라 보호가 핵심이다. 2007년 이 법을 처음 발의한 것도 다름 아닌 법무부였고, 당시 법무부는 이를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라 소개했다. 처벌의 칼이 아니라 평등의 토대로 구상된 법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만으로도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공격은 설 자리를 잃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더 깊은 힘은 혐오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데 있다. 조롱이 그저 ‘내 의견’일 때는 표현의 자유라고 우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를 실제로 배제하는 행위로 다뤄지는 순간, 그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인터넷 한구석의 비웃음을 일일이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비웃음이 채용과 교육과 기업의 마케팅처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 걸어 나올 때, 거기에는 분명한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혐오를 뿌리째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여기서 ‘포괄적’이라는 말이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이 법이 보편의 토대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어느 한 집단만을 위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5·18을 조롱당한 이들만이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특정 지역 출신까지, 차별받는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덜 보호받지 않는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사안만 겨냥한 법을 하나씩 만드는 방식으로는, 어떤 차별은 다뤄지고 어떤 차별은 끝내 가려진다. 보호받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에 새로운 위계가 생기는 것이다. 어떤 차별은 다루고 어떤 차별은 빼놓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보편이 아니다. 특정 사이트 하나를 지목해 닫는 길과, 모든 차별에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의 법을 세우는 길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칼을 드는 대통령이 아니라 규칙을 세우는 대통령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통령이다. 이 모든 것을 추동할 수 있는 자리에 대통령이 있다.

앞서 보았듯 대통령은 이 문제를 단번에 강행하지 않고 공론에 부쳤다. 그 신중함은 옳은 출발이다. 다만 그 공론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갈린다. 만약 논의가 특정 사이트를 지목해 닫는 쪽으로 기운다면, 그것은 혐오를 줄이기보다 앞서 본 뒤집기에 빌미를 줄 것이다. 그리고 더 멀리 보면 위험한 선례가 된다. 오늘 혐오를 막겠다고 국가에 “무엇이 혐오인가”를 정하는 권한을 강하게 쥐여주면, 그 권한은 정권이 바뀌었을 때 거꾸로 쓰일 수 있다. 어느 날 그 칼끝이 차별에 맞서는 목소리나 정부를 비판하는 입을 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 위험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래서 특정 대상을 찍어 닫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의 규칙이어야 한다.

강한 지도자는 적을 직접 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될 규칙을 세우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연 공론의 진짜 가치는 어떤 사이트를 닫느냐에 있지 않다. 오랫동안 미뤄둔 물음을 사회 한가운데로 끌어낸 데 있다. 그 물음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보편 규범으로 이어갈 때, 대통령이 던진 물음은 한때의 격분으로 흩어지지 않고 제도로 남는다.

결국 움직이는 것은 시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적 응답을 끝내 밀어붙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번 일이 이미 답을 보여주었다.

정용진 회장이 사과하고 대표가 물러난 것은 어떤 법이 강제해서가 아니다. 광주 시민이 등을 돌리고, 소비자가 발길을 끊고, 비판의 목소리가 모인 그 압력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도 법조문이 아니라 유권자의 마음이다. 국민의힘이 스타벅스를 “애국민들의 아지트”라 부르며 거꾸로 결집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 행동이 그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증거다.

혐오에 맞서는 마지막 힘은 결국 시민의 몫이다.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롱에 함께 웃지 않는 것,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비웃음의 대상이 된 사람 곁에 서는 것. 이 평범한 행동들이 모일 때 혐오는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통령의 발언은 발언으로 평가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는 그 발언을 무엇으로 만들어내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사이트를 닫는 손쉬운 길이 아니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어렵지만 단단한 길로 나아갈 때. 그리고 그 길을 시민의 행동이 밀어줄 때. 비로소 우리는 농담이 된 국가폭력의 기억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뒤집힌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이 글은 그 물음에 대한 한 시민이자 연구자의 응답이다. 나의 답은 이렇다. 칼을 빼 들지 말고 규칙을 세우자고. 사이트 하나를 닫는 데 힘을 쏟지 말고, 누구도 차별 앞에 혼자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법을 세우자고. 그것이 광주를, 박종철을, 노무현을 조롱한 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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