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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끝나지 않은 내란, 정치의 재건을 위한 두 과제. 내란 그 후 1년,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조대엽/사단법인 선우재 상임대표) (⌚6분)

내란이라는 야만의 시간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지 1년이 지났다. 내란의 주범들은 법정에 세워졌고, 특검 수사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모든 게 잘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전두환도 노태우도, 이명박과 박근혜도 그렇게 법의 심판을 받고 형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열의 야만은 달랐다. 이미 탄핵 이전부터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지연시키기 위한 책동이나 체포영장 집행에 대한 저항도 놀라운 일이지만, 내란 사건 수사와 재판과정은 피의자와 피고인들의 비협조와 고의적 재판방해 행위로 마치 법기술의 화려한 쇼를 보는 듯했다. 법원의 이해하지 못할 영장 기각도 이어졌다. 

지난 1년은 마치 10년 동안 발생했을 법한 다양한 사건 이슈가 이어졌지만 무엇 하나 개운한 게 없다. 국민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 ‘내란’을 보며 불안하고 초조하다. 최고의 법전문가들이 자행하는 무법국가적 현실은 차라리 경이롭기조차 하다. 이 무법의 아수라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오늘 대한민국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랍고 불안한 정치과정을 맞고 있다. 내란의 밤 이후 1년,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다. 

세 갈래의 시민주의

긴 내란 정국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구를 가리던 올해 초, 새해를 맞으며 나는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을 내란의 카오스에서 반짝이는 세 갈래의 시민주의에서 찾고자 했다. 

첫째는 ‘MZ세대의 시민주의’다. MZ세대는 스펙 쌓기와 경쟁에 길든 ‘신자유주의의 아이들’로 여겨져왔다. 능력에 기반한 공정을 내세우는 이 세대의 가치는 오로지 자기만을 향해 있었고 역사와 공동체와 민주주의는 남의 일이었다. 서사를 잃어버린 세대이기도 했다. 바로 이 세대가 윤석열의 내란에 저항하며 빛나는 응원봉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서사를 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아이들’이 ‘윤석열에 대한 저항집단’으로 바뀐 놀라운 변신이야말로 벅찬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키세스’ 시위대의 모습.

둘째는 ‘군대의 시민주의’다. 우리 군은 정치주의와 파벌주의에 물들었던 어두운 과거를 안고 있다. 민주화 이후 군의 정치적 중립이 당연시 되었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시민의 군대’로 거듭날 계기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 긴박한 내란의 밤에 민주화 이후 우리 군에 아주 제한적이나마 내면화된 시민주의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계엄군의 시민주의가 정치군인의 헌법질서 파괴 행위를 지연시키는 데 일조한 것이다. 제복 입은 시민의 시민주의는 어쩌면 내란이 준 선물일지 모른다. 

국회에 진입한 계엄군. 실시간 생방송으로 온 국민이 지켜봤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수많은 국민이 국회에 ‘맨몸’으로 달려 갔다.

셋째는 ‘노조의 시민주의’다. 우리 노동조합은 오랫동안 계급주의와 정파주의에 갇혀 시민적 연대를 확장하지 못하거나, 조직노동의 제 식구 챙기기로 미조직 노동이나 취약계층과의 연대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의 시대인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의 조직 기반이 크게 위축된 가운데, 노동조합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조직된 시민으로 남았다. 비상계엄의 밤, 노동조합은 국회를 방어하기 위해 가장 민첩한 동원을 시도했고 탄핵과정에서 광장은 언제나 전국의 노동조합으로 채워졌다. 노동조합의 조직된 시민주의가 내란과 탄핵의 밤을 밝혔다. 

공론장의 극단적 분열

내란의 반동과 빛의 혁명이 뒤엉킨 각축장에서 세 개의 시민주의는 빛났다. 그로 인해 우리 민주주의는 살아났고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내란 이후 1년,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무엇보다 광장의 시민이 벼랑 끝에서 지킨 민주주의에 내재한 제도적 허약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강조했다. 금과옥조의 명언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최후의 보루’로 그친 민주주의를 상상하진 않았으리라. 

12ㆍ3 비상계엄을 국회가 막은 후 국회 정원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대한민국 국회’라는 표지석이 놓였다. 몇 번의 정부에 걸친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민주주의는 벼랑 끝에서 ‘최후의 보루’가 지킨 ‘최후의 민주주의’가 되고 말았다. 광장의 시민이든 계엄군에 포위된 국회든 최후의 보루가 지킨 최후의 민주주의야말로 가늘고 위태롭게 서 있는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언제까지 차가운 광장에 선 시민의 힘으로 지탱되어야 하나? 

내란 후 1년, 우리 민주주의는 거대한 제도적 공백을 경고하고 있다. 해방 80년, 대한민국은 성공한 민주주의의 나라로 평가되고 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선거판’과 ‘국회’와 ‘광장’에서만 요란하게 아우성치는 얄팍한 제도에 머물러 있다. 두터운 대화와 소통을 뒷받침하는 제도 없이 안정된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내란 이후 1년, 최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보다 더 불안한 현실은 내란 심판방해와 지체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정치와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극단적 분열이다. 야당은 대놓고 윤석열과 ‘부정선거론’을 옹호하며 적반하장의 ‘법치’를 주장하는 후안무치를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 자신은 구치소에서 온갖 유치한 구실로 재판출석을 거부함으로써 지지자들에게 의도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재판정에서는 이른바 ‘법꾸라지들’의 그릇된 가치와 비뚤어진 신념이 활개를 치고, 윤석열의 입에서는 아이들이 들을까 무서운 상스러운 막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광장에는 야당, 정치화된 종교세력과 극우화된 세대들이 극단의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고 있다. 합리적 소통은 사라지고 혐오와 무시가 들어선 곳에 ‘반쪽의 공론장’, ‘자폐적 공론장’으로 변질된 소셜 미디어가 있다.        

내란 1년, 여전히 야당과 정치세력화된 종교, 극우화된 세대들이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등 공론장이 분열하고 있다.

정치 도덕성의 파괴

윤석열의 내란 이후 극단의 공론장에서 보편적 시민주의가 소멸하는 현실을 보며 나는 무엇보다도 ‘정치의 도덕적 형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넓은 의미의 정치는 공동체의 목표를 추구하는 공적 합의의 과정이다. 여기에는 입법부의 의회정치와 행정부의 관치, 사법부의 법치가 포함될 뿐만 아니라 제도정치와 공론장의 정치를 포괄한다. 따라서 정치는 공동체의 모든 질서를 포괄하는 가장 상위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정치질서는 ‘도덕적 형식’이 갖추어짐으로써 그 정당성을 얻고 나아가 공동체의 존립을 보장받는다. 도덕적 형식 없는 정치는 맹목적이고 위험한 권력일 뿐이다. 내란 이후 우리 정치에는 정치를 지탱하는 도덕적 형식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의 도덕적 형식은 ‘공적 이성’이다. 정치철학자 롤스(John Rawls)가 ‘중첩된 합의’(overlapping consensus)라고 표현한 공적 이성(public reason)은 개인적 욕망과 이익이 철저히 배제된 공공성이야말로 정치의 도덕적 기본이자 정치적 정당성의 근본이란 점을 말해준다. 윤석열의 국정파괴와 내란은 공사의 구분에 눈감았다. 국정은 무속과 취향으로 사유화되었고, 정치종교의 공개적인 정치개입과 극단의 혐오정치가 공과 사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미국 공영방송 PBS ‘뉴스아워’ 첫 꼭지를 장식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2024.12.03. PBS 캡처.

책임∙인정 윤리의 부재

정치의 또 다른 도덕적 형식은 ‘책임의 윤리’다. 정치사회학자 베버(Max Weber)는 정치는 권력이라는 악마와 손잡는 것이기 때문에 직업정치인의 자질로 신념의 윤리와 함께 책임의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의 국정은 국민과 역사와 영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반(反)책임의 정치’였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도 참사, 채상병의 죽음에 책임의 윤리는 찾을 수 없었다. 내란 재판과 특검의 수사에서도 모든 책임을 여당의 ‘입법독재’ 탓으로 돌리는, 책임윤리가 사라진 파렴치한 정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정치의 도덕적 형태는 ‘인정의 윤리’다. 독일 철학자 호네트(Axel Honneth)는 인정의 세 형태로 사랑, 권리, 연대를 들고, 무시와 모멸을 인정을 위한 저항과 투쟁의 원천으로 든다. 개인과 집단과 사회에 대한 인정의 윤리는 민주정치의 도덕적 기초다. 윤석열의 정치는 하나에서 열까지 국민과 야당에 대한 무시와 모멸로 가득 차 있었다. 헌법 질서와 사법 절차의 무시는 정치의 도덕적 기초로서 인정의 윤리 없는 무도한 정치의 전형을 보였다. 

공론장과 시민사회에도 무시와 모멸, 혐오와 증오의 정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정치의 도덕적 기초는 무엇보다 인정의 윤리에서 나오는 약속, 용서, 화해와 같은 형식이 되어야 한다. 내란 이후 우리 정치에서 인정의 윤리라는 도덕적 형식은 사라졌다. 

2025년 대한민국에 정치의 도덕률이 무너졌고 보편적 시민주의가 해체되었다. 게다가 내란 세력에 대한 단죄는 지체되고 있다. 내란은 끝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신념이 지배하는 두 국민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공공의 이성과 책임의 윤리, 그리고 인정의 윤리라는 정치의 도덕적 형식이 해체됨으로써 대한민국은 국가공동체의 근본이 사라진 위태로운 나라가 되고 말았다. 내란을 단죄하고 민주주의의 형식과 절차를 회복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무너진 정치의 도덕적 형식을 복원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정치의 도덕적 형식 복원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정치의 도덕적 기초를 세우고 보편적 시민주의를 일으키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래서도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두 가지 과제를 떠올려 본다. 무엇보다도 내란세력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야말로 그들로 인해 무너진 정치의 도덕적 형식을 세우는 일이다. 

MBC의 최근 조사(11월 21~22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58%가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내란이 종식되었다고 응답한 사람(29% )의 두 배다. 속도감 있는 내란종식이야말로 가장 빨리 정치의 도덕률을 세우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과제는 정치의 도덕적 형식과 보편적 시민주의를 세우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는 일이다. 역대 민주당 정부는 국정의 도덕적 형식에서 보수정부에 비해 우위에 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대통령으로 이어진 역대 민주당 정부의 국정은 평화, 포용과 혁신, 균형과 자치를 지향한다. 공공이성과 책임, 인정의 윤리라는 도덕적 형식에서 우위에 있는 셈이다. 도덕적 형식의 우위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주도하는 데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정치의 도덕률을 세우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통해 민주주의 4.0 시대를 열어야 한다. 내란 1년을 맞아 보편이 무너진 시대의 우울을 안고 끝나지 않은 내란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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