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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미디어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강지나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2023) (⏳5분)

아무도 하지 않는 질문

책의 제목은 질문이자 선언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단순히 청소년 빈곤의 실태를 보여주는 보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말해온 문장 ― “노력하면 된다”, “공부만이 살 길이다” ― 가 실제로 얼마나 공허한지를 증언한다.

저자 강지나는 25년간 교사로 일했고, 이후 청소년 정책 연구자가 되었다. 그는 여덟 명의 가난한 청소년을 10년에 걸쳐 추적했다. 이들은 통계나 그래프 속 숫자가 아니다. 이름을 가진 인간이며,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버티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다.

“이 사회에서, 가난한 아이들이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냉정하다. 강지나는 가난을 ‘눈물의 서사’로 포장하지 않는다. 이 책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묘사는 담담하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묵직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불쌍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의 태도는 동정이 아닌 기록이다. 그는 ‘관찰자’이자 ‘함께 걷는 사람’의 위치에서, 청소년의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아이들의 일상은 감동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의 벽 앞에서 무너지고 다시 서는 반복된 시도들의 연속이다.

‘선택 결핍’ 상태의 여덟 청소년

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은 ‘가난’의 재정의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저자는 아마티아 센의 ‘역량(capability)’ 개념을 빌려 말한다:

“가난은 선택할 수 없는 상태다.”

돈이 없어도 꿈을 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조용히 반문한다. 그 꿈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 환경, 사람이 없는 사회에서 ‘꿈’이란 무엇인가. 책 속 청소년들은 하나같이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대학에 가고 싶지만 빚이 무섭고, 일자리를 잡았지만 내일이 없다. 그들은 사회가 허락한 좁은 경로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가난은 바로 그 선택의 부재, 관계의 결핍, 존엄의 침식이다.

이 책엔 여덟 명의 청소년을 등장한다. 이 책은 그 여덟 명의 청소년이 보여주는 ‘불완전한 어른되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역과 배경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사회의 경계선에 있다.

  • 특성화고를 졸업한 영성은 현장실습 도중 산업재해를 당한다.
  • 대학에 진학한 소희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지현은 쉼터에서 자립을 시도하지만, 사회적 고립감에 시달린다.
  • 청년정책의 지원을 받는 다혜는 그마저도 단기 일자리로만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지친다.

이들의 이야기는 ‘특별한 불행’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보편적 현실을 드러낸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책임을 떠맡는 것’으로만 배웠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책임만 있고 보호는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돌봄의 행정화: 교육이라는 환상, 가난의 시간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은 유일한 희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책은 교육이 더 이상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부하면 된다’는 말은 구조를 은폐하는 주문이다. 특성화고·야간학교·검정고시 같은 대체 경로는 여전히 ‘2등 시민의 길’로 취급된다. 교육은 탈출의 사다리가 아니라, 분리의 기제로 작동한다.

공부를 해도, 대학을 나와도, 사회는 이들에게 ‘출발선’을 새로 주지 않는다. 출발선은 이미 부모의 사회적 자본과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결국 ‘노력의 윤리’는 불평등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된다.

이들에게 복지의 시간은 너무 짧고, 가난의 시간은 너무 길다. 이 책이 던지는 또 하나의 통찰은 ‘시간 불일치’다. 복지 정책은 1년 단위 예산으로 움직이지만, 가난의 시간은 훨씬 길다. 청소년이 자립하기까지는 5년, 10년이 걸리지만, 제도의 도움은 대부분 몇 개월 단위로 끊긴다.

강지나는 이를 “돌봄의 행정화”라 부른다. 서류는 완벽하지만, 관계는 없다. 프로젝트는 많지만, 지속성은 없다. 그 결과 복지는 관계를 대신하지 못한다. 진짜 복지는 돈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 시간의 공유다. 이 문장은 한국 복지의 맹점을 정확히 찌른다.

‘자립’이라는 이름의 고립

이 책에서 가장 잔혹한 단어는 ‘자립’이다. 사회는 청소년이 19세가 되면 ‘이제 어른이니 스스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에게 진짜 어른이 될 권리와 조건을 주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이다. 자립은 독립이 아니라 보호의 중단을 의미한다. 그들은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저자는 인터뷰이의 말을 인용한다.

“자립은 그냥 혼자 버티는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게 그거예요.”

이 문장은 ‘청년 자립’이라는 정책 언어의 허구를 꿰뚫는다. 자립은 제도의 퇴장이다. 복지국가의 공백이 개인의 근성으로 덮이는 순간이다. 강지나는 ‘가난을 끊는 힘은 돈이 아니라 관계’라고 말한다. 책 속의 아이들은 가족, 학교, 지역사회 어디에서도 안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들은 ‘도와주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버티는 법’을 배운다.

가난은 단지 돈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관계가 끊긴 상태다. 따라서 탈빈곤의 핵심은 복지금이 아니라 관계의 복원이다. 이것이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제안이다. 복지란 ‘누가 더 가난한가’를 판단하는 행정이 아니라, ‘누가 더 오래 곁에 머무를 수 있는가’를 묻는 사회적 약속이어야 한다.

느린 사회학의 윤리: 시간으로 쓴 사회학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통계가 아니라 시간으로 쓴 사회학이다. 저자는 10년 동안 아이들을 찾아가고, 만나고, 기다렸다. 이 느린 시간의 축적이야말로 이 책의 힘이다. 이 연구의 윤리는 “함께 존재하는 것”에 있다. 그는 연구자이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두려움을 고백한다.

“나는 이들의 시간을 살았지만, 결코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 문장은 사회학이 인간의 존엄을 다루는 학문임을 다시 확인시킨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동행’의 기록이다. 그 시간을 통해 강지나는 연민이 아닌 공공성의 감정을 일깨운다. 가난한 아이들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사회의 거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가난은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의 실패다. 저자는 말한다.

“가난은 구조의 실패이며, 상상력의 빈곤이다.”

복지의 실패는 곧 민주주의의 결핍이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잔잔하게, 그러나 분명히 증언한다. 물론 이 책은 완전하지 않다. 사례가 수도권 중심이라 지역적 다양성이 부족하고, 정책 제안은 선언적 수준에 머문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완결성에 있지 않다. 그 가치는 가난의 언어를 복원한 데 있다. 그 언어는 ‘불쌍하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강지나는 청소년 빈곤을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권의 문제로 끌어올린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이 사회는 아이를 보호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청년을 보호하는 법은 모른다.”

이 문장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보호가 끝나는 순간이다. 제도는 떠나고, 개인은 혼자가 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곧 국가의 돌봄이 끝나는 지점이며, 그 공백을 개인의 근성으로 채우는 사회 ― 이것이 오늘의 한국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누가 어른이 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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