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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의 새 필드] 한국학이 활발한 영국 셰필드에서 대중문화를 공부한 박미숙 박사와 함께 대중문화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싱어게인 3]와 능력주의.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 3: 무명가수전]이 지난 1월 18일 7개월 가까운 여정을 끝냈다. 모두 77팀이 탑 6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피로도 때문인지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더욱이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예를 들어 “오디션 프로그램이 공정하다는 환상”, “오디션 프로 잇단 공정성 논란” 등의 논란을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칼럼에서 내가 묻고 싶은 건 간단하다. [싱어게인 3]을 재밌게 봤으면서도 나는 왜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능력주의가 의심스러운가.

‘1호 2호 3호’ … 공정의 녹슨 갑옷


그것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능력주의 내지는 실력주의다. [싱어게인3] 은 여느 오디션 프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위와 같은 ‘공정성’ 논란은 더 완전하고 철저한 능력주의를 요구하게 한다.

[싱어게인3]은 출연자의 이름을 호명하기보다 참가자를 1호 가수, 2호 가수…77호 가수 등과 같은 숫자로 호명한다. 그뿐 아니다. 무명에서 유명이라는 명명식을 거쳐 단계별로 주제를 가지고 참가자들을 조별 그룹을 통해 한 단계씩 상승시킨다. ‘공정’의 갑옷을 입히면서 동시에 출연자들에게 정당한 경쟁에서 승리한 생존자라는 스토리텔링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결국 서바이벌 포맷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오디션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는가. 이러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는 내적 긴장감에 의한 피로도 있지만, 무엇보다 개인의 능력이 우월하면 많은 몫을 가져가고 열등하다면 더 적은 몫을 가져가도 좋다는 실질적 불평등과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한다. 심지어 능력주의를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제시하고 이를 생각 없이 따르게 하는 현상까지 낳는다.

싱어게인에 도전하는 가수는 이름 대신 숫자로 호명된다. 이름이 불려지기 위해선 탑10안에 들어야 한다. 물론 탈락하면 딱 한번 이름을 불러준다. 하지만 그 호명과 함께 퇴장한다. 어떻게 보면 쿨하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냉정하고 기계적인 느낌도 든다.

능력은 사회적이고 환경적으로 구성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는 가까이는 지필 시험과 같은 적절해 보이는 절차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학력주의에서부터 각종 고시와 같은 시험제도가 있다.

나 역시 이런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시험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사와 석사를 거쳐 박사를 받기 위해 영국이라는 외딴곳에서 괴팍한 지도교수의 ‘을’이 되어서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버텨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나는 능력자인가? 그 박사라는 타이틀이 내 능력을 입증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 능력을 경험적이고,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학력주의의 표상일 뿐이다. 내 실질적인 능력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능력주의, 그 실체는 생각만큼 평등하지 않으며 능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개인에게는 고유한 능력이 있고 이 능력에 따라 인정받는다는 말은 마치 개인 누구에게나 고유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개인의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력은 사회적, 환경적 요소에 크게 좌우된다. 다시 말해, 능력 발휘 역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셰필드 박사 학위가 내 능력을 보증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한국학으로 유명한 영국 셰필드 대학. 사진은 학생노조회관 모습. 셰필드 대학 제공.

개인의 고유한 능력? 그건 환상이다


그러니 능력이 온전히 개인의 것이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능력을 측정 위한 시험이나 절차 또한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싱어게인3]에서 심사위원 평가는 소수의 주관적 해석에 기댄 즉흥적인 인기투표의 합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출연자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심사위원들에게 내재한 편견과 취향의 괴리는 어쩔 것인가.

한국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능력의 차이도 인정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보장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교육비의 격차나 지역과 주거 환경에 따라 교육은 물론 건강까지 격차가 생긴다. 개인의 ‘노오력’으로 이런 격차를 줄이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목표로 노력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이미 출발선을 다르게 한다.

더구나, 과연 능력 좋은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까.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대부분 능력주의 시스템은 과정의 노력이 아니라 시험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차별한다. 한편으로는 개인이 ‘노오력’을 했다고 해서 사회가 반드시 보상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보상은 성장한 자기 자신일 것이다.

능력주의라는 환상을 체계화하는 사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우대하는 시스템은 사회 전체에 유리하기 때문에 정당화하고, 그런 역사는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고려,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는 인재를 선발해 통치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1천 년의 역사가 있다. 20세기 의무교육제도가 확산하고 사회에서도 사람을 선발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능력주의를 가장 일반적인 기제로 시험이 있었고 그 결과는 점수였다.

전근대적 문화와 시험을 통해 능력주의가 평가주의가 되면서 사람들은 평가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시험공화국 한국에서는 정리해고 대상을 노사 합의로 ‘시험’을 통해 정하기도 했다(참고 한겨레21).

다시 [싱어게인 3]으로 돌아가 보면, 이는 본인 자신과의 경쟁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취향의 총합에 의해 결정되는 비교 경쟁이다. 그것이 능력주의로 포장된 공정한 경쟁의 실체다.

능력주의, 또 하나의 억압적 경쟁체제


능력이 아니라 희망과 적성에 따라 개개인의 간절한 필요에 따라 교육받으면 안될까? 사회가 학력과 같은 차별로 개인을 나누고 분류하는 대신 개인으로서 행복, 사회인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양한 능력이 드러나고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당장 생존을 위한 능력만을 공정의 갑옷을 입혀 포장하는 일은 또 다른 억압적 경쟁체제에 불과하다.

“사다리는 부르주아지적 환상의 상징이다.”(레이먼드 윌리엄스, 영국의 문화비평가)
윌리엄스는 공정한 경쟁 자체가 사회적 허구임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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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어떤 글보다 능력주의에 입각한 글같이 느껴집니다
    남는건 박사 그것도 영국에서 대중문화를 공부한 박사라는타이틀입니다
    그것이 보장하는무게감이 글이 경계하는능력주의아닐까요?
    다양한 능력이 보장되는 사회 공정하고 객관적인 글을 방해하고 있는 타이틀 말이예요
    오디션프로그램의 피로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무명의 노력자들을 발굴하는 이과정이 아름답게 느껴지는건 그들의 능력이전의 끊임없이 버티는 보이지않는 그 노력이었습니다

    젊음이들의 경쟁이
    실력이
    마음을 짠하게도 했습니다

    심사위원의 주관적 견해가 걱정된다구요
    그들이 신이 아니고 로봇이 아닌데 절대적인것을 기대하는것만큼 철저한 능력주의아닐까요?

    부족한 그들의평가를 많은시청자들이 보고있고 그것을 반영하려고 하는장치가 시청자 투표였을 겁니다

    정말 잘한다는가수가 떨어지기도 하고 이 가수가 왜올라갔지 의아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중이 정말 능력만으로 그들을 평가했을까요?

    능력주의 오디션을 평가하기이전에 대중이 왜 이가수에 집중하고 감동했는지 대중의의식의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것 더 선행되었으면 어떠했을까요?

  2. “능력이 아니라 희망과 적성에 따라 개개인의 간절한 필요에 따라 교육받으면 안될까? 사회가 학력과 같은 차별로 개인을 나누고 분류하는 대신 개인으로서 행복, 사회인으로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음….. 어떻게요?
    개개인의 적성과 필요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간절함은 어떻게 파악하죠? 위장되거나 과장된 간절함은 또 어떻게 걸러내죠?
    개개인의 희망이 어느 특정 지점에 편중되면 어떻게 하죠?
    싱어게인에 도전한 77명의 가수, 좀 더 범위를 확장해서 예심에서 떨어진 수많은 가수들의 적성과 필요와 희망을 감안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뭘까요?

    앞서 인용한 구절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옳은데 좋은데 공허하다는 느낌에 글 남겨봅니다.
    선언적인 말만 할 거면, 그냥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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